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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한 대로 (막 11:12~1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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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대로 (막 11:12~14, 20~26)


출처를 알 수 없는 글 가운데 “나눔”이라는 글을 먼저 소개합니다. 

우리는 온갖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려는 의지라는 욕심 외에는 모두가 지저분할 뿐입니다. 
그래서 가지려 하면 할수록 추악할 뿐이지요. 

당신의 삶 속에서 조그만 부분이라도 여럿과 함께 해 보세요. 
고생해서 얻은 재물도 이웃을 위해 써보세요. 명예도 양보해 보세요. 
사랑도 베풀고 나누어 보세요.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렇게 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들을 내세우지 마세요. 미련 두지 마세요. 
척하지 마세요. 그것 자체로 족하니까요. 
그러면서 밝고 조용히 웃어 보세요. 고요한 것은 아름답습니다.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때 당신의 삶은 아름다워지고 
우리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지요. 

사람을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한다는 것이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지만 
정작 미워할 것은 미워하는 당신 자신입니다. 
스스로를 위해서 미워하지 마세요. 
칭찬하거나 격려로써 손을 잡고 힘이 되지 못할지언정 
없는 말까지 지어내어 음해하지 마세요. 
스스로 잘난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도 없고 알량한 재주로 
남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못난 사람이지요. 

큰물은 소리 내어 흐르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모두를 넉넉히 감싸 안지요. 
진정한 당신이 무엇인지 욕망에 영혼이 황폐해지지 않게 
사랑을 나누면서 찾아보세요. 온화하고 환한 미소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병신 중에 상병신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노릇 제대로 못할 수밖에 없지요…….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찾으셨던 무화과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나오셨는데 시장하셨습니다. 마침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의 때가 아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일상적인 무화과 열매인 테에나가 열리는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화과나무는 3, 4월에 가지에서 새 잎이 나오는데, 이즈음에 지난해의 가지에서 자란 대부분의 푸른 무화과 열매인 파게가 5cm쯤 자라다 떨어지게 됩니다. 

이들은 아직 즙을 갖지 않아 먹기에 부적당하지만 그 시기에는 다른 과일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이것들을 모아서 먹기도 합니다. 특히 농장주들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 파게를 따먹도록 허용하는데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영양보충도 되고 입맛을 돋우는 좋은 열매가 되기도 하기에 좋아하고 농장주로서는 인심도 쓰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무화과열매가 맺는데도 도움이 되기에 좋은 그런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푸른 무화과인 파게였습니다. 한데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다 따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연히 열매가 있어야 함에도 열매도 맺지 못하는 제 구실을 못하는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예수님은 그 나무에서 원하는 열매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그랬더니 그 나무가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바로 전날 예수님께서 타셨던 나귀 새끼와 이 무화과나무가 아주 대조적이라는 것입니다. 벳바게와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일망정 그것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귀 새끼를 내어드립니다. 그래서 그 나귀새끼에 올라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한데 무화과나무는 주님이 열매를 필요로 하셨지만 주님이 필요로 하는 열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나 유월절 시기의 무화과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푸른 무화과인 파게나 다 보잘 것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데 나귀 새끼는 쓰임 받았고 파게는 없었습니다. 결국 나귀 새끼는 주님을 모시는 영광을 얻었지만 무화과나무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큰 의미를 우리들에게 안겨줍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님의 쓰시기에 합당하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갖추어져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쓰시고자 할 때에 즉각적인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재능을 필요로 하실 때 내 재능을 드릴 수 있어야 됩니다. 

주님이 나의 수고를 필요로 하실 때 수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시간을 쓰시고자 하실 때 기꺼이 내 시간을 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지닌 재물을 쓰시고자 하실 때 기꺼이 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필요를 위해서는 조금도 망설이지를 않습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라도 씁니다. 그런데 주님의 필요를 위해서는 어떠한가요? 한 부자에게 주신 말씀처럼 내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고 하신다면 기꺼이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필요에 우리가 응하지 않을 때 그때 나는 버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문제라면 당연히 주님께 드릴 파게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오르내리는 순례자가 좀 많습니까? 그러니 파게가 남아날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항상 주님의 필요를 따라 섬길 준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주님이 쓰시고자 해도 기쁨으로 “예”라고 대답하며 섬길 수 있는 준비가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나는 못해요 아직은 안 돼요. 이건 안 돼요. 

