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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자가 져야 할 짐 (창 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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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가 져야 할 짐 (창 14:11~16)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설 명절의 기쁨이 여러분과 가족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등산하는 사람이 왜 산에 올라갈까요?
정답은 ‘내려오려고!’랍니다. 올라가는 사람은 내려오기 위하여 올라갑니다. 내려오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내려올 것을 왜 산에 올라가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왜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정답은 ‘집에 가려고!’입니다. 예배당에 오셨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분은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집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 갈 것을 그냥 집에 계시지 왜 예배당에 오셨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예배드리려고!’입니다. 그러면 그냥 집에 있는 사람과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는 사람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

산을 오르는 사람은 내려오기 위하여 오릅니다. 내려갈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르는 이유는 오름으로써 얻는 유익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산 위에서 보는 세상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집으로 다시 돌아 갈 것을 예배당에 왔다 가는 사람과 그냥 집에 있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최초로 주신 명령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 12:1a)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고향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물고 있던 하란을 떠났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친척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조카 롯을 떠나보내었습니다. 친척도, 고향도 떠내 보내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중에 아브람의 이 이야기가 너무 너무 은혜가 되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 이거야! 세상에서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아내도 다 떠나야 할 것이야!’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니면 명절을 맞을 때마다 그것을 꿈구는 분이 계십니까?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5-37)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팍! 팍!’ 와 닿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믿지 않는 가족이 마귀로 보이고, 속 썩이는 남편이나 아내가 ‘웬-수’로 여겨지고, 자식이 다 소용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아브람과 롯의 관계는 조카 롯을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세계는 엘람이라는 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지역의 극심한 가뭄으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엘람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엘람의 왕이 그와 연합한 세 왕과 더불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섯 왕을 응징하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 전쟁은 아브람과 직접 관계가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살고 있던 지역이 엘람의 관할 밖이었는지, 아니면 그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인지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세계 전쟁은 아브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표면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였습니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엘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든, 소돔과 고모라 왕이 잡혀가든 아브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아브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참여하여야 했습니다.

I. 책임

11절 말씀과 12절 말씀입니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아브람은 그의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아브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아브람이 떠나보내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떠나가게 하셨지 않습니까! 아브람과 롯은 더 이상 함께 살수 없게 되어 자연스럽게 갈라섰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셨는데 안 떠나니 물질의 갈등을 통하여 롯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조카의 일에 참여를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은 아브람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왜 그렇게 하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떠나보낸 그 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브람이 조카 롯의 일에 다시 개입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롯을 돌봐야 했습니다.
    
1. 가족을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내용의 말씀이 복음서에 두 종류가 나옵니다. 한 종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마 16:21-24).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가 있듯이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져야할 십자가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또 한 종류는 자기를 부인함 없이 져야할 십자가입니다(마 10:35-38). 예수님은 가족이 불화 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믿는 신앙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아들이나 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예수님께 합당치 않지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자기 십자가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버려두어서도 안 되는 각 사람의 십자가입니다. 아브람이 조카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떠나보낸 조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져야 할 십자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부인하고 져야 할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또 하나는 부인할 수 없는 가족의 십자가입니다. 가족은 피할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가족을 사랑할 것이냐 하는 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어떻게 가족을 사랑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사람으로 어떻게 부모님께 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 최선을 다하여 가족을 돌보며 사랑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사로잡혀간 롯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브람에게 마음이 있다고 해도 능력이 없으면 롯을 돕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돕기 위해서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합니까?

II. 능력

13절 말씀입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롯이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이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아브람은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힘 있는 나그네였습니다. 그에게는 그와 동맹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아브람의 동맹군이었습니다. 마므레의 형제들인 에스골과 아넬도 아브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브람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1-1. 동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그와 동맹관계에 있던 마므레의 가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어간 가족을 돕기 위해서는 그를 돕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힘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와 동맹 관계를 맺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3:16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3:16에서는 그 사랑의 힘으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동맹 그 이상의 관계를 맺으신 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2. 사랑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겨우 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감격하지 못하게 함으로 서로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신 부모님의 그 사랑을 기억한다면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부모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안다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율법이 아니라 은혜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물 붓듯이 부어지기를 사모하고 고대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또 다른 율법이 아니고 은혜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하여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시고 감격하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아브람은 어떤 힘이 있어서 롯을 도울 수 있었습니까?

