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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행복 (롬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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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행복 (롬 4:1~9)


복(福)에 대한 히브리어 '에쉐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복'에 대한 헬라어 '마카리오스' 는 물질적, 형태적인 것을 벗어나서 무형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말 백과사전을 보면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悠好德), 고종명(考終命)을 가리켜 오복(五福)이라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일종의 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복과 우리가 말하는 동양적인 복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복은 영적이요, 무형적이요, 근원적인 것이라 하면 동양적인 복은 물질적이요 형태적이요 형상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양적인 복은 복의 요인이라 할 수 있는 보편성과 불변성(不變性)과 영원성과 충족성이 결여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행복'에 대한 객관화된 사전적 의미는 "심신(心身)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 합니다. 따라서 행복은 인간들에 의하여 끊임없이 추구되어오는 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행복에 대한 변(辯)들이 시대 시대마다 이 땅에 있는 최고의 수사를 동원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행복을 사치한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에 그려놓고 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호라티우스는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맨다. 그런데 행복은 누구의 손에든지 잡힐 만한 곳에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 만족을 얻지 않으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R. L. 스티븐슨은 "참다운 행복 그것은 우리들이 어떻게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시작하느냐 하는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바로 아브라함의 의를 행복으로 등식화 했습니다. 
바울은 다윗이 믿음으로 받은 행복에 대하여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32편 1-2절에 『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Ⅰ. 예수를 믿으면 그 불법을 사함받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7절에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 불법 』, 하이 아노미아이란 말은 율법이란 뜻의 노모스에 부정 접두어, 아 가 합해져서 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불법은 법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한 법을 어긴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불법은 곧 죄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4절에 『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고 했습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류는 불법을 행했습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어긴 인간에게 그 죄에서 해방될 유일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불법을 행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 죄 사함을 받고 』의 '아페데산이라는 단어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를 용서함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불법에 대해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축복을 가능케 했습니다. 

시편 103편 12절에 『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인간은 예외 없이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은 법정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삶은 불안과 초조와 함께 삶의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죄인의 신분이 의인의 신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덮어 버리시고 우리의 불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전가시킨 결과 우리에게 있는 의, 이것이 바로 우리의 행복입니다. 

Ⅱ. 예수를 믿으면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7절에 『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가리우심을 받고 』 '에페칼뤼프데산'은 부정 과거 수동태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즉 아주 죄를 덮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체험하고 시편 85편 2절에 『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윗은 시편 32편 1-2절에서 『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가리움을 받은 』의 카사는 '완전히 보이지 않도록 덮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로하솨브'는 '전가시키다', '우리의 죄가 없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죄와 관련해서는 이보다 확실한 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의 수치를 덮어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에 『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한 것입니다. 
스가랴 3장 4절에 『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2장 1절에 『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61장 10절에 『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에 『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2절에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4-5절에 『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8절에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 『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 『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3절에 『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4절에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우리의 죄악을 덮어 주었다는 것을 옷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과 같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죄를 가리워 주시고 덮어버린 것을 확신한다고 하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연약 때문에 가리워 주신 우리의 죄가 취소되거나 한번 덮어주신 것을 들추어내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Ⅲ. 예수를 믿으면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함을 받습니다. 

본문 4장 8절에 『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불법을 사함 받는 것이나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이나 다 같은 의미입니다. 본 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것처럼 인정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 성경구절은 이신칭의에 대한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체험한 후에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 32:2).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는 말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하면 논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죄인이었던 인간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없는 것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의 죄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유의 은총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가 죽을 날이 임박할 때 그 아들 솔로몬에게 자신을 배신한 시므이에 대하여 유언을 남겼습니다. 

열왕기상 2장 8-9절에 『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서 예루살렘에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못하도록 금족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 시므이는 도망한 자기 종을 찾기 위하여 솔로몬과의 약속을 어기고 기드론 시내를 건넜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러 그와 한 약속을 상기시킨 후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여 시므이를 쳐서 죽이게 했습니다. 다윗은 시므이에 대한 그의 심판을 자신의 아들 솔로몬에게 맡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6절에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에 『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무관한 자는 그 죄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과 '축복'은 엄연히 뜻이 다른 말임에도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같은 뜻을 지닌 낱말인 것처럼 쓰이고 있는 것이 유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라고 하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민수기 6장 22-27절에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祝福)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福)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祝福)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福)을 주리라 』고 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축복'(祝福)은 사람이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복을 베풀어 주십사'라고 사람이 하나님께 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복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고 했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불행의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을 때부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이미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사람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행복한 생활의 회복이다. 그것은 참되고 영원한 행복생활의 새로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한사코 행복을 이 세상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부와 명예와 우리가 받은 자식까지도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칼빈은 또 말하기를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자들은 하늘나라를 포기한 자"라고 했습니다. 행복에 대한 참된 보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소유가 존재를 앞설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에게 생명이 있고 그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그 만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그 무엇보다도 절감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궁극적인 행복은 예수를 믿어 죄 용서함을 받고 자기 생명을 잃지 않는데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 받은 자들의 삶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따라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집니다. 
마태복음 16장 17-18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했습니다. 
교회는 우리의 행복입니다. 교회가 부여한 거룩한 직분은 여러분들의 행복입니다. 이 직분이 사명이 될 때 복에 복을 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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