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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면 기쁘시게 합니다 (창 5:21~24, 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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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하면 기쁘시게 합니다 (창 5:21~24, 히 11:5)


어릴 때 철로 위를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입니다. 양팔을 벌리고 철길 위를 비틀거리며 가다 떨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양쪽 철로 위를 함께 걸으면 두 사람 다 안전합니다. 혼자는 떨어지지만 함께 가면 떨어지지 않습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든든한 것입니다. 
  
멍에란 두 마리의 소를 함께 묶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멍에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고(마 11:29), 나의 멍에는 쉽다”(마 11:30)고 하셨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할 때 경험이 많은 소와 함께 멍에를 매게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소는 멍에를 단단히 매어 짐을 더 실리게 하였고, 경험이 없는 소는 느슨하게 하였습니다. 경험이 없는 소는 경험이 있는 소와 함께 멍에를 매고 가지만 짐이 가벼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가지만 짐은 예수님이 지고 가십니다. 
  
저는 여러 번 장애를 경험했습니다. 다리를 다쳐 한 달 동안 지체장애를 경험했습니다. 눈을 다쳐 보름동안 시각장애 경험도 했습니다. 성대 결절 수술을 하여 청각장애도 경험했습니다. 사실은 청각장애는 아닙니다. 말을 못했지만 듣기는 했으니까요. 장애를 경험하며넛 배운 점이 참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를 배운 것입니다. 장애인에게 가장 좋은 태도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걸음이 불편한 사람을 만나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 함께 걸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장애인이 원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함께 할 수는 세상을 장애인들은 한 결 같이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희랍인 조르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60도 흑백영화인 이 영화는 젊은 영국인 작가 바실이 아버지의 유산인 광산이 있는 크레테로 갑니다. 크레테로 가는 배에서 희랍인 조르바를 만납니다. 조르바는 기행이 뛰어나 다른 사람들에게 불신의 대상이었지만 바실은 조르바를 광산 책임자로 세웠습니다. 도시에서 방탕한 삶을 살던 조르바는 다시 섬으로 돌아왔지만 광산은 파산한 다음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해변에 쓸쓸히 앉아 있던 바실이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영화의 끝 장면은 명품입니다. 춤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동행입니다. 춤은 두 사람이 함께 걷는 것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춤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천사들도 너와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천사는 우리의 댄스 파트너입니다. 춤은 함께 추는 사람이 스텝이 맞아야 합니다. 교부 히폴리투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 무도회의 무용수라고 하였습니다. 춤은 즐거움의 표현이고, 춤은 좋은 사람과의 동행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10고조’라고 부르는 인류역사상 가장 장수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은 900세를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에녹은 가장 짧게 살았습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 969세를 살았습니다. 에녹에게는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라고 에녹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장 짧게 살았어도 가장 오래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5에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합니다.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 죽지 않고 승천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죽지 않고 하나님께 옮겨진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창세기 5:24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를 곁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곁에 두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도망가지 않고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하나님이 외면하시는데 내가 동행하려고 하는 짝사랑이 아닙니다.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어디엘 가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여 가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 함께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사실은 내가 더 기쁩니다. 내가 더 든든합니다. 내가 더 보람이 있습니다. 내가 더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합니다. 고난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인 이 고난의 길을 함께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외의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구레네 시몬이 있었고, 십자가 아래는 요한과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고통을 지고 가신 예수님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게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좋은 협력자이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섬기던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갔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누가는 의사였고 문필가였고 역사가였고 여행가이었습니다. 누가가 바울과 동행하는 것만으로도 바울은 든든했을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15:1에서 하나님은 단지 “아브라함아”하고 불렀는데 15:2에서 아브라함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라고 합니다. 언약이란 쌍방의 계약인데 아브람의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대단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는 장면에서는 창세기 18:17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의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논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찾고, 모를 때마다 물어보고, 갈 때마다 동행하고, 없을 때마다 아쉬운 이런 존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결혼은 동반자를 얻는 일입니다.  배우자는 내 삶의 여정을 동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 남편, 내 아내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결혼하려면 혼자만의 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결혼은 함께 거한다는 의식입니다. 결혼식을 할 때는 신랑과 신부가 각각 따로 입장하지만 퇴장할 때는 남편과 아내가 되어 함께 퇴장합니다. 이 것은 결혼식을 시작할 때는 서로가 각각 다른 길을 걸어온 남이었지만 결혼식을 마치고 나갈 때는 남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하나라는 상징입니다. 
  
신령한 혼인인 구원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믿을 때 네 가지 차원의 불가분의 관계로 연합합니다. 첫째는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분과 함께 묻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수도하는 은자들은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의 대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함께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함석헌선생의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용혜원시인의 ‘그리운 사람, 이름다운 사람’이란 시를 아세요? “우리는 인생을 함께 할 친구가 있는가? 어디든 동행할 친구가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언제나 동행할 수 있고 맡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의 행복을 느끼는 말들입니다. 
  