나는 없어요”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 가운데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다섯 처녀들에겐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미 문을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섬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순종할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섬길 수 있도록 미리 저축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삼년마다 또 다른 십일조를 해서 그것으로 고아나 과부, 나그네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힘을 쏟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미문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했던 것처럼 내게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줌으로 가장 중요한 생명을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전해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님을 전할 수 있도록 말씀과 기도로 또한 준비하여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내게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의 무엇을 필요로 하시는가 깊이 기도하시면서 항상 주님의 필요를 따라 섬길 준비를 갖추시어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의 말의 능력에 대해서입니다. 
다음날 아침 나무 앞을 지나가면서 보니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랐습니다. 그래서 이를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어찌 보면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터무니없는 말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을 주실 때 짐승들처럼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 대화를 위한 수단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도록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한 부르짖음이 아닌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나의 생각을 나의 바람을 주님께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이런 저런 말씀을 주십니다. 

“오냐 알았다 내 그렇게 해주마” 하시기도 하고 “그건 조금 곤란하니 다른 것으로 바꾸어주면 어떻겠니?” 하시기도 하고 “그건 조금 더 기다려야겠다” 하시기도 합니다. 직접 내 귀에 들리듯이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마음의 소리로 감동하시기도 합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또는 이웃의 말을 통해서나 어떤 환경의 변화를 통해서 깨우쳐 주시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의 말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한 수단이고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 더해주셔서 방언이라는 더 좋은 수단을 우리에게 주시기도 하십니다. 

다음으로 말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랬기에 우리의 말에 창조의 능력이 깃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 우리가 흔히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축복의 말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이 맺어질 것입니다. 은혜의 말을 사용하면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격려의 말을 하면 격려 받게 될 것이요 위로의 말을 하면 위로받게 될 것입니다. 칭찬의 말을 하면 칭찬받게 될 것이요 감사와 찬양을 하면 더욱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으로 갖춰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감사야 말로 주의 궁정에 들어가는 열쇠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다른 것을 다 잃었다고 해도 아직 내가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쓰신 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 도중 한 흑인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조니. 우리는 지금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해 얘기하고 있어요. 조니는 누구인가요? 말해 보세요.”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조니는 인종 차별로 인해 학생들 사이에서 멸시와 따돌림을 받던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학생들이 호기심과 조롱이 가득한 눈빛으로 조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에 조니의 얼굴은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조니, 일어서서 말해 봐요, 조니는 누구지요?”
선생님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때 조니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그녀의 검은 얼굴은 환하게 빛나 보였습니다.
“예, 선생님. 제 이름은 조니이고, 아시다시피 저는 흑인입니다. 언제나 저는 거울을 볼 때마다 ‘조니, 너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야, 아주 멋있는 사람이라구’라고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삶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만 뒤지면 자신을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돈이 많지 않으면 가난뱅이라고 부끄러워합니다. 사업에서 실패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여기고, 남들보다 외모가 뛰어나지 못하면 못생겼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이런 평가를 내리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사람들 혹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들이 만들어낸 올무에 걸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속임수 중 하나이지요.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무능력하며 못난 사람으로, 혹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엄청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당신을 향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 9)
그렇습니다. 사실 당신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놀랍게도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영광과 승리, 부와 능력의 주이신 만왕의 왕 하나님의 자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제부터 거울을 보며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외치십시오.
“너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이라구!”

민수기 6장에 구약의 제사장의 축복이 나와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이 제사장의 축복으로 매주일 축복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귀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왕 같은 제사장이기에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대로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을 축복하고 가정의 아내와 남편을 부모와 자식을 축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소속된 직장이나 경영하는 기업을 축복하고 내 기업에 드나드는 모든 고객들을 축복하고 또 내가 드나드는 모든 상점들을 축복하고 직장의 상사나 부하 직원들을 축복하며 학교의 선생과 친구들을 축복하며 이웃들을 축복하는 겁니다. 거기다 빼놓지 말고 나 자신도 그렇게 축복해야 되겠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반드시 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약속을 해 놓고도 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세상없어도 약속을 지키십니다.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드렸다면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할 것이 무엇이 있겠고 탄식하고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기쁨으로 섬기던 수넴 여인이 있습니다. 그 섬김에 고마워 엘리사 선지자가 저를 축복함으로 여인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가면서 남편에게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엘리사의 물음에 역시 평안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실정을 엘리사에게 털어 놓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 그 아이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 고백처럼 평안하게 만들어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간구와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한 보게 됩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아는 악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입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말을 흉기로 사용하지 마시고 축복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힘들거든 그분께 말씀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이루지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하는 이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이 오늘 저와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장사할 때는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매주일 교회에 가는 것만큼은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을 바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체면 유지 정도로만 조정해도 된다고 해 주십시오.
주님이 짊어져라 하시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짐꾼이라도 사서 대신 지게 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지금 당장 하라고는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주님이 봉사하라고 하시는 대로 봉사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봉사는 다른 이가 해도 될까요?

혹시 이런 기도를 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말한 대로 기도한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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