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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나를 알게 하소서 (시 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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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알게 하소서 (시 39:4~7)


미국 주립대학 연합회의 의장인 제임스 애플 벌은 인류의 지식이 증가하는 속도에 대하여 말하기를“인류가 1900년~1950년까지 50년 동안 새로 습득한 지식은 이전까지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지식 량의 갑절에 달한다. 1950년~10년 단위로, 1970년부터는 5년 단위로, 그리고 1990년대에 와서는 3년 단위로 인류의 지식이 갑절로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 2020년이 되면 73일마다 새로운 지식이 배가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링컨(1809~1865)대통령 피살 사건 뉴스가 영국 런던까지 전해지는데 5일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지금부터 130여 년 전 일입니다. 오늘날은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모든 정보가 전 세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지식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의 발달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전도서 1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하셨습니다.

이 시간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더 좋은 날을 꿈꾸며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작년에는 세계 경제 여파로 우리나라도 힘든 한해를 보냈습니다. 가정의 모든 씀씀이가 줄어들었지만 자녀의 교육비만큼은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배우고 가르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정말 소중한 것을 알지 못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사람을 찾는 다면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셨든지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말씀하시기를“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란 조상을 얼마나 존경하는가 하면 3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와 같은 인물이 한 번 더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다윗은, 사람들이 꼭 알아 할 세 가지를 깨닫고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一. 다윗은 인생의 종말을 알고자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삶의 특징은 언제나 종말을 생각하며 살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삶을 아름답고 보람되게 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 했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종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원하지만 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언제 어디에서 내 생의 종말을 맞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종말이 내게는 없는 것처럼, 있다 해도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후(死後)의 심판을 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절~20절에 사후(死後)의 대비를 위해 권면하시기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계는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동남아를 강타한 스나미의 악몽이 사라지기도 전에 지형까지 바꿔버린 중국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작년에는 필리핀의 마닐라 대홍수와 연이은 말레이시아의 지진 그리고 아이티의 대지진 등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서울에도 진도 3의 지진이 3초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우연으로만 보시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7절~8절에 말씀하시기를“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재난이란 예수님의 재림 전에 나타날 세상종말의 징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4절에 당부하시기를“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하셨습니다. 

사람의 지혜가운데 하나는 내일을 예측하고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겨울이 올 것을 예측하기에 늦가을이 되면 월동준비를 합니다. 질병과 불의의 사고를 대비하여 보험을 듭니다. 노후를 대비하여 노후대책을 세웁니다. 더 나아가 우리들은 죽음 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주목적이 인간의 사후(死後)의 세계를 알리시며 준비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한때 세계를 제패했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는 매우 지혜롭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신하를 시켜 물 한잔을 떠오도록 하되 쟁반에 해골도 같이 가지고 와서 그의 침실을 두드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어나자마자 냉수 한잔을 마시고 그 다음에는 해골을 물끄러미 쳐다본 후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공복에 냉수 한잔씩을 마신 것은 그의 건강에 유익을 주었을 것이고, 또 해골을 쳐다보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한 것은 그의 삶의 자세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종말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생각과 삶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사람의 삶은 진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후회를 남길 일을 하지 않습니다. 

二. 다윗은 인생의 연한을 알고자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여호와여 나의...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종말만 아니라 연한의 어떠함을 깨닫고자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다윗은 자신의 연한을 깨닫고 본문 5절에 말하기를“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깨달은 연한이란 어떤 것입니까? 손 넓이만 하다고 했습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길이를 잴 때 제일 짧은 길이는 손으로 쟀습니다. 손으로 잴 때 손의 길이로 재면 더 길지만 넓이로 재면 더 짧습니다. 다윗이 우리 인생의 길이를 손 넓이 만하다는 것은 그만큼 짧다는 것입니다. 너무 짧아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시간을 가장 보람된 것을 찾아 그 일을 위해 투자할 것입니다. 

시편 90편 10절 말씀에는“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깨달은 인생의 연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모세는 이어서 기도하기를“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 90:12) 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것이 인생이므로 주어진 시간들을 아껴서 살아가는 지혜를 얻고자 기도했습니다. 

욥기 7장 6절에는“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욥이 깨달은 인생의 연한입니다. 베틀의 북이란 연세가 많은 분들은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는“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야고보 사도가 깨달은 인생의 연한입니다. 

또한 세월의 빠름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0대는 기어가는 듯하고
20대는 걸어가는 듯하고
30대는 뛰어가는 듯하고
40대는 수레를 탄듯하고
50대는 말을 탄듯하고
60대는 나는 듯하고
70대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듯하고
80대는 번개처럼 지나간다.

