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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구니를 세어보아라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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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를 세어보아라 (요 6:1~15)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1592년 임진왜란 초기, 육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며 패배를 거듭하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은 백전백승하며 풍전등화 같던 나라를 구해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너무 잘 나가면 시기를 받나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모함을 받아 졸지에 한양으로 압송 투옥되는 처지가 되는데 이 때 이순신 장군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무참하게 패해 이순신 장군이 5년 동안 구축한 조선 수군은 일거에 궤멸되고 맙니다. 

그 후 열흘도 채 안 된 7월 23일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지만 남은 배를 세어보니 단 열두 척뿐이었습니다. 모두가 이제 끝이라고 했습니다. 열두 척 가지고 뭘 하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조정의 공론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이런 내용의 상소를 올립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바로 이 남은 열두 척의 배로 이순신 장군은 9월 16일 왜적선 133척과 맞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너무나 유명한 일화입니다.

요즘 “세어보아라”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세면서 살아갑니다. 아마 오늘 하루만도 여러분은 상당히 많은 것을 세셨을 것입니다. 교회 와서 헌금하려고 돈을 세신 분도 있겠고, 오늘 새가족이 몇 분이나 올까 사람 숫자를 센 분도 있을 것이고, 시간을 세면서 기다린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똑같이 세는데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세는 데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세고 나서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말합니다. 겨우 열두 척 가지고 뭘 하겠냐고,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숫자로 대체 뭘 할 수 있겠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똑같이 세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아직 열두 척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는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 냅니다.

여러분, 기적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적인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언제나 일어날 법 한 까닭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 기적이 일어날 법한 까닭을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믿음!” 이 믿음이야 말로 긍정의 힘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 말입니다. 열두 척으로도 충분히 이긴다는 것처럼 비록 지금 내 상황이 어렵고 모든 조건이나 환경이 열악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반드시 된다는 긍정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에 일어난 모든 기적은 다 긍정의 힘, 바로 믿음에서 유래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도저히 모든 상황이 불가능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으로 할 수 있다고 긍정할 때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더라도 제대로 세어야 합니다. 세고 나서 괜히 이걸로는 안 된다고 못한다고 물러서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는 절대 기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역사할 수 없습니다. 똑같이 세더라도 이것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는 데서 기적은 일어나고 은혜의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세어도...

오늘 본문에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오병이어 사건이 나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의 기적 중에는 드물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만큼 이 사건이 중요하기도 하고 또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인상적이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이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을 꼼꼼히 읽노라면 참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세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숫자를 셉니다. 그리고 계산을 합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세도록 시키십니다.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는지 세어보라고 시키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어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떡을 세어보라고 하신 것은 무언가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괜히 세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이 있어 세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6장으로 가서 5~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이 빌립에게 왜 세어보라고 하셨다고요? 빌립이 어떻게 반응하나 시험하려고요. 뭘 시험합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이 빌립이라는 제자가 과연 숫자를 세고 나서 긍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인지,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험 결과 빌립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7절에 보면 빌립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여러분, 긍정적인 대답입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대답입니까? 부정적인 대답이지요. 그러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믿음은 긍정의 힘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빌립이 머리는 너무 좋아요. 계산은 너무 빨라요. 지금 모인 사람이 세어보니까 장정만 한 오천 명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자와 애들까지 하면 대충 만 오천에서 이만 명, 이 숫자에다가 한 사람이 충분하지는 않아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1인당 얼마니까 곱하기 얼마 해서 이백 데나리온,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서 벌써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빌립이 전자계산기가 있었겠습니까? 

그냥 머릿속에서 암산으로 딱 나온 겁니다. 그만큼 빌립은 머리도 좋고 계산도 빠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믿음은 절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머리가 너무 좋고 계산이 빠른 사람은 믿음을 가지기가 좀 어려워요. 좀 둔하고 느린 사람이 믿음이 좋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냥 계산이 안 되니까 “전 잘 모르니까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요. 실제로 이 머리 좋은 빌립도 예수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습니까? “불가능입니다. 제가 한 번 머릿속으로 세어서 암산해 보니까 이백 데나리온으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돈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불가능 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곧이어 또 다른 제자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는데요.” 보리떡과 말린 물고기는 당시 서민들의 주식이었습니다. 아마 어떤 아이가 자기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예수님께 바친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의 반응도 어떻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한 마디로 이걸 가지고 뭘 하겠냐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겨우 한 사람이나 먹을까 말까 한 양인데 겨우 이걸 가지고 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숫자를 세어볼 것을 요구하셨는데 얘네들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지,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지, 그래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 보신 것인데 결과는 안 된다는, 못 한다는 대답뿐이었던 것입니다.

