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안 해도 되는 일과 꼭 해야 되는 일 (고전 7:25~40)

  • 잡초 잡초
  • 549
  • 0

첨부 1


안 해도 되는 일과 꼭 해야 되는 일 (고전 7:25~40) 

 
만일 여러분이 오랜만에 좋은 곳으로 가족을 동반해서 여행을 가게 됐다고 합시다. 가족을 동반해서 아주 멋진 곳으로 여행을 하신다면 돌아오실 때 선물을 안 사 오셔도 됩니다. 사오시면 좋지만 안 사 오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설을 맞아서 어르신들을 방문하실 때 굳이 선물 꾸러미를 사들고 찾아가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고 가면 좋지만 안 들고 가도 됩니다. 다만 들고 가신다면 거기에 정성을 담아야 됩니다. 정성이 담기지 않았다면 선물을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안 해도 되는 것이 있고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결혼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원리는 결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일에 공통적으로 해당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결혼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 담겨져 있는 원리를 생각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을 빌면 결혼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 해도 됩니다. 그리고 바울의 의견에 의하면 안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독신으로 있을 때 마음이 나눠지지 않고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세상일을 염려하게 되고 어떻게 해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해서 마음이 나눠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씀은 교회에서 자주 듣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이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의 신념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결혼을 하는 자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를 아끼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제안이지만 맞는 지적입니다. 세상에는 결혼을 하기 위해 아우성인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결혼의 듀오, 사랑의 듀오, 결혼하기 위해서 아우성이에요. 그러나 이들이 소원을 이루어서 결혼을 한 다음에도 좋아서 견딜 수가 없어서 아우성을 칩니까. 깨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립니까. 아니에요. 

사방에서 삐거덕 삐거덕 소리가 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방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 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이라는 것을 최대의 과제, 최대의 덕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이 맞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사람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라’ 적어도 그 사실을 알고 결혼하면 모르겠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왕자가 될 줄로 생각하고 공주가 될 줄로 생각하고 모든 것이 동화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제안은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리라고 했습니다. 

결혼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요. 이처럼 우리의 삶에는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안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처럼 아주 중요한 것이 거기에 포함돼 있다면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를 말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가 알 것은 첫째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의 해야 될 것부터 말씀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부터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의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우리가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부터 말씀하셨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을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은 이방인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한마디 말씀으로 주님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경우에 염려하고 그들의 고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거운 짐을 일순간에 덜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안 해도 된다,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건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백성이라면 이것을 염려하는 것은 불신에 의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에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시간을 차지하는 무거운 짐을 하나님이 덜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하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 씨의 아버지가 장의사입니다. 장동건 씨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이유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건달이 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야단칩니다. 그러자 아들이 대듭니다. ‘평생 염이나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때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가 언제 너보고 이 일을 하라고 했느냐.’ 아버지 말이 옳아요.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에게 이 일을 이어서 하라고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으레 자기 아버지가 그 일을 하기 때문에 자기도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고 거기에 대항하다보니까 비뚤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오해하고 의례 잘못 생각하고 하나님을 저항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나님은 한 번도 그런 요구를 하신 적이 없는데 우리는 당연히 그러려니 생각하고 반발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자녀를 PK(paster''s kids)라고 부르는데 목사의 자녀들이 비뚤어지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자기는 원치 않는데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에 당연히 목사가 되어야 하겠거니 생각하기 때문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누가 되라고 했습니까. 그런 말 한 사람이 없는데, 부모도 요구하지 않았고 하나님도 요구하시지 않았는데 본인이 스스로 그 짐을 져야 된다고 생각해서 반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의무감을 지워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천국의 윤리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두 번째 윤리는 옳고 그름을 생각할 때 그 기준이 우리에게 유익하냐에 있다는 사실이에요.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있어서의 기준이 우리에게 유익하냐는 것입니다. 다만 나에게만 유익하다고만 생각하면 안되겠지요. 나에게도 유익하고 이웃에게도 유익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것을 옳은 것의 기준이라고 볼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말할 때 기준으로 드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교회가 담배에 대해서 부정적입니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고 십계명이 그렇습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들은 그 이유가 하나님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그 모든 규정을 정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계명이 우리의 축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스타일을 유심히 살펴보면 부모가 자식과 대화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28절에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6절에 ‘내 생각에는’ 25절에 ‘내 의견을 고하노니’ 바울이 여기에서 앵무새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앵무새처럼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 근거해서 사도바울 본인의 신념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생각에는, 내 의견에는, 내 뜻에는, 이런 말이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이 없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성령 받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해서 더 바르고 더 옳고 더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해서 앵무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건강하고 옳고 바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의 문화권에 살았던 바울이 어떻게 보면 이십일 세기를 사는 우리보다 더 자유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있다면 해야 되는 것은 무엇이냐. 이게 관건입니다. 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 결혼을 다시 예로 들자면 결혼은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했다면 충실해야 됩니다. 여기에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안 해도 되지만 했다면 충실해야 됩니다. 27절에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은 매이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 스스로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얘기에요. 사람을 섬긴다는 말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은 절대적인 의무에요.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안 해도 되는 것 많아요. 자녀가 정말 공부하기 싫어하면 시키지 마세요. 안 해도 됩니다. 공부를 해야만 행복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해야만 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하여 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고난당하고 남에게도 고난의 짐을 지워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하라고 하지 않았고 본인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부모도 해야 된다는 확신이 없는데 누가 하라고 시켰다고 그렇게 매입니까. 

누구의 종이 되는 것입니까. 누구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까. 생각해보면 억울해도 그렇게 억울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뿐만이 아니고 많은 것들이 그래요. 하나님이 요구하지도 않았고 또 내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100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에게 하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으레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고 일평생 많은 에너지와 정성을 기울여서 그것을 좇아가는데 실제로 그것이 유익한 것이냐 옳은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되고 그 대신 정말 해야 되는 것들, 해야 되는 것을 한다면 안 해도 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담대함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