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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라 그리고 일으키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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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그리고 일으키라 (행 3:1~10) 
  

한 가난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바이올린이 한 대 있었는데, 실력도 별로이고 연습도 하지 않아서 연주회에 불려 다니지 못했습니다.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바이올린을 갖고 중고 악기점을 찾아갑니다. 통사정을 했더니 주인은 100달러를 쳐주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돈을 갖고 곧바로 식당으로 달려가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악기점 주인이 그 바이올린을 조율하고 소리를 내보니까 제법 괜찮았습니다. 불을 켜고 손질을 하려고 여기저기 살피다 악기 안쪽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Stradivari 1704’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 감정을 해 본 결과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진품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후 그 악기는 명연주자에게 1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젊은이는 자기가 소장하고 있던 악기의 가치를 모르고 싸구려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잠재된 가치를 모르는 채 현실에 안주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현실의 굴레에 얽매인 채 체념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냥저냥 살다가 죽어 갑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그런 싸구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아니, 그렇게 해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깨닫고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막 시작되는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담대히 나아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 한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 그를 일으켜 줍니다. 그는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전격적으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그냥 순응하고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달라질 수 있는데, 그리고 달라져야 되는데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해가 됐다고 뭔가 달라져야지 하고 결심도 해봤지만, 벌써 한 달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면 여전히 구습에 얽매여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겁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인생으로 변화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앉은뱅이 인생   

오늘 본문을 보면 등장하는 앉은뱅이의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앉은뱅이라는 말이죠. 

행4:22를 보면, 그의 나이는 40세쯤 됐습니다. 그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선천성 장애인으로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아왔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족이나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가고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직접 보살펴주는 사람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구걸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간청해서 성전 문 앞으로 갑니다. ‘미문’(美門)은 예루살렘 선정의 여러 문들 중 하나로, 동쪽에 위치한 아름다운 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동대문이죠. 그는 미문 앞에 있다가 성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했습니다. “한 푼 줍쇼!”

그는 아마도 별다른 소원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이니 그저 입에 풀칠만 해도 다행이라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언뜻 언뜻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주위 사람들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 사람인들 마음껏 걷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면서 받은 마음 속의 상처와 비참한 신세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날려버리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가능성이 없고 그 방법도 모르니까 자포자기한 채 하루하루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분, 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루하루 돈 몇 푼에 인생을 거는 ‘죽지 못해 사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저 먹고 사는 현실적 육신적 문제만 겨우 해결하려는 작은 소원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 의미도 즐거움도 없이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 모습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저 눈앞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직 육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것인지 모릅니다. 정말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문제에 매달려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 대충 이러합니다. 예수님도 지적하셨죠. 마6:31~32 “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 이 말씀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긴요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극단적인 비유입니다만, 이런 인생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겉보기에 멀쩡하지만 그 안에서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계바늘이 멈추고 뻥~ 하고 터지는 겁니다. 이 경우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요? 속히 시계 바늘을 멈추는 겁니다. 그 흐름을 바꾸는 겁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앉은뱅이 걸인이 정말 불쌍한 것은 육신의 장애나 물질적인 가난 때문만은 아닙니다.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일시적인 소원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인 문제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앉은뱅이의 모습이죠.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앞의 현실적 문제에만 매달려 하루하루 근근이 살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군상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런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2] 일어나 걷는 인생 

감사하게도 본문의 앉은뱅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주셨고, 그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는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앉은뱅이 인생’이 아니라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된 겁니다. 6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지나가자 그는 별 생각 없이 “한 푼 줍쇼!” 구걸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돈도 없었거니와 돈을 한두 푼 주는 게 그 사람의 인생에 근본 해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붙잡아 일으키는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이름에는 그 당사자의 인격, 권세, 그리고 능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권세자의 이름에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예전에 이런 일들이 많았잖아요. 청와대 실세를 사칭해서 사기를 쳤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한 겁니다. 

보통 사람의 이름은 별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20여년 전 이야기입니다. 저의 집 아이가 동네에 나가 널다가 얼굴이 빨개 가지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왜 그런가 그랬더니, 동네 오빠들이 서로 자기 아빠 자랑을 하더랍니다. 우리 아빠는 교수다! 사장이다! 부장이다! 변호사다! 자기를 딱히 댈 게 없어서 그냥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 아빠는 홍문수다!” 그러자 오빠들이 “그게 뭔데?”하고 놀리더랍니다. 그렇죠. 보통 사람의 이름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놀라운 것입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죽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받고, 그 이름으로 외치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으로 그 앉은뱅이 걸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외칠 때 앉은뱅이는 자기 몸에서 이상한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났고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며 찬송합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내 그의 입술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어가지 보지 못했고, 생각도 않았던 성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제 그에게는 일시에 육신적인 궁핍과 영적인 궁핍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구걸할 필요도 없고, 마음껏 성전을 출입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영생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의 고통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물론 그의 육신적 장애나 물질적 궁핍을 해결할 수 있게 됐지만,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영적 풍요가 찾아왔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하죠. 왜냐하면 당장은 육신의 장애를 해결하고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어서 모든 게 해결된 것 같지만 육신의 욕망은 끝이 없죠. 단순히 육신의 문제만 해결한 것이라면 일시적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육신의 굴레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안에 영생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천국이 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영혼 가운데 누리는 기쁨과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겁니다.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영생의 샘물! 이 기쁨은 영적인 것으로 육신적 환경을 초월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체험한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빌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육신적으로 풍부하든 궁핍하든 상관없이 어떤 환경 가운데 처해도 그 가운데 영혼의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외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내적인 능력을 갖추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럴 때 새 로운 인생이 됩니다. 고후5:17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육신의 포장이 바뀐 게 아니라 인생의 근본인 영혼이 바뀐 겁니다. 한두 가지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 한 게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영원히 해결하는 겁니다. 

