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 (출 8:25~31)

  • 잡초 잡초
  • 281
  • 0

첨부 1


이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  (출 8:25~31)
  

설날입니다. 신정에 새해 인사를 나누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새해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에게 다시 한 번 새해의 마음을 다짐하면서 서로에게 축복의 인사를 나누십시다. ‘새해 건강하십시오. 복을 많이 누리시고 나누세요.’ 설이나 추석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 문제로 고민하는 가정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아버지의 제사를 놓고 기독교신자인 며느리와 비신자인 시어머니가 맞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기독교 신자인 장남과 비신자인 차남이 제사를 모시는 일로 인해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 인식이 되어 지면 기독교인들은 부모도 몰라보고 조상도 몰라보는 불효막심한 사람들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교에서 제사 제도를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상적인 측면입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仁’입니다. ‘仁’이라는 글자는 사람(人)과 둘(二)이 합쳐진 글자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삶이 어진 삶입니다. 남을 나처럼 사랑하는 삶입니다. 공자는 그와 같은 어진 삶을 강조하면서 어진 삶을 사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바로 서로에게 예의 바른 행동입니다. 

그래서 유교에서 ‘예(禮)’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진 삶을 살려면 예의 바른 삶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 예의 바른 삶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다른 사람에게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과 형제들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효(孝)는 仁을 행하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의 부모가 되는 임금을 향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이것이 ‘제사’라는 형식을 빌려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사를 드리는 이유의 전부라면 제사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 안에는 또 다른 종교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가정은 돌아가신 조상들의 4대째까지 제사를 드립니다.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입니다. 그리고 5대째 이상 되는 조상들은 일 년에 한번 몰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합니다. 유교에서는 혼백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기(氣) 부분입니다. 이 기(氣)는 하늘의 요소인 혼(魂)과 땅의 요소인 백(魄)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혼백’, 즉 ‘기’가 바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데는 오린 기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제사는 혼백이 흩어질 때까지 그의 자손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이것이 유교 안에 있는 제사의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 무속 신앙이 가지고 있는 기복신앙이 더해져서 복잡한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사가 가지고 있는 정신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정신과 뜻을 기억하며 그 분들을 추모하는 ‘효’의 의미만이라면 기독교가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기독교가 제사를 반대하는 이유는 제사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0장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절하며 경배해야 할 대상은 온 천하는 만드신 하나님 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물이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말씀하시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섬기는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제사를 드리고자 할 때 바로가 반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로를 꺾으시기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배경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명령에 따라 애굽에서 사흘 길을 광야로 나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바로에게 고했을 때 바로가 모세에게 제안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타협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흘 길을 광야로 나가라고 하신 것은 바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이 있는 거리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그곳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가 타협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25절의 말씀입니다.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이 땅은 애굽 땅입니다. 애굽은 온갖 우상들이 섬겨지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우상이 섬겨지는 땅에서 사흘 길을 떠나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곳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바로는 그렇게 번거롭게 하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너희가 믿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면 어느 곳에서 제사를 드리던지 받으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구별하지 않고 편리주의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예배하는 우리를 유혹하는 첫 번째입니다. 예배의 정체성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너무 멀리 가지 마라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만 그렇게까지 힘들게 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만 하면 되지 그렇게 열정적이고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냐는 말입니다. 순종을 해도 어느 정도 흉내만 내면 되지 그렇게까지 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대충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사단은 우리들이 자신을 완전히 떠나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양다리를 걸치고 믿음의 명분은 유지하면서 편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단을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적당히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두고 가서 제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10장에 나옵니다. 10장 10-11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게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모세는 바로의 제안을 끝까지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광야로 사흘 길을 나가 하나님께 제사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바로가 제안하는 것은 아이들은 애굽에 남겨 두고 어른들만 가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까지 고생시킬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 모두에게 편하고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애굽에 두고 가면 그들이 결국 아이들 때문에 애굽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자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약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단은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어느 부분을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로 인해 신앙의 길에서 멀어지고 자녀들의 성공이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조차도 멀리하는 부모들의 약점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점을 이용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아닌 타협을 주문합니다. 

모세가 단호하게 거절하지 바로가 마지막으로 꺼내 든 카드는 물질입니다. 10장 24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재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가족보다 자녀보다 재물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보면 재물 때문에 부모를, 자녀를, 남편과 아내를 멀리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가족과 사람의 행복을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잘못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다른 면에서 본다면 제사는 드리되 제물을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되 헌신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헌신이 없는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참된 예배, 참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헌신이 전제 된 것입니다. 바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못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희석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명절만 되면 제사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는 가정들이 있는 줄 압니다. 기독교는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십계명 가운데 인간을 향한 계명 중에 첫 번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효는 무분별하고 영적으로 혼탁한 그런 기복사상에서 부모를 공경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가 멸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하나님의 정신에 따라 부모를 공경함으로 진정한 축복된 가정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마음으로 영적인 일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신앙관을 가지고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의 정신을 가정에 심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사로 인해 충돌을 일으키지 마십시요. 도리어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만 지혜를 모아 다른 식구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십시오. 예를 들어 제사를 드리기 전에 보모님의 생전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 분들의 사랑이 담긴 영상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먼저 보여 주시며 그 분들의 정신과 사랑을 기억하자고 말하십시오. 

평상시에 가족들과 대립되기 보다는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서며 사랑을 베풀고 이해를 구하며 그들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제사 때가 되면 조금이라도 먼저 내려가 음식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 보다 비용도 더 적극적으로 부담하면서 후덕한 모습을 보이십시오. 그러면서 그들에게 참 기독교의 추모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삶으로 전하십시오. 잘못된 반응은 적대 관계를 만들지만 지혜로운 방법은 도리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제사로 고민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는 줄 아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로 제사 제도를 하나님의 정신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세상의 가치와 타협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려지는 순결한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거룩한 예배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