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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우리를 깨끗게 하소서 (1) (눅 1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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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를 깨끗게 하소서 (1) (눅 17:11~14) 


오늘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옛날 우리나라에도 나병이 성행하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병은 이제 더 이상 무서운 전염병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이 성행했던 병중 하나였습니다. 나병은 아주 몹쓸 병입니다.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병입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를 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나병환자가 발생하면 소록도로 격리를 시켰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나병환자들은 동구 밖으로 멀리 격리시켰습니다. 본문은 그렇게 격리되어 있던 나병환자들이 예수께 찾아와 고쳐달라고 외치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모두 깨끗하게 고침 받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 무서운 나병에서 고침 받는데 몇 가지 단계가 나옵니다. 이 단계는 우리들이 기도로 응답받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예수 소식 들음 

첫 번째 단계는 예수의 소식을 듣는 단계입니다. 나병환자의 소원은 그 무서운 병에서 “고침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빨리 고침 받아 가정으로 돌아가는 일이 최대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던 어느 날 그들은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나병환자도 고친다더라”, “소경의 눈도 보게 한다더라”, “앉은뱅이도 걸어가게 하신다더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에게 이 소식보다 더 반가운 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는 나병도 고친다더라”. 나병환자들에게는 이 소식은 복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사 52:7). 기쁜 소식은 빨리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전하고 싶어집니다. 마라톤의 기원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올림픽에서 마라톤은 거리가 42.195 km입니다. BC 490년 그리스와 페르샤 사이에 마라톤에서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마침내 밀티아데스 장군이 지휘한 아테네군이 페르샤 군을 물리쳤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어 그 먼 거리를 오이클레스라는 전령에게 승전보를 가지고 마라톤이라는 전쟁터에서 아테네까지 뛰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때 그 전령이 뛴 거리가 42.195km입니다. 그 전령이 도착하여 “전하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이겼습니다”라고 전하고 그 전령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소식을 빨리 전해 주려고 달렸기에 심장마비로 죽었겠습니까. 

그때 뛰어가 전한 것이 오늘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병도 고친다더라” 얼마나 반갑고 기쁜 소식입니까. 이 소식이 복음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구원받고 고침 받고 은혜 받은 것은 이 소식을 들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 복입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병자들의 눈에서 희망과 소망의 빛이 번쩍 빛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듣는가 하면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이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지금 간절함과 절절이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만이 듣게 됩니다.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소리가 들려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해도 아무나 듣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귓전으로 그냥 흘려보냅니다. 그것은 무관심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관심은 때로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귀를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은 귀를 기울이고 듣고 관심을 갖고 마침내 찾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1장을 보면 “듣고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찾아감 

두 번째 단계는 찾아가는 단계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침내 예수를 찾아가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을 들어도 듣고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들었으면 찾아가야 합니다. 지식과 행동은 다릅니다. 지식을 아는 것을 말하고 행동은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기는 액션입니다. 여기 이 나병환자들은 듣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당연히 찾아갔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찾아가려면 대단한 모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땅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도심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금지된 법입니다. 그 법을 어기고 동네로 들어가다가 발각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대단한 모험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들은 그 모험을 감행하였습니다. 혹시 가다가 돌에 맞아 죽을 지라도 각오를 하고 갔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런 모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열매는 이같은 모험에서 주어집니다. 신앙의 결실은 모험의 열매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다 모험의 결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서 가장 먼저 관심을 둔 것이 여인들을 집에서 나오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모두 집밖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모두 집안에서 일만 하였습니다. 이화여대가 시작될 때도 여인들이 있는 집에 가서 사정하고 설득해서 두어 명 처녀들을 받아 학교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에 용기 있는 집안의 용기 있는 여성들이 처음 모험을 감행하였을 것입니다. 그 용기와 모험자들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남궁억은 홍천이 고향입니다. 그는 홍천은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없어질 때가 많은데 그때 그는 먼저 일어나 길을 내면서 길을 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뒤에 오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졸업식 날 그는 치사를 하면서 여러분은 첫발자국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먼저 길을 가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눈이 왔을 때 뜻이 없는 사람은 먼저 발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뜻 없이 먼저 아무렇게나 길을 내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그 길을 따라가다가 잘못 인도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개척자는 언제나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그런 용기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서민층이 나오고 교회로 들어오고 그 후에 양반들이 뒤늦게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민 장로가 생기고 그 뒤에 양반 집사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열리고 결실이 주어집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기적의 출발입니다.  

