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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요 7: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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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요 7:37~44) 


1. 설날과 초막절

즐거운 설날입니다. 이번 설날이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고향에서, 혹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잠시 쉬었다 가는 시간, 재충전과 회복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날 덕담을 서로 나누겠습니다.

새해엔 기분 좋은 일만 있으십시오. 
올 일 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설날을 명절로 지켜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 중국의 歷史書인 『수서』와 『구당서』의 ‘신라’ 관련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매년 正月 元旦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설을 지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설이 전 국민적인 명절이 된 것은 고려 때부터이고, 조상제사가 중시되는 등 유교적인 歲時風俗이 그 중심이 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입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설날은 그 이름과 함께 독특한 歲時風俗을 가지고 있는데요. 설날 세시풍속은 그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설’이라는 이름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➀ “설”의 첫 번째 의미는 ‘낯설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설날은 ‘낯선 날’,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날’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➁ 두 번째는 “설날”이 원래 ‘선날’에서 왔다고 보는 것인데요. “선날”이란 ‘시작하는 날’, ‘開始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설날은 ‘새해를 시작하는 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➂ 마지막으로 설은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의 옛말인 ‘섧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설날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일이란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으로, 새로운 시간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을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설날이 이러한 의미를 가지다 보니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설날에 ‘삼가하고 조심해야 할 것들’을 정해두었습니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설날에 “삼가하고 조심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설날에는 바느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설날에 바느질을 하면 ‘생인손을 앓거나’, ‘손에 가시가 들어가거나’, ‘곡식 뿌리가 삭는다’고 합니다. 또 설날에 문종이를 바르면 안 되는 데, ‘재수 구멍, 돈 구멍(여수 구멍)을 막아서 복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늦잠 자지 않기(제주도)’, ‘물동이 지지 않기(제주도)’, ‘방망이 소리 내지 않기(제주도)’, ‘비질하지 않기(제주도)’, ‘물이나 쓰레기 버리지 않기(경기 이천, 전북 익산)’, ‘빨래하지 않기(전남 목포)’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설날이 해서는 안 되는 것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즐거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설날의 즐거운 세시풍속으로는 설빔으로 새 옷을 입는 것, 어른들에게 세배하기, 덕담나누기, 복조리 걸기, 윷놀이, 널뛰기 등 그 종류는 아주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에 따라 개인에 따라, 설날에 반드시 하는 세시풍속도 있지요? 저의 경우, 설날은 목욕하는 날입니다. 어릴 시절, 여름에는 하루 종일 바닷가에서 살기 때문에 늘 씻으면서 삽니다만, 여름만 지나면 몸을 씻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가 설이 다가오면 장작불로 물을 데운 공동 목욕탕에서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이 목욕을 했습니다. 그때가 여름 바닷가에서 놀던 때 외에 몸을 씻는 거의 유일한 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겨울이면 손이 터서 쩍쩍 갈라진 여름 논 같이 되고, 그 때를 벗기기 위해 개울가의 돌을 주워서 그것으로 때를 밀면 때보다 피가 먼저 났었지요. 그러다가 부산으로 이사를 해서 어머니를 따라 처음으로 목욕탕에 간 것도 설 전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 설날은 제게 ‘목욕하는 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번 설날을 앞두고 다들 목욕을 깨끗이 하셨습니까? 묵은 때를 밀고 새 옷을 입으셨는지요?

이렇게 제게 “설날”하면 떠오르는 것이 “목욕”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설날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설날하면 ‘交通滯症, 지옥 같은 도로를 뚫고 고향 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올해 설날은 주일을 낀 3일이라는 짧은 연휴에다가 눈과 비로 인해 더 심해진 交通滯症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고향으로 가려고 할까요? 

어느 학자는 그것을 “한국인의 독특한 정체성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고 가족을 찾음으로서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확인하고, 그것이 마음의 불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복합적인 문제를 극복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고향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즉 고향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뵙고 가족들을 만남으로서 흐트러진 생각과 삶을 가다듬고, 남은 날을 정신 차리고 살자는 결심을 하게 되기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고향을 찾는다는 것이죠. 

명절 때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모습은 사실 우리 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바로 성경에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3대 명절은 유월절,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묶여 있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명절입니다. 칠칠절은 여름 보리 수확을 감사하기 위해서 지킨 명절이고요. 초막절은 모든 곡식과 과일 수확을 끝내고 지킨 것으로 우리의 추수감사절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년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세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➁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라’는 의미로서, 메시아가 오셔야 만 진정한 명절과 참된 축제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➂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이 된 우리에게도 이러한 절기를 지키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이미 오셔서 몸을 찢기시고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학자들과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당시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형편 상 매년 세 차례의 명절을 지키지 못했고, 일 년에 한 번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향했다고 하는데요. 바로 그 한 번의 명절이 초막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초막절만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예루살렘으로 대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명절은 초막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설날인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도 초막절에 일어난 일과 거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초막절, 이스라엘의 큰 명절

1) 초막절

초막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레위기 23장 39절 이하에 나옵니다. “너희가 土地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 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 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 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23:39~43).” 

