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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의 땅에 임한 기근 (창 12: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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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에 임한 기근 (창 12:10~20)


창세기 12:10-20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아브람은 75세의 나이와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 약속만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먼 길을 걸어 이 약속의 땅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약속의 땅이면 에덴 동산 만큼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부족하지는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 맞았던 첫 사건은 기근이었습니다. 10절입니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약속의 땅하고 기근은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이곳이 약속의 땅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을 법도 합니다.

이런 일이 비단 아브라함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섰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곳에는 강력한 가나안 일곱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 중에는 골리앗의 조상인 거대한 몸집의 아낙 자손들도 있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만 여러분 팔레스타인 땅을 한 번 가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정착했던 곳은 평야지대가 아니라 산악지대였고, 땅은 척박하고 돌무더기가 많았습니다. 비 또한 많이 내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풍부한 물이 광활한 평원에 농사를 짓던 애굽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1620년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2명의 신앙인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약속의 땅인 아메리카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은 60여일의 긴 항해와 위험을 이겨내었습니다. 미국 북동부에 위치한 플리머스라는 곳에서 정착하였지만 그들은 그 1년 사이에 기근과 질병으로 절반이 죽고 5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이듬해 주변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농사를 짓고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예배를 드렸던 것이 오늘날 미국에서 드리는 11월의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첫 시작은 이처럼 어렵고 힘듭니다. 약속의 땅에는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던 때와 별반 차이가 없고 오히려 더 큰 시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때가 기근의 때요 기근을 만나면 우리 신앙은 흔들립니다. ‘하나님이 뭐 이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는 반드시 기근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기근을 통과하길 원하십니다. 기근을 통과한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기근은 마치 용광로처럼 진짜와 가짜, 순금과 불순물을 가릅니다. 하나님은 기근을 통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시험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근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강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근을 통과해야 더 단단해지고 깊숙이 뿌리를 내립니다. 문제는 땅이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강해지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복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풍요로운 땅도 황무지로 만들 것입니다. 사람이 제대로 서면 황무지도 풍요의 땅으로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복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시련을 당한 믿음의 지체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시련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시련을 통과할 때 우리에게 더 좋은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비약은 없습니다. 겪어야 할 것들을 차근차근 겪게 하십니다. 요셉은 형제 중 으뜸이 되며 모든 사람들에게 절 받는 꿈을 어린 시절부터 가졌지만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노예로 팔리며, 누명을 받아 감옥에 갇히는 억울함을 견뎌야 했으며,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외로움 또한 이겨내야 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몽하며 어느 날 갑자기 슈퍼스타처럼 애굽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세월 하나님의 연단과 준비 과정을 거쳐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쓰임을 받기까지는 아라비아 광야 3년, 그리고 다소에서 은둔 생활 10년, 도합 13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후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실함과 인내로 견디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세 사람이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곧 죽게 생겼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운명을 탓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하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나무 위로 달아나자고 하며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세 사람 중 누가 살았겠습니까? 나무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인생의 위기 앞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운명 앞에 절망하고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앞에 우연과 요행수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가 정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기도가 요행수이고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가져야 할 성실함과 최선을 다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약속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원하시고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신앙은 요행수가 아닙니다. 요행수에 익숙해지면 인간이 약해집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라

아브라함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브라함이 선택한 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옳은 결정이었을까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약속의 땅을 벗어날 때는 신중히 결정을 했어야 합니다. 신중한 결정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했다는 말은 한 구절도 없습니다. 

10절은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라 하여 평소에는 하나님을 잘도 찾던 아브라함이 정작 중요한 문제가 닥쳤을 때는 전혀 기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자기가 결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애굽으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자주 경험하는 바이지만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그 자리를 회피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가도 똑같이 발생한다는 사실입니다. 회피하지 말고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나 인격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습니다. 그 중 단 지파는 블레셋 족속이 위치한 경계 지역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단 지파 출신 중에는 삼손도 있고 해서 어려운 지역에서 잘 버텼지만 결국 기업을 옮기는 결정을 하고 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최북단으로 기업을 옮깁니다. 사사기 18장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새로운 땅을 발견했을 때 그 땅에 대한 묘사를 이렇게 합니다. “이에 다섯 사람이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거기 있는 백성을 본즉 염려 없이 거하여 시돈 사람같이 한가하고 평안하니 그 땅에는 권세 잡은 자가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괴롭게 함이 없고 시돈 사람과 상거가 멀며 아무 사람과도 상관하지 아니함이라” 블레셋과의 싸움이 너무 힘들었었던지 그 지역이 한가하고 평안한 것이 너무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보면 단은 우상숭배의 근거지가 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물을 때 단에 세웠던 우상이 꼭 언급됩니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왕하10:29) 요한계시록에 보면 최후에 구원받은 열두 지파 14만 4천 명을 언급을 하는데 여기서 빠진 지파가 하나 있는데 바로 단 지파입니다(계7:2-8). 그들이 약속의 땅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에서도 멀어지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타협하면 더 큰 어려움이 옵니다. 너무나 쉽게 결정하지 마십시오.

항상 그 곳에 머물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떠나라 하실 때가 있습니다. 야곱 대에도 심한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약속의 땅을 떠날 것을 허락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46:3)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사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은 이사와 관련된 단순한 문제로부터 직장을 옮기거나, 직업을 바꾸거나, 교회를 옮기거나 새로운 사역지로 가거나 할 때 필요합니다. 그 단계에 필요한 훈련과 성숙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하나님은 우리를 다음 단계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꾀와 하나님의 해결책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상태가 거의 바닥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두려움이 생깁니다. 믿음이 없으면 편법과 거짓을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꾀를 냅니다. 자기 아내 사라가 아름답기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해하고 아내를 빼앗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를 자기 누이라 속이기로 합니다. 아브라함의 예상대로 애굽 사람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그들은 사라를 바로의 궁으로 들어가게 했고 대신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물질로 후대합니다. 

