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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창 3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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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창 32:21~32)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삶의 모습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듯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중심의 삶’보다는 ‘나 중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묻기 보다는 ‘내 생각’이 앞섭니다.
매일 생활에서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것 보다는 ‘자기 우선주의’로 살아갑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삶이 그렇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외삼촌이요, 장인인 라반의 집에서 머슴을 살았습니다.
고생 끝에 그 나름대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네 명의 아내와 더불어 열한 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내 뼈는 내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내 아버지 이삭이 묻힌 고향땅에 묻어야하지 않겠는가?” 
고향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그런데 걱정이 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는 일입니다. 
‘형님을 어떻게 만날꼬!’ 
세월은 유수처럼 빠르게 흘러 20년이 지났건만, 지난 날 어머니와 짜고서 형의 장자권을 가로 챈 일이 여전히 마음에 캥깁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형 에서는 그 일 이후 20년을 하루 같이 동생을 향하여 칼을 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군사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것은 동생을 용서하며 받아들이겠다는 의지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 앞에 그는 그야말로 두렵고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창32:7)

이런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으면서도 야곱은 하나님보다 자기 꾀를 의지 합니다.
자기 재물을 3분대로 나누어 앞세우고 그것을 이끄는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누군가 이게 뭐냐고 묻거든, 에서 형님께 드리는 야곱의 선물이라고 하라.”
본문 20절에 보면,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야곱 생각에)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여기 보십시오. 
“이는 야곱 생각에” 
자기 생각이 꼭 앞서지 않아요?
야곱은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시길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봉변을 당해도 좋습니다. 저의 한 가지 소원은 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나님을 높인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저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 됩니다. 하나님 아시잖아요?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오니 하나님이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자기 판단을 근거로 계략을 세웁니다.
그 계략은, 어느 분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아’하게 나가자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우라지게 아첨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우라지게 아첨하는데 넘어가지 않은 사람 봤느냐? 우아하게 나가자!”
그날 밤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걱정은 많으나 기도가 없었던 그 날 밤, 자기의 계산은 있었으나 하나님의 계산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그 날 밤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한 마디로 ‘신통하면 인통하고 물통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관계의 문제, 물질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직장문제 입니까? 물질문제 입니까? 질병문제 입니까? 아니면 인간관계문제입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들보다 먼저 나와의 문제를 풀어라. 초점을 나에게 맞추어라. 나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것은 없는지 살펴보라. 그러면 다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되면 ‘에서의 문제’, 즉 표면적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괜히 엉뚱한 문제 붙잡고 시간 허비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해서 신통하면 인통이 되고, 물통이 되는지 그 내용을 세 가지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2) ‘야곱이니이다.’
3)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1.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허벅지 관절이란 엉치뼈의 연결 부분으로서 그것이 없으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이쿠‘하면서 나동그라지고 말았습니다.
K.O.패 되고 말았습니다. 
힘이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에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어떤 분이, “하나님이 나를 쳐서라도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때 그 말을 듣던 목사님이, “선생님, 지금 하신 말씀은 취소하세요. 하나님이 치시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하면서 말조심을 시켰답니다. 

하나님이 치시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재산인들 버티겠어요? 건강인들 버티겠어요? 지위인들 버티겠어요?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나의 힘’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다 부서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겠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왜 하나님이 사람을 못 이기겠어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하나님을 보셨나요?
그러면 뭡니까?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져주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너는 이제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기도하면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을 이겼는데 그 누군들, 그 무엇인들 이기지 못하랴?”
지금 야곱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정말 두렵고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상황에 던져져 있습니다.
모든 가솔들을 보내고 외톨이로 얍복강변에 남아있습니다.
혼자 두려움과 답답함에 눌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대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의도적으로 져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주먹보다 작은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희망이 있으면 온 세상이 절망스러워도 희망적인 삶을 살아요.
마음에 담대함이 있으면 온 세상이 두려움에 휩싸여도 담대한 삶을 살아요.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온 세상에 슬픔의 먹구름이 덮쳐도 기쁨의 삶을 살아요.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해요.
마음은 하나님만이 다스립니다.
야곱은 이 기이한 경험을 한 후 담대하게 에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놀라운 삶의 기적을 맛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의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의 가장 큰 은총은 마음의 회복입니다.
예배 중에 영적인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배 중에 심령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배 중에 육신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예배 중에 얽히고설킨 삶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2. ‘야곱이니이다’ 

27절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정말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름의 의미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물으신 것입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질문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그 이름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야곱’이란 이름의 뜻은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이름 그대로 살았습니다.
남이 잘 나가면 뒤에서 붙잡고 잡아당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약탈자입니다.
술수와 거짓이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지금 단순히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놓으며 “오 하나님이여. 내가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이 고백을 하면서 눈을 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그가 무엇을 붙잡았습니까?
무엇을 손 안에 놓으려고 애써왔습니까?
창32:1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새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네 명의 아내를 위시하여 11명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야곱은 그것들을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자신의 손에서, 자신의 품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놓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혈혈단신 혼자 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야곱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야곱은 붙잡는 인생을 살았지만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얍복강변에서 인생은 붙잡는다고 붙잡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나이 97살이 되어서야 그 진리를 깨닫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P. Yance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란 상처와 흠집의 갈라진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같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는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고백에는 “나는 약점 투성입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가장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상처와 흠집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노출시킬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복음성가 -빛이 없어도

3.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28절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
성경에서는 그 의미를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폰 라드’라는 구약학자는 ‘이스라엘이란 의미는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사업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다스립니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며, 넉 다운이 되어, 땅바닥에 나뒹구는 순간에 야곱에게 찾아온 놀라운 깨달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매달려야지! 
야곱은 호소합니다. “도와주세요. 이제는 당신 밖에는 없습니다.”
이 매달림으로부터 삶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자기의 육신적인 것을 의지하고 큰소리칠 때가 아니라, 자기의 한계 상황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자랑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고, 하나님만이 나의 백(back ground) 입니다.”라고 할 때 승리는 시작됩니다.
시편의 수많은 찬양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잠언의 그 깊은 지혜가 바로 이 내용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여행자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가파른 벼랑 아래로 굴렀습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거기 누가 위에 없습니까? 날 좀 구해주세요!”
그런데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라.”
“오! 하나님 나를 구해 주세요. 힘이 빠져가고 있습니다.”
“좋다! 그러면 네가 붙들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그는 한참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거기 위에 하나님 말고 누구 없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믿음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 내가 의지했던 것 놓고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미더워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묻습니다.
“너는 신앙인이라 하면서 하나님을 붙잡고 있느냐 아니면 아직도 세상의 것을 붙잡고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말고 다른 것 달라고 소리치고 있지 않느냐?”

나가는 말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야곱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자 눈앞에 닥쳤던 문제, ‘에서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야말로 봄 동산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형 에서의 문제는 기나긴 세월동안 풀지 못한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그냥 풀려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십니까?
은혜 받으면 해결됩니다.
문제 자체에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만나십시오.
그렇게 하여 얍복강의 밤을 지나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두려움의 밤을 지나 소망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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