① 초막절은 지난 한 해 동안, 씨 뿌리고 열심히 가꾸어 거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②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었습니다. 애굽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민족과 국가를 이루어 출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지요.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매년, 예루살렘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든지,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든지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이 명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➂ 그리고 초막절은 이름 그대로 초막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절기였습니다. 초막절 8일 간의 연휴 기간에 그들은 감람나무, 돌 감람나무, 화석류나무, 종려나무 등의 나무 가지를 취하여, 지붕 위, 성전 뜰, 수문 앞 광장, 그리고 에브라임 광장 등에 작은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8일 동안 지내면서, 조상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과 그들이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되새겼습니다.

민수기 29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초막절을 어떻게 지켰는지가 구체적으로, 그리고 그 매일 매일의 행사법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초막에 寄居하면서, 낮에는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의 제사를 드리고, 밤이면 축제를 벌였습니다. 네 개의 커다란 “일곱 가지 촛대”가 聖殿 全域을 밝히는 가운데 벌어진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추었으며, 레위인들은 시편 120편부터 134편에 나오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제 8일은 “거룩한 대회”가 열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초막절 축제 중에서 가장 의미 깊은 것은 매일 아침마다 벌어지는 행사였습니다. 매일 아침 일찍, 사람들은 양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성전 주위를 돌며 행진했습니다. 첫날에는 열 세 바퀴,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돌고 난 다음,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실로암 못의 물을 떠다가 제단에 포도주와 함께 붓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여호와께 감사하라(시118:29)”고 찬송하면서 나뭇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 독특한 의식은 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물이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과, ➁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법으로 생각 밖의 장소인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백성들로 충분하게 마시게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가셨을 때도 이 행사는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2) 명절 끝날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러한 초막절 행사 중에서 맨 마지막 날인 안식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 날, 사람들은 성전 주위를 일곱 번 돌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실로암 연못물을 떠다가 제단에 부었습니다. 그때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고, 백성들은 여호와를 향하여 감사하면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렇게 행사가 진행되던 중, 갑자기 예수님께서 목소리를 높이시면서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37, 38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왜 예수님은 갑자기 이런 행동과 말씀을 하셨을까요? 말씀드렸다시피, 명절 기간 동안 매일,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부음으로서, 과거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왔던 것을 再現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8일 동안 초막절 행사가 진행되면서 모든 의식이 빠짐없이 철저하게 치러졌지만, 거기에 참여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갈증, 영혼의 갈급함, 인생의 허기를 해결할 수 있었느냐, 그것이 안 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나선 것입니다. 매일 제단에 부어지는 실로암 연못물과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 가지고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백성들의 영적인 갈증과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생수가 따로 있기에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행사가 끝나 갈 때 쯤 목소리를 높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근처에 살든지, 가까운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에 살든지, 혹은 세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든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말 오랜 준비와 많은 노력과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 년의 소득 전부를 다 쏟아서 예루살렘으로 왔고 그렇게 명절을 지키고 있는데, 만약 이대로 명절이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자신들이 준비하고 수고하고 희생한 것에 비해 초막절에 참여해서 얻고 돌아가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행사가 끝나면, 또 다시 멀고도 피곤한 길을 돌아가야 합니다. 허전함과 허무함을 가슴에 그대로 품은 채로 말이죠. 형편이 좋으면 내년에 다시 올 수 있겠지만, 형편이 어렵고 멀리 사는 사람들,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예루살렘을 밟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 초막절 행사를 집례하던 제사장들이나 ‘초막절 행사 위원회’가 그들을 만족시켜 주었더라면 주님께서 나설 필요가 없었겠지요. 아무도 그들의 갈증난 영혼과 허기진 인생에 생수를 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날, 마지막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그들은 제각각 살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초막절의 진정한 복과 은혜를 맛보지 못한 채 말이죠. 현실적인 문제도, 영적인 축복도, 미래적인 소망과 약속도, 그 어느 것 하나 얻지 못한 채 빈 지갑과 지칠 대로 지친 육신만 가지고요!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이 빈 마음으로, 지치고 피곤한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랑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런 상태로 그냥 돌려보내시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채 로마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고, 他意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에 그들 역시 또 다른 광야를 걷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역시 광야의 반석에서 생수가 쏟아진 것처럼, 초막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가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명절을 지내러 오신 분들도 있고, 우리 교인들 중 상당수가 명절을 지내러갔습니다. 아마 대부분 진정한 기쁨과 만족 없이 ‘휴, 올해도 자식 노릇 며느리 노릇 딸 노릇 사위 노릇 했구나!’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거나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과 영혼의 목마름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신(37)”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을 위하여, 오늘 여러분들을 위하여!

