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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아, 너 자신을 알라 (창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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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너 자신을 알라 (창 2:15~17)
 
 
우리 인간은 양면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인간은 티끌과 먼지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세상에 짐승과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술궂은 장난이 아닙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배려이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늘 겸손하면서도 고귀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죽음의 위협을 순간순간 느끼면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이 땅 위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창조적 자유를 이 땅 위에 마음껏 구가하며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면서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유자로, 자유로운 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도 하나님의 품성을 따라 자유와 선택을 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만, 이 자유는 인간이, 피조물이 갖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선물인 동시에 위험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생명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유 때문에 생명이 파괴되고 다른 사람의 생명조차도 파괴시키는 위험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는 마치 칼과도 같습니다. 주부의 손에 칼이 쥐어지면 식탁에 풍성한 메뉴가 올라오고 가족들이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모든 식품이 바뀌지만, 강도의 손에 칼이 들려지게 되면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흉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은 여기에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싶은데 그냥 자유만 주면 이것이 잘못된 길로 갈 수 밖에 없기에 인간에게 안전한 자유를 주지 못하는 위험성에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고의 선물인 자유와 선택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평화와 안전을 위한 자유가 되기 위한 유보 장치를 인간에게 주십니다. 
  
본문 16절에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대로 먹어라. 네 자유대로,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어라.”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생존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먹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먹는 것을 못 먹게 하면 세상에 이처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 내가 만든 모든 각종 실과들, 이 모든 것들을 다 너희 인간에게 맡길 테니까 마음껏 먹어라.” 
 
여러분, 우리나라가 빈곤과 파괴된 전쟁의 현장 속에서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지 못해서 모든 국민들이 배고픔을 경험하며,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 꿈꾸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1970년대와 1980년대가 넘어서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음식문화에 있어서 ‘뷔페’ 라는 식사가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처음 뷔페 음식을 먹어보면서 얼마나 맛있게 드셨습니까? 모든 것을 먹고 싶은 대로 골라먹을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요즘은 뷔페 음식의 인기가 없어졌지만, 뷔페를 처음 먹을 때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족감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티끌로 만들어진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육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먹는 것, 마시는 것에 의해서 인생이 얼마나 좋고 행복해하는가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몸이 아프면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배가 고프면 얼마나 먹고 싶은지를 아시기에 이 땅 위에서 먹고 마시는 자유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육체에 필요한 먹는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가난한 농어촌, 미자립 교회들을 도와야 됩니다. 우리 주변에 먹지 못하는 헐벗은 이웃이 있다면, 우리의 것들을 내놓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더더구나 먹지 못하는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그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먹을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개성에 다녀왔습니다. 개성은 북녘의 3대 도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개성 시내에 승용차가 한대도 다니지를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개성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노숙자보다도 못한 모습이라며 슬퍼했습니다. 북녘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생각에 가슴을 저몄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먹는 것은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녘의 백성들을 도와야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돕지 않으면, 그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배고플 때 너희 남녘의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누가 돌아보았는가? 내가 목마를 때 누가 물을 가져다 마시게 했는가? 내가 배고플 때 누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라고 예수님께서 물어보시는 비유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사랑의 대상이고, 우리의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할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자유가 바로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배부르게 될 때 평안해지는 자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더 큰 자유인 창조의 자유를 맡겨주셨습니다. 이 모든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전체를 우리로 하여금 마음껏 다스리고, 누리고, 창조의 역사를 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은 자유의 종교, 해방의 종교입니다. 변화의 종교, 도전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창조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이 있는 곳마다 새 역사를 이루도록 우리에게 모든 것을 위임해주셨습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였던 에이브라함 카이프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전 피조 세계 어느 한 영역에 대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라고 외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역이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카이프는 20세기에 기독교 지도자요, 신학자요, 목사요, 네덜란드의 수상이 된 정치가로 57년간의 찬란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수상으로 4년, 목사로 10년, 하원의원으로 10년, 상원의원으로 7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수로 20년, 거기에다가 정당 의장, 신문 편집인 등의 자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가 아닌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창조적 적극성인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이 땅 위에 새롭게 변화시키며, 하나님의 창조의 새 역사를 만드는 은총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면서 더 큰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너, 너희들’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을 만드셨을 때는 ‘너, 너희들’ 이라고 하는 인격적인 언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생물들과 식물들, 짐승들은 3인칭으로 그것, 그것들인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는 ‘너’ 2인칭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셔서 대화적인 존재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말동무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인간은 2인칭 대화를 할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대화할 줄 안다는 것이 인간이 갖고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가 대화하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말씀도 제대로 드릴 수 없는 위엄이 많은 아버지로 여겨져서 아버지와 2인칭으로 대화해 본적이 있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지금 우리에게 기다리는 것은 잔소리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2인칭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의 고백입니다. 
 
