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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시각 (마 2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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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시각 (마 24:3~14)

  
우리 몸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신체기관이 없습니다만 특히 눈이 중요합니다.  속담에 ‘몸이 
천냥이면 눈이 구백냥’이란 말이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그래서 생긴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모
든 것은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뭔가를 계속 보기 원하는 인간의 노력이 오늘날 현대 과학의 기틀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 ‘망원경(telescope)’을 발명했습니
망원경은 천문학과 우주연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609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우주세계를 관찰하
게 되었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망원경과는 반대로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인간은 ‘현미경(microscope)’을 만들어 냈
습니다.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생물이나, 먼지까지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
다.  현미경의 발명으로 의학은 획기적인 발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장애물에 가
리면 볼 수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빛은 직진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향을 자유자재로 꺾어서 
요리조리 구석구석 볼 수 있는 길을 연구하다가 드디어 인간은 ‘잠만경(periscope)’을 만들었습니다.  

잠만경의 기원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큼직한 종(鐘) 모양의 배를 물에 넣고 바다 속을 엿본 것이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잠망경을 달고 물속에서 밖을 자유롭게 관찰하여 해양산업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끊임없이 발전하더니 드디어 이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는 ’
내시경(endoscope)‘을 발명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내시경으로 이제 우리 몸의 구조와 형태변화를 정확하게 측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내시경은 입이나 코나 귀의 속을 관찰했는데 이제는 오장육부 어디나 쉽게 도달하는 의료용으로 발전했습니다.  X레이가 직선관찰만이 가능한데 비해 내시경은 잠망경처럼 요소요소 곳곳을 원하는 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혹 테러범이 장악한 공간도 틈만 있으면 안을 훤히 들여다봅니다.  포장한 물건의 속을 살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안 보이는 곳이 없고, 숨길수가 없습니다.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먼 것이나 가까운 것이나, 구부러진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모두를 보는 시대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안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시각
입니다.  신앙은 눈이요, 보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마음을 보고, 성경을 보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보고, 또한 천국도 봅니다.  믿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많이 보고, 더 깊이 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필요합니다.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지금 많이 보는 것이 바로 ‘재난’입니다.  남미의 작은 나라 아이티에 강타한 지진
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작년 한해만 해도 세계 곳곳에는 처처에 기근과 지
진과 천재지변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재난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특히 믿는 자에게 있어서 재난을 바라보는 믿음의 시각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적어도 3가지 
시각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자연의 몸부림입니다. 

금번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참사를 보통 자연재해라고 합니다.  자연재해에는 지진만이 아니라 홍수, 가뭄, 해일, 태풍, 우박, 화산폭발, 산사태 등이 있습니다.  왜 이런 자연재해가 일어나는 것일까요?  지질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땅이 심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자신의 판 조각을 움직임으로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합니다.  땅이 스트레스를 받아 몸부림치는 것이 지진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같
은 생명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증오가 파괴적인 결과를 갖고 오듯이, 자연의 스트레스가 분노로 표현되는 것이 자연재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불편함이 이런 현상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연이 이처럼 몸부림을 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연의 질서와 순리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할 때 자연의 순리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질서를 따라갈 때 건강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대 문명이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주범을 학자들은 ‘지구의 온난화’라고 말합니다.  지구의 온난화는 지구 표면의 평균 온도가 높아져서 지구가 점점 따뜻해지고, 그로 인해 이상 기후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지구의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그래서 곳곳에 기후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금년 겨울에 한국도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를 겪었는데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한 지구의 온난화로 고온현상이 계속되면서 지구가 점점 사막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집니다.  이것으로 땅이 몸살을 앓습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재해의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연에 필요한 것은 온난화를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은 바로 이산화탄소입니다.  따라서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해결 방법입니다.  이산화탄소는 주로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태울 때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자동차에 쓰이는 연료와 배기가스도 줄여야 합니다.  나무를 심고, 녹색환경을 보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구의 온난화를 막습니다.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나라들이 자연보호를 외치고, 저탄소 녹색성장을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에서입니다.  