그러면 아쉬움과 허무로 끝날 명절이 진정한 즐거움과 충만으로 끝나도록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3) 진정한 명절은 주와 성령으로부터

➊ 38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렇게 멀리서 힘들여 왔고, 또 오기 위해서 돈 모으고 적금 부어서 온 그들이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참된 만족, 진정한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흘러나옵니다. 갈증이 없어지고 허기가 없어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오직 예수님께로부터 죄 사함의 기쁨, 죄의식과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와 평안, 그리고 새로운 힘과 소망이 흘러나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고 강 같은 평화가 임합니다. 무기력에서 벗어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힘과 용기와 확신이 생깁니다. 현실을 뛰어넘어 비전과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는 소천하신 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님께서 언젠가 속리산에서 한 달간 머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 목사님은 유명한 道僧 한 분을 만나셨는데요. 그 도승은 15년 동안이나 生食을 하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怪僧이었습니다. 그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신은 오랫동안 도를 닦았으니 萬事를 通達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가면 갈수록 더 답답하고 더 마음이 어두워질 뿐이지 전혀 도를 통하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김 목사님은 ‘이때다’ 싶어서 그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 도승은 주님의 복음을 아주 쉽게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참 만족과 진정한 즐거움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면서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그 어떤 것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많은 사람들이나, 조직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 만족한 인생을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조금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들 목말라 있습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 인정과 칭찬에 목마른 사람, 자유에 목마른 사람, 진리에 목마른 사람, 돈에 목마른 사람, 성공에 목마른 사람, …. 그들은 자신들의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줄 알고 술이나 노름이나 마약 등 여러 쾌락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 그 빈 마음과 영혼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갈증과,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허기와, 삶의 허전함, 그리고 아무리 명절을 지내도 돌아서면 곧바로 허무해지는 그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피로와 갈증과 문제와 아픔을 다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얼음냉수 한 잔 벌컥 벌컥 들이킨 것처럼 시원하고 기분 좋고 새 힘을 얻어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➋ 두 번째로 예수님은 38,39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 속에는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수를 한 번 시원하게 들이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 여러분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강물이 흐를 것입니다. 생수의 강, 은혜의 강, 능력의 강이 흐를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면, 그 심령에는 廢水의 강, 汚水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사랑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異性을 찾아다니는 자의 심령에는 情慾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돈을 찾아다니는 자의 심령에는 貪慾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술을 찾아가는 자의 심령에는 알코올의 강이 흐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가는 자의 심령에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平和가 강물처럼 흐르게 되고, 기쁨과 만족이 강물처럼 흐르고, 지혜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 과거에는 생수의 강이 넘쳐흘렀으나, 지금은 강바닥이 말라 쩍쩍 갈라지거나 오염된 폐수가 졸졸졸 흐르는 사람은 없습니까? 

사하라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사막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스위스의 지리 측량회사인 <지오-인포메이션>이 러시아 과학자들과 함께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지층 탐사 작업을 벌이다가 사하라 북서부 아타르(Atar) 지역 땅 밑에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경우 하루 3만 2천 리터, 5만 명의 식수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죽어버린 땅, 생명이 살 수 없는 땅, 물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 엄청나게 큰 강이 흐르고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하라 사막 그 밑으로 흐르는 강물처럼 성령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선언과 약속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생수의 강, 성령의 강이 흐를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강같이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쉬운 것은 사막 밑에 숨어있는 강처럼 어떤 신학적인 편견이나 아집으로 성령께서 흐르지 못하도록 막아버려 사막과 같은 메마른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후로 여러분 속에 이 성령의 강, 은혜의 강이 흐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여러분 속에 성령의 강이 흐를 수 있습니까? ➀ 말씀을 기초하여 회개하십시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죄로 더럽혀진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침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회개하여 정결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➁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의 사귐을 가지십시오. 예수님과 사귐이 없이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➂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성령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➃ 마지막으로, 성경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가르치십시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은 성령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은 흥분하여 역사하십니다. 회개하고, 주님과의 사귐을 시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침으로 여러분에게 성령의 강이 흐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명절은 주님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날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큰 명절인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지난 8일 동안 명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명절을 지켜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또 다시 살던 곳으로, 가정으로 돌아가겠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이 그대로일 뿐, 아니 도리어 갈증과 공허는 더 커졌습니다. 그 아까운 시간과 물질을 다 써버린 후, 빈손으로, 빈 마음으로 힘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진정한 기쁨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수이신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질 때 진정한 滿足과 참된 幸福이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할 때,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힘과 즐거움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예수와 성령으로 만이 여러분의 삶에 항상 설날 같은 삶, 진정한 축제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 속에 있으면 매일을 명절처럼 즐길 수 있지만, 예수가 없으면 아무리 山海珍味가 풍성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명절이라 할지라도 공허하고 갈증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 기간 동안 예수를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이번 설날이 진정한 명절이 될 수 있고, 여러분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특별한 명절이 될 수 있으며, 나아가 앞으로 남은 삶을 더 힘 있고 가치 있게 사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예수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나의 심령에 오시옵소서! 
나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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