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께서 보내시며2 (눅 10:4~9, 롬 9:1~3)

  • 잡초 잡초
  • 245
  • 0

첨부 1


주께서 보내시며2 (눅 10:4~9, 롬 9:1~3)


설 명절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고향, 부모님, 친지, 이웃을 찾아 나선 성도님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복음전도자가 가져야 할 주님께서 명하신 마음이 무엇인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서 9, 1-3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마음이, 분단된 우리나라와 북한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제 북한을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지평도 넓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자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이 분명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애정, 열정을 단 한 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롬 9장, 10장, 11장). 

그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는 말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한다”는 표현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는 말과 같은 맥락의 말입니다. 

바울에게 항상 떠나지 않는 ‘큰 근심’의 마음, ‘큰 고통’의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兄弟 곧 骨肉의 親戚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아픔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롬 9, 3).

물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아픔도 감수하겠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도,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랐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모세의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합니다(출 32, 32). 

모세의 이 기도 역시, 정말 자기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려달라는 기도가 아니지요. 자기 백성이 받을 심판을 고통스러워하는 지도자의 아픈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겠다’(아나데마, ana,qema)는 것 역시, 사실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마음이 담긴 소원입니다. 

지금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운행 중인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기어 2단에서 3단으로 변속된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자동차가 가장 안전한 단계가 언제입니까? 변속기어 1, 2, 3, 4단이 있는 자동차라면, 1단기어로(저속) 운행할 때 가장 안전합니다. 2, 3, 4단으로 올라갈수록,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만큼 위험지수가 높아집니다. 고속으로 달릴수록, 위험합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당시, 아시는 대로 남북관계는 상당히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북한은 외부요인보다는 북한의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 남북관계의 안전지수가 기어 2단에서 3단으로 올라간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우리 정부 안에는 자주파, 동맹파 이분법적으로 갈라진 채, 남북문제, 미국과의 관계문제를 풀려는 견해들이 있었습니다. 남북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보는 시각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김정일 정권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권󰡕이라는 데, 가장 큰 위기요인이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일인데, 최근 계획경제를 하기 위해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가 실패하지 않았습니까?(장마다시장경제봉쇄, 장마다시장+A정보유통, 고위관리들과 결탁부패) 결국, 화폐개혁 책임자를 전격 경질시켰습니다. 화폐개혁과 관련해서, 북한의 김영일 내각총리가 우리나라로 치면 군수급 관리들을 불러 모아서, 공식적으로 화폐개혁이후, 물가폭등과 인민 생활의 혼란에 대해 사과했습니다(사과? 절대독재 권력체제 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일).

그만큼 북한 내부사정이 심각하다는 이야깁니다. 북한의 부패상이 얼마나 심한 지, 잘 알려진 바입니다. 탈북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은, “압록강을 건널 때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물으면, “아니요, 군인 아저씨가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고 합니다(돈만 주면, 군인이 길 안내까지 해줍니다). 권력누수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정일 건강문제가 발생한 이후, 급속도로 후계자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의학적으로 5년 이내, 10년 안에 재발).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은 나이 30도 안 된 아들입니다. 후계자가 승계된다 하여도, 후계승계 이후의 북한권력구조문제는 더욱 위험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북한의 상황은, 자동차 2단 기어에서 3단 기어로의 진입을 의미합니다. 

북한 핵 문제도 그렇습니다. 미국은 이미, 북핵문제를 美北양자대화로는 풀 수 없다는 것을 ‘클린턴 정부’를 거치면서 학습했기 때문에, 오바마 정부도 6자회담의 틀 안에서만 풀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북핵 문제와 관련한 6자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주변국 상황도 남북관계의 점증되는 위기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구소련이 무너진 이후 미국중심의 패권이, 2008년에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리더십은 빠른 속도로 약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미국에 대하여 8000억불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빌려준 중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미국은,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으로, 國家도 國民도 끊임없는 과소비를 지향했습니다. 세계 곳곳의 전쟁에 개입했고, 월가를 중심으로 한 금융상품으로 돈놀이를 하고, 국민들은 CD를 막 긁어대며 살다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서구 역사가 말하는 교훈을 보면, 어느 나라든 경제력과 군사력이 피크에 달해 최고의 국가가 되면, 과소비현상이 일어났습니다(국가, 국민). 국가발전 초기 단계에서는 물건을 잘 만들어서 수입을 올리지만, 경제력 군사력이 피크에 오르면 돈놀이, 과소비 하다가, 무너졌습니다(미국, 영국).