이런 인생으로 변화되면 현실의 문제들도 더 이상 문제되지 않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킬 수도 있고 설사 환경이 변화되지 않아도, 마음이 변화되었기에 문제될 게 없습니다. 

「던킨 도너츠」창업자 로젠버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변화됩니다. 그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습니다. 30세에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도너츠 상표 개발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그를 놀랍게 축복해 주십니다. 전 세계에 많은 체인점을 거느리게 됩니다. 그는 72세 생일 날 축하연 석상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가난했고 무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나를 변화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된 겁니다.

환경이 변화되지 않고 단지 마음만 변화되어도 큰 축복입니다. 이것도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신앙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어느 젊은 교수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를 잉태하게 됐는데,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출산하고 보니 뇌성마비 아이입니다. 황당했습니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될지 막막했습니다. 서로를 탓하다 파경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던 중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크리스천 부부를 만나게 됩니다. 똑같이 그들에게도 뇌성마비 자녀가 있었지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나는 가정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교제하던 중 감동을 받고 그들 역시 변화를 경험합니다. 부부의 사랑이 회복되고 아이에 대한 사랑도 싹트면서 가정이 천국 같이 변화된 것입니다. 환경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앉은뱅이 상태에서 일어나 걷게 된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혹시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앉은뱅이 같이 주저앉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문제들과 환경에 얽매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그 가운데 불신자들처럼 숙명이거니 팔자소관이거니 하면서 체념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의지함으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당당히 걸어 다니며 승리의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3] 일으키는 인생 

본문의 앉은뱅이 걸인은 일어나 걷게 된 후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남은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그를 일으킨 베드로도 본래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평생 하루 벌어 하루 먹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한 때 꿈에 부풀었지만, 그것도 세속적인 차원이었습니다. 예수님 따라 다니면 한 자리 하지 않을까,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겁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낙심천만한 가운데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성령강림 이후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변화됩니다. 영적인 앉은뱅이 상태에서 벌떡 일어난 겁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사람이 됐습니다. 4절 보세요. 4절.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거늘” 앉은뱅이 걸인을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입니다. 비록 물질은 없었지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있었기에 도와줍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줍니다. 돈 몇 푼 도와주는 것은 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전해 주는 게 근본적인 도움입니다.  

① 기도의 삶 :

먼저 베드로는 기도로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삶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하루에 세 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제3시(오전9시), 제6시(정오 12시), 그리고 제9시(오후3시)입니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이렇게 기도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 능력 가운데 자신도 일어날 수 있었고, 남도 일으켜 줄 수 있었습니다. 

다시 6절~7절 보시죠.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 베드로가 명령합니다. 그리고 붙잡아 일으켜 줍니다. ‘일어나 걸으라!’ 이것은 기도의 한 형태로 명령형 기도(Prayer of Command)입니다 혹은 선포형 기도라고 합니다.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에 찬 기도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기도로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 줄 수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십시오! 가족들 가운데 친구들 가운데 이런 저런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일으켜 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증인의 삶 :

또 베드로는 증인의 삶을 통해 사람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이때 베드로 옆에 있는 앉은뱅이였다 일어선 사람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9절~10절 보세요.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여기서 ‘놀라니라’라는 말은 원문에 명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헬라어로 ‘엑스타시스’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ecstasy(황홀경)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 보고 많은 무리가 깜짝 놀라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이제 ‘살아있는 증거’가 된 셈입니다. 

특별히 11절을 보면 그 사람 스스로 어떻게 합니까?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NASV-he was clinging to Peter and John)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여기서 ‘붙잡으니’ 이 말은 영어성경을 보니까 cling to(붙어 있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베드로에게 붙어 다녔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의 복음 증거에 대해 시청각 자료 역할을 한 겁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생깁니까? 그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가 증거가 되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 예수를 믿겠다고 결신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한 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까? 

행4: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3천 명이 되었고, 이제 5천 명이 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불이 한참 타오르고 있는 곳에 휘발유를 뿌린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받은 상황에서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행4: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당국자들이 사도들을 잡아다 취조를 하고 핍박했지만 그 사람의 명백한 증인으로 옆에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훈방 조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일으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입니다.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를 잘 아시죠.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도 그녀의 찬송이 21곡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나의 생명 되신 주’(380장), 그리고 ‘나의 갈 갈 다가도록’(384장) 등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앉은뱅이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생후 6주만에 실명했으니 모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됩니다. 절망 중에 주저앉았던 앉은뱅이 인생에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원망과 불평, 절망 가운데 한탄하며 평생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송하는 천상의 시인이 됩니다. 그녀는 95세에 천국 갈 때까지 8천 편 이상의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것들을 통해 1백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로, 소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 질병, 문제의 자리에서 일으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앉은뱅이 인생처럼 현실 속에서 때로는 안주하며, 때로는 체념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육신만을 위해 그냥저냥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주저앉아 있는 자리에서 당당히 일어나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들을 일으켜 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는 성도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시고, ‘일어나는 인생’에서 더 나아가 ‘일으키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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