❚바구니를 세어보아라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마침 그 장소에 잔디가 많아서 사람들을 다 땅에 앉게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축사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십니다. 물고기 두 마리도 축사하신 후 나누어 주십니다. 축사한다는 말은 감사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밥 먹을 때 감사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놓고 기도한 것은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는데 축사한 후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것도 조금씩 준 것이 아니라, 빌립은 아주 조금씩 줘도 모자란다고 했는데 11절에는 ‘원대로’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달라는 대로 주고, 모두가 실컷 배불리 먹도록 주었다는 뜻인데 줘도 줘도 보리떡과 물고기가 안 없어지더라는 말입니다. 12절에 뭐라고 합니까? 거기 있는 사람 오천 명, 아니 수만 명이 다 배부른 후에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남는 떡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며 남은 떡을 다 거두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남은 떡이 얼 만큼이었다고요?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음식 남기면 낭비도 되고 환경도 오염되니까 남은 음식 다 거두라고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최초의 환경운동가였을까요? 아닙니다. 남은 떡을 거두게 하신 것은 그만큼 풍성하게 먹고도 이만큼 남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 바구니들은 말하자면 시청각 자료인 셈입니다. 사복음서 모두가 그냥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꽤 남았다”고 기록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열두 바구니 남았다”고 숫자로 기록한 것은 그만큼 차고 넘쳤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는 말과 특히 남아서 거둔 떡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그 열두 바구니는 풍성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상징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냐? 배불리 먹고도 그 부스러기만 열두 바구니가 남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이 이렇게 크고도 놀랍다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참으로 매몰차게 거절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 취급했기 때문에 너 같은 이방인 개에게 줄 떡이 어디 있느냐? 너한테 베풀 은혜가 어디 있느냐? 자녀인 유대인에게 줄 은혜를 왜 너같이 개 같은 이방인에게 주겠느냐는 뜻입니다. 어찌 보면 참 이해가 안 가는 말씀이지요.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방인을 개 취급 하고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을 하신단 말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본심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의 믿음을 시험해 보려고 질문하신 것처럼 이때도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 하신 것입니다. 과연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지, 부정적인 대답이 나올지 말입니다. 만약 이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화를 내고 가버렸다면 거기에 기적인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 7:28)

참으로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예, 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하지만 상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개 같은 저에게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이 여인의 믿음이 대단한지 아십니까? 우선 자신을 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를 최대한 낮춥니다. 이렇게 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천 명이 땅바닥에 앉았을 때 비로소 떡과 물고기를 받은 것처럼, 여인이 자신을 개로 인정한 것처럼 자신을 가장 낮추고 또 낮출 때 우리는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뻣뻣하게 서서는 은혜 못 받습니다. 겸손하게 여러분을 최대한 낮추십시오. 그러면 은혜가 내려올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요청한 것이 중요합니다. 여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은혜 주시면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부스러기가 열두 바구니 남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떡은 자녀들 주시고 저는 그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남는 것, 부스러기만 해도 이렇게 크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라 달라고 하니 거기 어찌 기적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막 7:29) 벌써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네가 그 놀라운 진리를 알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사모했으니 그 믿음 크도다, 그러니 내가 부스러기 아닌 풍성한 떡을, 큰 은혜를, 놀라운 기적을 네게 베풀어 주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하십시다. “부스러기 은혜도 참 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이 결코 부스러기를 사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상아래 있는 개입니까? 아니면 식탁에 제대로 앉은 하나님의 친자녀입니까? 당연히 친자녀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겨우 부스러기나 사모하지 말고 진짜 큰 떡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부스러기 신앙도 크지만 친자녀 신앙은 더 큽니다. 개가 상아래에서 주워 먹는 부스러기도 이렇게 크고 좋은데 우리 자녀에게 주실 떡덩어리는, 그 은혜는 얼마나 크고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세려면 제대로 세시라는 말입니다. 기껏 세어보고 하는 말이 “에게, 겨우 이겁니까? 이걸 가지고 어떻게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해서는 은혜 못 받습니다. 구하라고 했더니 기껏 구하는 게 너무 적어요. “하나님, 그저 먹고 살 만큼만 주세요. 저 욕심 안 부립니다. 쬐금만 주세요. 정 안 되면 부스러기라도 주세요.”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 기대가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너무 적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친자녀인 우리가 그런 은혜 구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건 상아래 있는 개나 구하는 것이지 친자녀는 그렇게 구하면 안 됩니다. 친자녀에게는 친자녀다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많이 달라고 하면 배불러 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배불리 실컷 먹고도 남아서 부스러기가 열두 바구니 남을 정도로 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인 자녀인 우리가 이렇게 구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은혜는, 기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어보아라’ 시리즈 첫 번째 말씀으로 나눈 신명기 28장에도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2-13)

어떻게 주신다고요?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어서 복을 내려주시는데 얼마나 주시냐?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절대 꾸지 않을 것이고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말라기 3장 10절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 헌금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수단입니다. 십일조 쉽지 않아요. 어떻게 내 소득의 10%나 되는데 쉽게 드립니까? 그래서 십일조도 믿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으로 드리는 십일조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나 안 붓나 시험해 보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말은 여기에만 유일하게 나옵니다. 예수님이 빌립과 수로보니게 여인을 테스트 하신 것처럼, 우리도 십일조로 하나님을 감히 테스트 해보라는 것입니다. 정말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나 안 붓나 말입니다. 믿음도 깨작깨작 갖지 말고 좀 통 크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큰 믿음 가지고,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시는지 시험해 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냥 먹고 살만큼만, 부스러기라도 주세요”가 아닙니다. 또 “그냥 좀 많이 주세요” 정도가 아닙니다. “오천 명, 아니 수만 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 남는 은혜를 주세요” 하고 구하라는 말입니다.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고 복을 내려주세요, 저 하늘 문을 활짝 열고 내 창고에 더 이상 쌓을 곳이 없도록, 그래서 차고 흘러넘치도록 부어주세요. 나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꾸어주고 베풀도록 주세요” 하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은혜를 기대하기 바랍니다. 이런 은혜를 구하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열두 바구니를 세어보는 믿음입니다. 그리하면 바로 그 은혜를 친자녀인 우리에게 차고 넘치게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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