부부가 참으로 대화를 한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지금도 대화를 하고 계십니까? 아내를 보고, 남편을 보고 내가 갖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대화를 나누는 가정은 가끔 싸움도 하고, 다툼도 하지만 행복한 가정입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대화가 단절될 때에 행복했던 가정이 지옥처럼 음산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고, 동물과 같이 보이게 지으셨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게 만든 최고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얘야,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가 없다. 또 다른 빵, 생명의 빵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귀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하나님과 사랑하면서 대화하고, 하나님의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귀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한 가지 유보조항을 내세우십니다. 그것은 본문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너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 내가 각종 백가지 천 가지 만 가지 이 모든 것들을 다 너를 위해서 만들어주었다. 네가 다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선과 악을 아는 나무는 먹지 말라.”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짐승에게는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귀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자유를 간직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인간에게만 이 마지막 ‘하지 말라’는 한 가지 유보조항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모든 자유가 있지만, 한 가지 너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는 자유자다.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너는 창조의 역할을 이 땅 위에서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기억하여라. 내가 너를 만들었다. 네가 경배할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열 달 동안 갖고 있다가 아이를 낳아도 어미가 자식을 잃어버릴 때는 있을지 몰라도, 나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를 잊지 아니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이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셔서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가?’ 하며 항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지성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건 죄가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성숙된 과정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도 인간을 지성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언어적인 존재로, 대화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또 인간을 감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하와를 친히 아담에게로 데리고 오셨을 때 아담은 너무나 기쁘고 놀라서 하와를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다.” 
 
하나님은 감성적인 기쁨과 즐거움, 놀라움을 표현할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결코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었기 때문에 지성적이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을 먹었기 때문에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존재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인간에게 지?정?의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은 이 나무를 따먹기 전에는 악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과같이 계신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선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이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악을 알기 시작하고 악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에게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어야 인간의 자유가 풍성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정체성,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의 손안에 있을 때,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자유를 주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것은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와 똑같은 자녀들에게 얼마만큼 많은 자유를 허락했습니까? 
우리는 자유보다는 많은 것들을 간섭하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세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천 가지, 만 가지의 자유를 주면서 오직 간섭은 한 가지만 하셨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고 모든 것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이 나를 억압하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못 살게 구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심술궂게 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만들어준 하늘과 땅에 있는 이 모든 피조물을 마음껏 소유해라, 마음껏 누려라, 마음껏 즐겨라, 이 모든 것들을 새롭게 네가 바꿔도 좋다. 모든 것이 네게 주어졌다. 너는 창조자의 역할을 감당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특권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며 말씀합니다. 
“한 가지를 기억해라! 모든 피조물은 너의 소유물이 될 수 있지만, 나 창조주 하나님은 너의 소유물은 아니지 않느냐? 그것을 깨달아라. 나는 창조주다. 그러므로 네가 순종하고, 네가 복종해야 할 명령이 있다는 사실,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경배와 찬양의 대상이고 순종의 대상이지, 내가 마음대로 휘두를 나의 피조물은 아니지 않느냐? 그것을 깨달아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아! 너를 스스로 창조주라고 여기지 말라. 너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유까지 네게 줬지만, 그 자유를 행할 때에는 네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처럼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처럼 자유 할 수 있고,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경배하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나가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내가 먼저 하나님처럼 되기 원하고 내가 먼저 자신을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선언하면, 하나님께서 거꾸로 ‘너는 티끌이다.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너는 피조물이야. 너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야. 너는 하나님이 아니야.’ 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가르쳐 주시게 됩니다. 바로 이를 위해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자유를 우리가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버리고, 내가 모든 것의 자유자라고 선언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야, 너는 먼지야, 너는 흙이야.”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나무가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면서 이 자유를 주시려고 하십니다. 옛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Absolute freedom is inhuman.’ 
‘절대적인 자유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에게 밖에 없는 것인데 인간인 내가 절대적 자유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에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자이신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주겠다. 내가 네게 자유 함을 주겠다. 내가 네게 창조적 세계를 허락해 주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 은총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 있으며, 생명과 자유를 갖고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한 자유자이신 하나님 품에 앉아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창조적인 인물로, 이 땅에서 마음껏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것들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티끌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자유를 선물로 받은 은총의 존재입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우리는 탐욕과 방종으로 바꾸었던 죄인들인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내 소유물처럼 생각하고 살려고 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시간, 창조세계 이 모든 것들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경배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가 피조물인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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