부르짖음 

세 번째 단계는 부르짖는 단계입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모험해서 마침내 예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것도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13절을 보면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 되면 그때 제자들이 강하게 그들을 제지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무시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일을 하는데는 더 중요한 일일 수록 순조롭게 쉽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기적이 일어나는 일에는 더욱 그럴 수 있습니다. 얼마나 긴장된 순간입니까. 그 순간에 이 나병환자들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서소” 그 소리는 그냥 해 보는 형식적인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사생결단하고 부르짖는 절규의 소리였을 것입니다. 이번에 고침 받지 못하면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평생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얼마나 절박한 순간입니까. 그래서 주석자는 그들의 부르짖음이 “살아있는 기도였다”고 해석하였습니다. 성경은 “부르짖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부르짖으면 통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르짖는 사람은 절박한 사연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냥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생사를 건 부르짖음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동반한 부르짖음입니다. 그러니까 응답이 오고 기적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르짖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응답이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느 노모가 신앙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술 중독에 빠져 죽어가면서도 마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쓰러졌습니다. 죽어갑니다. 읍내에서 앰뷸런스가 와서 실어갔습니다.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앰뷸런스를 바라보면서 그 어머니가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풀포기를 붙잡고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모습이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그렇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부르짖음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절규였습니다. 

그 부르짖음에는 0.1%도 가식이 없습니다. 순도 100% 의 간구였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 아들은 그 어머니의 부르짖음 때문에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본문의 나병환자들은 각고 끝에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모험으로 여기까지 와서 부르짖었습니다. 생사를 걸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어서 오너라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수고하였느냐“고 하고 맞이하였습니까. 

다른 병자들을 고치실 때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직접 손을 대서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습니다. 혈루병자도 38년 된 병자도 그 자리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도 그 현장까지 가서 손을 대서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나병환자들은 생사를 걸고 찾아왔는데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반갑게 맞아주신 것이 아니고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장 고쳐주신 것이 아니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제사장에게 까지 가려면 또 얼마를 가야 합니까. 여기까지 오는 것도 모험이었는데 또 제사장에게까지 가는 도중에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또 다시 모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신앙의 삶에는 때로 이런 용기와 모험과 순종이 요구됩니다. 신앙에는 때로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고 고침이 나타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이 같은 모험과 순종과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신앙인들에게 모험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요 9:에 보면 눈먼 소경이 고침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먼 장님이 왔을 때 주님은 뭘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보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은 흙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흙덩이를 눈에 바릅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참 잔인한 모습입니다.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것도 잔인한 모습입니다. 그 자리에서 고쳐주시면 얼마나 좋을 것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에게 거기서 거리가 먼 실로암까지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잔인한 말입니까.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에게 굳이 그곳까지 가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이 시험이었고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곳을 보면 한결같이 이 같은 모험과 순종이 있는 곳입니다. 열왕기하5장을 보면 나병환자였던 아람군의 장관 나아만이 나병을 고치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나아만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가면서 기대를 하였을 것입니다. 가면 반갑게 영접해 주고 손으로 만져서 고쳐줄 것으로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가니까 문을 열고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국방장관이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체면이 구겼습니다. 나와 보지도 않습니다. 기분이 몹시 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냥 돌아가면 병은 평생 고치지 못합니다. 그때 수행했던 종이 강물에 가서 씻으라 하는 말이 얼마나 쉬운 방법입니까, 더 어려운 일도 해야 할 것인데 한번 가서 씻어보라고 강권합니다. 그래서 가서 씻었더니 병이 나았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똑같은 순종을 요구하셨고 시험이고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10명의 나병환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는 동안 도중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두려운 사람은 갈 수 없습니다. 

가지 못하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10명의 나병환자들이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가서 고침 받고 응답받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험이고 둘째는 순종이고 셋째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로 모험으로 갔고 순종으로 갔고 고침 받을 줄 믿고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요소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결국 고침 받음 

그래서 결국 10명의 나병환자들이 마침내 병을 고침 받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이 나병환자들이 고침 받고 각자 고향으로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기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메시야 임을 나타내신 일입니다. 당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어나게 하고 나병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자는 메시야라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 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없이 나병환자들을 고치고 눈먼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알 만한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간구하는 자는 응답받는 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 온 사람들은 한사람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 찾아왔는데 누구도 그냥 돌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고침을 받고 다 회복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세 번째는 모든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은 예수께 가야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굿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께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들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주님께 나아와 해결 받을 일이 많습니다. 눈을 뜨는 일, 병을 고침 받는 일, 죽음을 극복하는 일, 현재 일과 장래 일, 육신적인 일, 영적인 일 등 모두 해결 받을 일들입니다. 

네 번째는 여기 나병은 몸에 나타나는 나병을 말하지만 비유하자면 우리 몸 안의 추한 모습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추한 것들이 담겨 있습니까. 우리 안에 온갖 죄들이, 온갖 욕망들이, 온갖 탐욕들이, 온갖 음란들이, 온갖 부패한 마음들이 얼마나 흉하게 쌓여 있습니까. 이것들이 모두 나병 못지않게 추한 모습들입니다. 이 추함에서 씻김 받고 고침 받아야 합니다. 그것조차도 주께 나아가면 다 씻김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병, 생각의 병, 육신의 병, 나병과 같이 추한 내 안의 모든 병들을 다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치유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사함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정결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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