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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창 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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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창 40:1~23)

 
상처의 위험은 그 상처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감염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큰 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주로 사람에게 받는 것인데 그 자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지만 여러 사람을 불신하게 된다든가 또 사람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 하나님을 불신하게 만든다든가 이런 식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처도 치유를 받아야 되는데 어떻게 치유를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여기에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위로로 상처를 고침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치유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병도 고쳐주십니다. ‘내게 성령을 부으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짐으로써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쉽게 상처를 받는 이유는 그의 생각이 유아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면이 많을수록 상처를 더 쉽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를 그렇게 위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엄마들이 하는 말이 너도 엄마가 돼보면 엄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남의 입장이 돼 보면 남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어렸을 때는 아픔이 되었던 것들이 생각이 성숙해지면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신원해 주심으로 우리가 치유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원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편을 들어주시고 우리의 한을 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가장 위대한 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하나님이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이 옳다는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한이 없고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상처가 없고 그 모든 것이 영광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신원하셔서 우리를 높여주실 때 그 일을 통해서 과거에 갖고 있었던 모든 아픔이 사라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임금이 되니까 과거에 도망자로 쫓겨 다닐 때의 상처가 다 사라졌고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까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아픔이 사라진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을 성경에서 꼽으라면 요셉처럼 상처받은 사람이 없어요. 요셉은 먼저 자기 가족에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형들에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처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애굽에 종으로 팔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인신매매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옷에 피를 묻혀서 아빠에게 갖다 주고 짐승이 잡아갔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도 이와 같은 불의함과 죄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요셉이 자기의 섬기던 주인에게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아내가 요셉을 자꾸 유혹하려고 했는데 하루는 요셉이 집안에 들어가서 일을 보고 있는데 그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그의 옷을 붙잡고 동침하자고 했습니다. 요셉은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갔는데 그 여자가 마음에 독기를 품고 저 히브리 종이 나를 욕보이려고 하다가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도망갔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음란한 마음에서 비롯되니까 자기를 거절한 요셉에 대해서 독기를 품고 그에게 악의로 누명을 씌운 것이지요. 이제 요셉은 변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노예이고 보디발의 아내는 주인의 아내고 누가 요셉의 말을 믿어주겠습니까.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됐는데 감옥에 갇힌 것도 억울하지만 나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사실은 더 억울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에게 요셉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남자라는 인상을 주었는데 이제 사람들이 그를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저 사람도 별수 없구나, 저 사람도 위선자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이 아픈 일입니까. 정말로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 괴로움을 극복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요셉은 자기가 도와준 사람에게 상처를 입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있는 감옥에 갇혀있던 술장관입니다. 술장관이라 함은 바로의 상에 올라가는 포도주를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상품이 올라가도록 하고 또 누가 독을 넣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바로의 신임을 받던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들어오게 됐는데 술장관과 떡장관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은 날 꿈을 꾸었어요. 몽조가 다르더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복직이 되는 꿈이고 한 사람의 꿈은 죽는 꿈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꿈을 해석해주었는데 요셉의 해석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술장관은 복직이 되고 떡장관은 생명을 잃게 됐습니다. 술장관이 출옥할 때 요셉이 그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그런데 우물에 올 때 다르고 갈 때 다르다는 말처럼 술장관이 복직을 하고 나니까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술장관이 사람이 나빠서 요셉을 잊어버린 게 아니에요. 원래 인간은 그런 것입니다. 자기 사정이 급할 때와 자기 사정이 좋을 때 남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위대한 게츠비, 이 베스트셀러가 영화가 되었지요. 이 위대한 게츠비를 보면 끝부분에 주인공이 등장인물들을 향해서 ‘you are so careless’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careless라는 말은 무심하다, 경솔하다, 남의 일에 개의치 않다, 라는 말이에요. 그것이 주인공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비판입니다. 

아마도 저자 스캇 피츠제랄드가 현대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최대의 비판이 바로 그것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careless-무심하다는, 남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경솔하고 남의 입장에 개의치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 이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무심하고 남에 대해서 무심하고 그들의 입장에 대해서 개의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해 보았자 소용없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장관이 자기가 다급할 때 요셉의 도움을 받은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요셉의 형편을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요셉이 14절에 술장관에게 한 말을 들어보면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라고 말했는데 사람이 우리를 생각하고 사람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기대하면 반드시 실망하는 날이 옵니다. 누가 우리를 생각해주셔야 되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 되는데 우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사람은 조석으로 바뀌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를 잊어버리고 무관심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만 읽어서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다음 장을 읽어보면 2년이 지난 다음에 바로가 밤에 심상치 않은 꿈을 꿉니다. 그것이 바로의 유명한 꿈입니다. 그래서 그 꿈의 의미를 알기 위하여 애굽의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 모으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어요. 

그때 술장관이 비로소 요셉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하면서 바로에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히브리 청년이 내 꿈을 해석해 주었다 그 청년이면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요셉을 천거해서 2년 만에 요셉이 감옥에서 나와서 바로 앞에 서게 되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바로가 그를 좋게 여겨서 애굽의 총리대신을 삼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타이밍과 사람의 타이밍이 다르다는 사실이에요. 만일 요셉이 원하는 시간에 도움을 받았더라면 감옥에서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바로 앞에 서지 못했을 것이고 애굽을 흉년에서 건지지 못했을 것이고 자기의 가족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자기의 가족을 기근에서 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술장관이 요셉을 기억해주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술장관이 요셉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더 적절한 때에 요셉이 바로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타이밍과 하나님의 타이밍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인간의 타이밍보다 더 늦어 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더 정확하고 더 옳습니다. 그걸 믿어야 됩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남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요셉 자신에게도 꿈이 있었어요. 어렸을 때 가졌던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은 본인은 잘 알지 못했지만 들에 형들의 볏단이 있는데 그 볏단이 전부 다 자기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는 꿈, 또 하늘의 열한별과 해와 달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사람들은 그 꿈 얘기를 싫어했습니다. 형들이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장차 자기들보다 높아질 것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요셉이 먼저 남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었더니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술장관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 다음에는 바로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그랬더니 자기의 꿈을 이루는 날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 아마 이런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내가 뼈 빠지게 일해 봤자 결국 남 좋으라고 수고하는 것인데 내게 무슨 소득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고 ‘내가 남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면 내 꿈을 이루는 날도 올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처음부터 자기의 꿈을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도 사울왕 밑에서 사울 왕을 섬기는 법을 배우고 낮아지는 법을 배우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겸손함을 배우고 온유함을 배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모세도 자신의 혈기만으로 자기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의 혈기로 오히려 사람을 죽게 만들고 실패하고 결국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사십년 광야에서 자기의 혈기를 죽이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그리고 나이 팔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평생 꿈꾸던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능력을 주었더라도, 은사를 주시고 재능을 주셨더라도 그것을 가지고 먼저 남들을 섬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남들을 도우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돕는 일을 할 때 내 재능이 더 빛이 나고 내 은사가 더 잘 역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내 목적을, 내 소원을 이루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 득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고 남을 섬기기 위한 것이고 남을 돕기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노라면 그 은사가 우리를 위해서도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날이 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원하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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