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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9) : 가버나움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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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9) : 가버나움 (막 2:1~12)


오늘 저는 여러분을 모시고 성지 갈릴리 해변의 마을 가버나움으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가버나움은 본래 ‘나훔의 마을’(Kfar-village, Nahum-나훔)이란 뜻으로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디베리아스가 갈릴리 호반의 대표적인 로마 도시라면 가버나움은 대표적인 유대인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쪽으로 오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몇 몇 제자들의 집이 있었던 이 마을을 갈릴리 사역의 중심 타운으로 삼으시게 된 것입니다. 마태9:1에는 이 동네를 예수님의 ‘본 동네’(his own town)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성지 순례를 가보면 가버나움 입구에 영어로 ‘Town of Jesus''''(예수님의 마을)라고 표기된 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그렇게 크지 않은 이 마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마을로 발전해 간 동기를 제공한 것도 예수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라가 보자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마을의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고(막1:21-28), 가르침 동안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의 병을 고치셨으며, 이어서 회당에서 나와 시몬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열병을 앓고 있던 그 장모의 병을 고치셨으며(막1:29-31), 이어서 그 동네의 각종 병자들을 밤이 깊기 까지 고치셨고(막1:32-34), 수일 후 다시 여기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중풍병자를 고치셨으며(막2:1-12), 다음 3장에는 ‘손 마른 사람의 치유’(3:1-6)가 기록되고, 다시 마가복음 5장 21절 이하의 회당 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과 열두 해를 혈루 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치신 일(막5:21-43)도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었습니다. 

누가 복음 7장에 의하면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일 또한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치유사건(눅7:1-10)이었습니다. 성지 순례의 여정으로 이 곳을 방문해 보면 우리는 2세기부터 있었던 회당 터와 베드로의 집터(그 일부는 1세기 것) 그리고 후일 거기에 아름다운 기념 교회(2009년 순례시 주일 예배를 여기서 드림)를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가버나움 치유 사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중풍 병자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치유 이적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본문 1절은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고 기록합니다. ‘누구의 집이었을까’는 물음이 생깁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처음 가버나움에 오셔서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 자신의 독립적 거처를 장만하셨을 가능성이 컸다고 봅니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이 여기서 1년 반 이상 머무셨을 것(왔다 갔다 유대를 왕래하심)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 가버나움 중풍병자의 치유에서 본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은 마음의 치유에 우선적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의 경우 그에게 가장 절실한 바램은 한번 일어나 걸어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육체를 고치시기 전 그의 영적 상태에 먼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먼저 선언하십니다.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죄 사함 없이 육체의 병을 고친다 해도 그것만으로 그가 행복할 수 없는 것을 아신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실 영적인 건강 없이 육체적인 건강도 유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유대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언하자 깜짝 놀라며 그가 누구이기에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생각으론 하나님 한분만이 죄 사함을 선언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의학도 ‘전인 건강’이나 ‘전인 의학’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육체의 건강만으로 건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전인적 존재’ 곧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육체가 잘못되면 마음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반대로 인간의 마음이 아프고 병들면 육체도 병들 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과거에 육과 영 두 가지로 완전히 나누어 말하던 소위 이원론에서 육체와 마음을 하나로 보는 전인적 견해가 신학계와 의학계의 정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보면 인간의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육체에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절망해 버린 사람,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 스스로가 죄책감에 잡혀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정말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인간의 영혼을 만지시고 마음을 만지십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께서 먼저 물으신 질문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물음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정직한 상태를 직면하는 일-이것이 언제나 치유의 시작입니다.

2. 예수님은 공동체의 연합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이 보여 주는 치유 사건의 한 중요한 특성은 이 치유가 공동체의 연합적인 노력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바로 이 네 친구의 연합된 도움으로 그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치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런 네 친구의 노력을 의미있게 주목해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사실 이 네 친구가 자기들이 데려 온 환자가 예수님을 만나도록 취한 조처는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날 너무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이 중풍병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지붕을 뜯었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지붕 ‘기와를 벗기고’(눅5:19)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지붕은 평면이고 집 옆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아마도 그 지붕은 나무 기둥을 걸고 그 위에 짚이나 나무 가지들을 엮은 다음 흙 기와를 얹은 것이어서 그렇게 지붕을 벗기는 것이 우리나라 지붕처럼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흙이 떨어지고 나무 가지들이 떨어지는 등의 곤란한 상황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문에서 한번도 그들의 무례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누구보다 함께 하는 공동체의 소중함을 아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실로 혼자서도 인류를 구함이 가능할 수 있었음에도 12제자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펼치시고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요한복음 17장 마지막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장에서의 그분의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요17:21) 이제 이어지는 17:23절의 기도를 읽어 보십시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런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주일 예배만을 의지하지 않고 목장 공동체를 통한 교제를 강조하고 격려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이상으로 목장 모임에서 은혜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동체의 연합을 주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주님의 약속을 기억해 보십시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18:20)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태18:19)

3.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본문 5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기 그들의 믿음을 어떻게 하셨다구요? 예,<보시고>했습니다. 내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 내 친구는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이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이런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이 한 사람을 고치고 한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이번 구정 명절에도 여러분의 식구들이 함께 할 때 가능하면 이미 먼저 믿는 식구들이 아직 예수님 모르는 우리 가족들도 예수 믿으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예수님께 먼저 함께 믿는 이들이 함께 중보하고 예수님께 그 안 믿는 식구를 함께 노력해서 복음을 듣게 하고 주께로 데리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신다면 그런 공동체의 연합된 노력을 주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물론 일방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없이도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그는 그렇게 역사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는 거의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란 요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히11:6을 기억하십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 보면 병자를 고치실 때마다 거의 언제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최근 암으로 고생하시는 우리 교회 교우님 댁을 심방했는데 그분이 제 예상과 달리 기분이 좋으신 상태이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시냐고 물었더니 방금 얼마 전에 권사님 한 분이 먼저 심방을 오셨는데 그 분을 통해서 복음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복음입니까? 물었더니 그 권사님이 아는 다른 성도분이 암을 앓게 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하나님, 하나님은 <암>도 고치실수 있으시지요?”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대답하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암!>하시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나아오는 자들을 주께서 구원하시고 고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대부분의 경우(물론 육체의 치유대신 그 영혼만을 치유하시고 부르시는 일도 적지 않게 있지만) 이런 믿음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귀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내게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종종 본문의 중풍병자들의 친구가 단 한 사람 뿐이었다면 그들이 과연 주께 나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네 명의 <함께 함>-이것이 그들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믿고, 함께 행동하게 한 힘이 아니었는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주께서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 그것이 홀로 만의 기도가 아닌 공동체의 기도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우리는 함께 우리 아버지 앞에 나아와 우리의 기도를 함께 키우고 우리의 믿음을 함께 키우고 그리고 우리는 함께 인생의 질병과 역경을 극복하는 승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의 공동체가 경험하는 삶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번 구정에도 이런 <함께 함>의 즐거움과 능력, 그리고 우리 중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구원과 치유의 은총을 함께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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