11절에서 16절까지 이 과정을 성경은 담담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머리로 만든 꾀의 결과는 16절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자기 목숨은 살았습니다. 갑자기 재산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기 곁에 있어야 할 아내는 없고 양과 소 울음소리만 가득한 그 밤을 보내야 하는 아브라함의 신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행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기 꾀를 내는 사람은 그 결과가 좋지 못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습니다.”(시1: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런 연약한 모습에 대해서 전혀 책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내를 빼앗아 간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림으로써 비로만 혼을 내었지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많은 설교나 많은 주석들을 보면 아브라함의 도덕성을 문제 삼고 믿음의 연약함을 지적하는 글들이 많습니다. 또 실제 사라가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이었음(창20:12)을 강조하며 아브라함의 행위를 변호해 주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해서 잘못했다거나 변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담담히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럴까요? 저는 여기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려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엄격한 눈을 가진 재판관이 아닙니다. 힘 없는 약자들의 삶을 이해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항상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가진 것을 빼앗기는 약자들의 고통을 봅니다. 

우리 전래 동화 중에 ‘우렁 각시’가 있습니다. 어느 가난한 농부가 힘들게 일을 하다가 “누구랑 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농사를 짓지?”하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나랑 먹고 살지 누구랑 먹고 살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몇 번 이 소리를 듣고 가보니 큰 우렁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우렁이를 집에 갔다 놓으니 농부가 일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밥 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알고 보니 이 우렁이는 선녀였습니다. 이 선녀를 아내 삼아 농부는 행복한 삶을 삽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면 좋겠는데 이 동화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우렁 각시가 남편 대신 농사일을 나갔다가 지나가던 현감의 눈에 띄었고, 결국 농부는 아내를 빼앗기게 됩니다. 아내를 빼앗긴 농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푸른 새가 되어 아내를 찾아갑니다. 아내 또한 남편을 그리워하다 죽어 새가 되어 둘이 함께 날아갔다는 슬픈 동화입니다.

이 전래 동화를 통해 우리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암담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갈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힘 있는 자들에게 빼앗기는 현실 또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런 약자의 설움을 강대국 애굽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거짓을 말하고 술수를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이 불의를 행하는 일을 불쌍하게는 볼지언정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마12:20)하시는 분입니다. 갈대가 약하다고 불이 꺼져간다고 나무라거나 바꾸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강하고 힘 있는 자에게도 공평하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자들은 구지 이런 말하지 않아도 법대로 판단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약자들에게만 가혹한 법의 기준을 요구하지 강자들에게는 오히려 관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가난한 자와 약자의 권리를 배려하지만 강자의 불의와 탐욕에 대해서는 가차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자인 아브라함의 실수에 대해서는 눈감으시고 강자인 바로를 향하여는 직접적인 심판을 내리십니다.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의 경우만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디아스포라’라 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이런 약자들의 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붙잡았던 것은 바로 가난한 자를 이해하시고 약자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정의였습니다.

요즘 법원의 판결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주로 거대 언론과 정부 여당에서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가족과 정부 공권력, PD수첩과 정부의 명예, 시국선언한 전교조 교사와 정부, 파업 노동자나 해고 노동자와 회사 이 둘 중 누가 약자이고 누가 강자입니까? 누구에게 더 엄격한 죄를 물어야 합니까? 모든 것을 잃는 사람하고 작은 것을 잃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주어야 합니까? 물론 진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약자의 잘못에 대해서는 먼지까지 털려 하면서도 강자들에게는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 선봉에 검찰과 정부와 거대 언론이 있습니다. 삼성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판결이 확정되자 이건희 회장은 곧바로 사면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들의 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죄와 잘못을 저질러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는 뜻입니다. 우리도 어느새 세뇌가 되어 강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이런 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눈은 한없이 사랑과 이해의 눈인데 우리는 그 눈이 불꽃같이 우리 잘못을 추적하고 심판하는 눈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조금만 실수하고 잘못해도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실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그러니 심각한 잘못이 아니라면 자신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는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후에도 동일한 실수를 또 한 번 반복합니다. 창세기 20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 앞에서 또 한 번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약자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 앞에 강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0)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부자가 된 아브라함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몸을 통하여 언약하신 약속의 자녀를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벌여놓은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려 사라가 무사히 아브라함에게 돌아오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창12:3)는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을 그대로 실현시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내를 빼앗아 가는 저주를 행했던 바로에게 저주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족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될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부족해도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역사를 지켜보며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물질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기근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를 얻었습니다. 1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지만 이것을 복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떠나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짓을 했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물질적으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실수나 잘못을 범해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이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큰 복을 주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의 부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애굽을 나오면서 아브라함의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했고, 그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데 얼마나 신실하신가를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고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의 인격도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보게 되면 조카 롯에게 자기 재산을 양보하는 넉넉함도 가지게 되었고, 조카 롯을 빼앗아간 도시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담대해졌습니다.

오늘은 설 명절입니다. 음력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금년 한 해 무엇보다 신앙의 부자가 되는 축복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깊어지기를 바라고 우리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이 이제는 기근에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같은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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