14절 말씀입니다.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여기서 ‘집에서 길리고’라는 말은 돈을 주고 사온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브람의 가정에 소속된 사람들(12:5)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훈련된 자’는 직역하면 ‘훈련시킨 자’, ‘무장시킨 자’입니다. 당시는 공적인 치안 조직과 제도가 갖춰져 있지 않던 고대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구책이 필요하였습니다. 특히 유목민들은 가축들을 돌보고 도적과 맹수의 위협을 이겨내기 위해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필요하였습니다.
    
2-1. 훈련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훈련된 사람이 ‘삼백 십팔’ 명이 있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아브람에게 딸린 식솔은 최소한 천여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부모와 여자 형제들의 수를 어림하여 318에 4를 곱하여도 1,272명이란 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한 가정의 가장이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을 거느린 족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풍성케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를 심히 풍성하게 하셨는지(창13:2) 그리고 그가 풍성한 것으로 무엇을 준비하였는지 알게 됩니다. 그는 준비된 힘으로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4: 7 말씀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우리들에게도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사람들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이 시대는 가병을 길러야 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더욱이 사병을 만들어야 살 수 있는 사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도덕적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가꾸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2. 사랑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랑하고 말리라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결심이 있지만 쉽게 사그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은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훈련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경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어떤 경우에도 사랑의 태도를 가지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아브람에게는 어떤 힘이 있어서 롯을 도울 수 있었습니까?
15절 말씀입니다.
:15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에게 동맹을 맺은 마므레가 있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시킨 318명이 있다고 해도 상대는 그 세계를 다스리고 있던 엘람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나누어 밤에 기습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싸움을 위하여 전략을 사용하였습니다.
    
3-1. 전략적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급한 마음에 엘람의 군대를 정면 공격하였다면 승리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승리에 취하여 있던 엘람의 군대를 밤에 기습 공격하였기에 승리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힘을 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힘이 있다고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힘을 사용하는 데는 전략이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힘을 가장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 7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에는 믿음도 있고, 열정도 있는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닦아야 하는 것이 사랑의 기술입니다.
    
3-2. 사랑의 기술을 가져야 합니다.
    
바다 속에 조개 하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조개는 이웃에 사는 조개를 만나 하소연을 했습니다.
“내 몸 속에 아주 귀찮은 것이 있어. 무겁고 둥글게 생겼는데 아주 귀찮고 불편해.”
    
그러자 이웃에 사는 조개는 아주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아주 건강해. 내 몸속에는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 없지. 나는 정말 건강해.”
“좋겠다. 난 정말 이 둥글고 무거운 것 때문에 살 수가 없어.”
    
그 때 게 한 마리가 지나가다 조개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다고 자랑하는 조개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건강하지? 물론 그럴 거야. 하지만 네 이웃이 참아내고 있는 그 고통스런 것은 정말 귀중한 진주란다.”
    
조개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몸속에 있는 귀찮고 불편한 것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조개가 간직하고 있는 고통은 바로 진주입니다
아름답고 소중한 진주를 간직하려면 그만큼의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삽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고통을 주곤 합니다. 사랑과 행복은 고통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보석을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보물이란 고통스럽지만 함께 해야 할 바로 그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기술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딤으로 탁월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한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삼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배드리는 일은 우리가 아브람에게서 분명하게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삶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도울 힘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가족을 도왔습니다. 그의 우선권은 하나님께 있었지만 친족을 돌아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버거운 짐을 벗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더러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소용돌이가 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것은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로 작은 행동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냥 집에 있는 사람과 예배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물론 쉽게 사랑하지 못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께 나와 그 능력을 힘입고 마침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사랑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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