지금 미국이 그 형편입니다. 그에 비하면 중국은 안 먹고, 안 쓰면서 모은 돈으로, 미국에 영향력 있는 채권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미국에 무조건 Yes, Yes하지 않습니다. No, No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주류는 G7, G8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G20가 세계의 중심축 역할을 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미국과 중국과의 점증 되는 갈등 관계가 남북문제에도 결코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머잖은 미리에(5, 10년 내)에 북한이 급변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무슨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북한과 우리가 직면해 있는 오늘의 상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북한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풀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사실, 다급하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6․25 전쟁세대들은 아직도 이념의 굴레에 붙잡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습니다(북한 인권문제 무관심). 통일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우리의 통일의 문제는, 정치문제, 국가대 국가문제 이전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회복의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터민(탈북자)들은 하나님께서 통일시대를 대비하여 우리에게 예방백신으로 주신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새터민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 

예수님께서 복음전도자들을 보내시면서 당부하신, 세 번째 자세는, 武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 4절에 보면 “전대(돈주머니)나 배낭이나(생필품주머니)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우선순위를 혼동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문자적으로 언뜻 보면 복음전도자가, 아무 것도 소유하면 안된다는 무소유, 가난한 빈자의 모습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여행자 수칙을 이해할 때, 그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지팡이는, 길 가면서 짚는 지팡이만이 아닙니다. 강도나 야수를 대적하는 ‘가난한 자들의 무기’입니다. 

전쟁하는 군인들에게 신발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팡이와 신발의 포기요구는, 무장해제를 명하시는 말씀입니다. 비폭력을 명하신 말씀입니다. 절대적인 평화태세를 誇示하라(일부러 드러내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북한 조문단이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당연히, 우리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면담만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 북한 조문단이 다녀간 이후, 한 가지 변한 것이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방송이나,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가 절대로 북한을 공격하지 않고, 북한 진정으로 도와주려 한다는 진정성을 보고 갔습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복음 전하려고 할 때, 그렇습니다. 영적전쟁을 한다는 빌미로, 싸우면 안 됩니다. 공격하면 안 됩니다. 무방비 상태로, 무장해제하고, 평화를 빌면서, 사도 바울의 심정을 빌면, 도리어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내가 저주까지도 받겠다는 그 심정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자기 자존심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도리어 상대방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로 서야합니다. 네 번째 전도자의 수칙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5절). 우리의 말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선포하라는 겁니다.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命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있지 않습니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주님,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복음 전도자의 자세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전도자는 “영접하는 그 집에 들어가서 유하며 그 집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일꾼이 든든한 세 끼 밥 대접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음식 솜씨 좋은 사람 찾아서,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눅 10, 8). 

복음 전하는 자와 복음을 받는 자에게, 상호 교제, 아름다운 상호 섬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진 자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상호 섬김, 상호 교제 안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흔히 一方的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상방통행입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主導權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罪人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이(아내와) 동산 나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아담에게 찾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고,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구원을 마치 등산객이 산 정상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합니다(불교길, 힌두교길, 이슬람길, 샤머니즘길). 길은 다양하지만, 어느 길로 가든지 결국 정상에서 만난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아래로부터의 구원이 아닙니다.

복음전파와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북한에 손 내밀어야 합니다(지금 다급합니다). 그러면, 북한도 거부하지 말고 화답하는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투자가 아니라, 원칙 있는 포용정책이 필요합니다. 북한 정권에만 도움을 주는 정책이 되지 않아야 하고, 북한정권을 변화시키고 주민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을 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북한도 기꺼이 화답해야, 남북관계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아픈 마음과 고통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만 예수 잘 믿고 복 받는 것,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북한은, 동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습니다. 타민족, 타문화권 수준의 먼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래 우리 동족입니다.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평양최초의 교회(널다리교회, 후에 장대현교회)자리는 지금 우상숭배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북녘 땅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새터민들의 외로운 설을 잊지 마십시다. 새터민들이, 통일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자비하신 하나님, 반 토막 난 이 나라, 이 백성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해방 후 남한교회는 월남한 북한교회 성도들에게 빚 진 교회입니다. 이제 저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살리고, 복음의 빚 갚은 우리나라, 한국교회 되게 하옵소서.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