‘짧은 길은 혼자 가고, 먼 길은 함께 가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 길이 무슨 길인지 아십니까? 죽음의 길입니다. 이 길은 함께 가야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장애인들이 달리기를 할 때 함께 뛰어주는 사람을 ‘패이스 메이커’(pace maker)라고 합니다. 패이스 메이커가 없이는 달리기가 힘듭니다. 함께 가는 삶을 함께 갈 사람이 없이 혼자 갈 수 있습니까? 혼자 가는 인생길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9세기말 앨버트 심슨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이라는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그는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였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와 함께 걷는 것이 복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4절을 보세요. “옛날 선지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올라 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참 아름다운 찬송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창세기 5:24 하반절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녹이 죽지 않고 승천했으며,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예수님도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죽지 않고 승천하였다니 큰 영광입니다. 
  
죽었다는 표현이 성경에는 여럿이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이 제일 많습니다. 노아도 죽었다고 했습니다.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조에게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혼이 떠났다는 말도 있고, 영이 떠났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두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니라’는 표현인데 스데반은 자니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데려가니라’는 표현이 있는데 에녹은 데려 갔다고 했습니다. 데려갔다고 하는 말은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는 사람을 왜 데려가겠습니까? 좋은 사람, 기쁜 사람이니까 데려가겠지요. 
  
초대 교회에 빈민구제와 사랑을 실천한 존경받고 경건한 식스투스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식스투스 감독은 순교하였습니다. 그 교회의 수석 집사였던 라우렌티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며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데려가지 않습니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에 나를 뒤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 로마 시장은 라우렌티우스에게 교회의 전 재산을 국가에 상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재산을 정리하는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고 전 재산을 팔아 수천 명의 작은 자들에게 주고 그들을 교회에 다 모이게 하였습니다. 시장이 보물을 요구하자 그는 예배당 문을 활짝 열며 수백 명의 장애인, 고아, 과부를 보여주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결국 황제 앞에서 숯불에 달구어지는 수난을 당한 끝에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사에는 “하나님은 라우렌티우스 집사도 그의 스승 식스투스에게 같이 데려가셨다”고 합니다. 같이 데려가는 것은 참으로 영광입니다. 
  
교회에서 항상 말썽부리고 속 썩이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이 사람이 오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왜 그 분을 빨리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은 이곳에서도 필요 없다” 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이 데려가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디슨은 심하게 귀가 멀어 잘 듣지 못했습니다. 에디슨이 그의 아내 미나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모르스 신호였다고 합니다. 에디슨은 이 방식으로 청혼하여 결혼을 하였습니다. 헨리 포드는 자신이 만든 차를 에디슨에게 선물하면서 최신형 보청기 세 가지를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 고르시죠”. 에디슨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러시죠?” “셋 중에 하나라도 작동한다면 독서 대신 사람들의 하는 말을 들어야 할 테니까”라고 했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진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때 에디슨은 “보청기 셋 중에 하나라도 작동된다면 미나는 매 주일 교회에 데려가려 할 걸세”라고 했답니다. 자신을 데려갈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은데 데려가는데 오히려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은 데 갈까 염려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셔야 합니다.  
  
우리 옛날 이야기들, 특히 ‘전설 따라 삼천리’를 보면 저승사자가 등장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저승사자가 데려갔다고 합니다. 또 죽을 때가 되면 저승사자가 데리러 온다고 합니다. 웬 저승사자입니까? 저승사자가 데려가면 안 되지요. 화면에 나오는 저승사자를 보세요. 한 결 같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은 하얗고, 갓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승사자가 데려가면 가는 데가 뻔합니다. 이런 저승사자가 절대로 좋은 데로 데려갈 수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데려가셔야 합니다. 
  
서해에는 우리나라 배와 중국 배가 함께 열심히 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조기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그 조기를 누가 데려가느냐에 따라 영광굴비가 되기도 하고 중국산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데려가면 우리가 기뻐합니다. 중국이 데려가면 중국이 기뻐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데려가면 저승사자가 기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쁨이 될 자를 데려가십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두시려고 데려가시니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도 기뻐하실 터이고,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입니다. 
  
우리 교단의 가장 원로이신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님이신 방지일목사님은 올해 백세이십니다. 일전에 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느 연세 많으신 분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의 아들이 목사님께 그러더랍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이 너무 많아서 하늘 가는 길을 잃었나 봐요”. 하늘 가는 길은 잃지 않겠지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데려가시니 언제가 안전하게 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일찍 데려가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데리고 가달라고 필요가 없습니다. 데리고 갈 시간은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아무리 늦게 가도 하나님의 나라의 내 자리는 반드시 있습니다. 

  
결론 

사람이 누구하고 같이 밥을 먹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사회적 맛이라고 합니다. 맛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물리적 맛이 있습니다. 원래 그 음식의 재료가 가진 맛입니다. 둘째는 화학적 맛입니다. 어떻게 양념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회적 맛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하더라도 누구하고 먹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이 맛이 제일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동양에서는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화평과 신뢰와 형제애와 용서의 상징입니다. 식탁을 나누는 것은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정통 유대인들이 “당신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당신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뜻입니다.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은 우정 맺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화평하게 지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질 들뢰즈는 “‘나처럼 하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의 유일한 스승은 ‘나와 함께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함께 하는 자, 동행하는 자는 영향력을 주는 자입니다. 기쁨을 주는 자입니다. 우리 평생의 삶이 에녹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라도 데려가셔서 하나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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