나이가 곧 시속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우리들의 연한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보다 앞서 이 땅에 살다간 조상들이 남긴 덕스럽지 못한 노랫말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고 병들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먹고 마시고 노는 것에 삶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도 한창 일할 젊은 날에 말입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남긴 것은 끼니마저 때우지 못하는 부끄러운 가난이었습니다. 우리는 연한이 짧기에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일하되 내 자신의 이익만 위해서 일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만 위해 일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에 살고 있는 불신 영혼들을 위해 일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삶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삶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과 내세의 상급을 예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는“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몇 년 전 중국 북경을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북경의 자금성을 보며 느낀 것을 이렇게 글로 적었습니다. 

14억 인구가 살아 숨 쉬는 중국 땅 수도 베이징에
난생처음 발을 디뎌 놓았다. 
생김새가 같기에 낯설지 않은 사람들. 
팀 리더 가이드 양이 
짝퉁 조심, 소매치기 조심, 바가지 조심, 
또 조심, 조심 하라고 주의만 주지 않았어도 
반갑게 다가가 손짓 발짓 해가며 말을 걸고 싶은 사람들, 

천안문 광장을 지나 자금성을 돌아보았다. 
백성을 볼모하여 신처럼 살아보려 
수십 수백만의 땀과 눈물을 착취하여 세워 놓은 
겉보기 웅장하고 그럴싸한 공룡 같은 건물들, 

가는 곳 마다 용트림이 보인다. 
“내게 절하면 내가 넘겨받은 이 땅을 네게 주리라”(눅4:5)며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단 앞에 천단을 쌓아가며 
신 같아지려고, 신 같아 보이려고 애걸하던 황제들, 
게걸스레 탐욕의 늪에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3천 궁녀 노리개 삼아 방탕의 세월 보내며 천하를 호령하던 황제들, 
나는 지금 자금성에서 그 흔적을 살피다가 
민초들이 잡초처럼 짓밟히며 
한스럽게 살았을 한 나라와 
황당하게 살았을 당 나라를 떠 올린다. 

왼발로 둥근 대지를 밟고 선채 야릇한 미소로 성을 지키는 괴수들, 
발톱을 들어 낸채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 곳 저곳의 용, 용, 용들…
고단한 세월을 헐떡이면서, 
허공을 향해 허우적대며 살았을 민초들의 아우성이 
천안문 광장에서도, 자금성 구석구석에서도
서리서리 한 되어 뿌연 안개처럼 대지를 어둡게 짓누르고 있다. 

주여~!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흑암의 권세들을 물리쳐 주소서, 
용들의 천하에서 짓밟힌 이 백성들에게도 
십자가 구속의 은총을 맛보게 하소서. 

천하를 호령하며 힘없는 백성들의 피를 빨아 자기 영광에 도취되었던 황제들도 다 갔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다 이렇게 속절없이 잠깐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본향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여기가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2절~3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은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9절~21절에 당부하시기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셨습니다. 

三. 다윗은 인생의 연약함을 알고자 기도했습니다. 

본문 4절에“여호와여 나의....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1장 24절에 기록하시기를“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피었다가 바람 불면 사라지는 풀의 꽃처럼 나약한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말씀에 순종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러한 사람을 귀하게 들어 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29절 말씀에“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깨달은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 기록하기를“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무능함과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무엇을 하려하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인도한 모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동족 해방의 꿈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에서 40년간 배운 자신의 지식을 가지고는 애굽 사람 단 한 명밖에 죽이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 동안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어느덧 모세의 나이가 80고령에 이르렀습니다. 민족 해방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밖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절대적인 소망을 품었을 그때 하나님은 80노인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민족해방의 위대한 역사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았던 다윗은 일생동안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한 다윗을 그 누구도 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전체가 불레셋의 골리앗 장군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한 소년 다윗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하고 패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은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지기의 힘으로 삼고 시편 18편 1절~2절에 고백하기를“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했습니다.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았던 다윗의 삶의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네 인생의 크기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얼마나 좋은 조건으로 인생을 출발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네 종류의 삶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도,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영적 감각이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시편 53편 1절에“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라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저주를 받아 영원한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상에게 절하고, 우상에게 복을 빌고, 우상의 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상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가공물일 뿐입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는 거짓 신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고, 하나님 외에 우리를 구원할 신이 없습니다. 우상을 섬기게 되면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자기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전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며 살아갑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며 세상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교회는 다니지만 삶의 중심은 여전히 세상 욕망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간절함이나 정성됨이 없습니다. 자기가 감당해야할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열매가 없습니다. 

넷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더 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한없이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 위해 모든 삶을 하나님 우선순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임을 깊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내 아버지가 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예레미야 17장 7절~8절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네 종류의 삶 가운데 어디에 속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힘을 굳게 의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 또는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다윗은 인간의 근본에 대하여 깊이 깨닫고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의 종말을 알게 하소서.
나의 연한을 알게 하소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이처럼 지혜로운 기도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깊이 깨달은 다윗은 본문 7절에 말하기를“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권세가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군주였지만 세상의 부귀가 그의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다윗의 믿음과 소망과 기도가 우리 모두의 믿음과 소망과 기도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깨달음이 우리 모두의 깨달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며,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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