이처럼 자연의 몸부림, 스트레스, 분노가 바로 자연재해의 원인이기에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의 순리, 자
연의 질서를 따라가야 인류대재앙의 고통을 막을 수 있습니다.  아이티의 지진과 곳곳에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보면서 우리는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보호와 창조질서를 작은 것부터 
실천해가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재해의 피해를 줄이는 길입니다.

둘째는 도움의 손길입니다.  

신명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5:11)  이것이 시대를 막론한 하나님의 진단이고, 세상의 이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 힘든 자, 어려운 자, 곤란한 자, 궁핍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가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은  손을 펼쳐야 합니다.  다시 말해 힘껏 도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통해 그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제사장도 그냥 지나쳤고, 레위인도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나귀에 태웠고,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정성껏 돌보아 주었고, 주인에게 부탁하며 자리를 떠났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알던 바리새인을 지적하면서 누가 강도만난자의 참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을 알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너희도 가서 똑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까운 곳이나 먼 곳이나 강도만난 이웃이 있습니다.  뜻밖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진으로 고통 받는 아이티와 같은 현장이 있고, 자연재해로 망연자실하며 목 놓아 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정성을 모아 그들을 힘껏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의 삶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살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은 시대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움의 손길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신약성경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극심한 기간과 가뭄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소식을 그가 세운 여러 교회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교회들이 정성을 다해 구제헌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극심한 가난과 교회에 대한 핍박과 고난으로 그들도 시련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교회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은 자원하여 헌금에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칭찬하였고, 다른 성도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모든 헌금을 모아 직접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였습니다.  

보통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구제’라고 합니다.  사회에서는 기부라고 하지만 우리는 구제라고 말합니다.  구제와 기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주님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이것이 주님이 가르치는 참 구제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나팔을 불지 말고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조용히 하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진정한 신앙의 동기와 순수함과 겸손이 있어야 함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진실함으로, 겸손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신앙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남을 돕고,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온정의 손길을 뻗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이런 믿음의 시각으로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종말의 징조입니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보는 시각이 자연의 몸부림으로 보고, 도움의 손길로 보는 시각을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믿는 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도 보는 시각이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이젠 믿음의 시각으로 재난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는 재난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종말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알려줍니다.  본문은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감람산에 계실 때 제자들이 종말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음을 강조하면서,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바로 종말의 여러 징조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 6-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여기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 지금까지 기근과 지진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나라마다 전쟁도 쉬지 않았습니다.  난리와 난리가 계속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역사는 흘러왔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는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자연재해와 기이한 현상들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마지막을 생각해야 합니다.  점점 종말이 다가옴을 믿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믿는 자가 보는 재난의 시각입니다.  재난은 단순한 재난이 아닙니다.  그 내면에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에 뜻이 있고, 모든 자연의 움직임에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하면서까지 그것을 허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때임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징조와 사인을 보내 종말이 점점 다가옴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세상이 밉고, 하늘이 야속할 뿐입니다.  환경을 원망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더 큰 믿음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끝이 오고 있음을 알고, 성경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종말의 징조에 대해 주님은 재난을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더 내면적인 징조를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3:1-5)  한 말씀 한 말씀 얼마나 우리의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기 징조대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너무도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모두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이티의 사람들처럼 지진으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더라도 훨씬 더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서 느끼는 징조들입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더 아픈 내면의 고통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지독하게 자기만 알고, 자기만 옳고, 자기를 철저히 보호하고,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비방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모함하고, 배신하고, 자만하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무엇보다 경건의 모양은 있어서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입니다.  사탄이 더욱 드세게 사람들 사이에서 몹시 흔들고 혼란하게 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것을 알고, 종말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그것까지도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본문으로 읽은 마태복음 24장은 전체가 종말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25장에서 주님은 종말을 사는 성도의 삶을 3가지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3가지 비유는 열처녀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깨어있으라, 충성하라, 그리고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해야 합니다.  또한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맡겨진 모든 삶에 충실하고, 교회에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선을 추구하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선을 행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고, 악을 즐기고, 좋아합니다.  이런 연약한 우리를 돌아보며, 이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주간도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깨닫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바른 길로 다시 가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나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아이티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미국에 사는 어떤 부부는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딸에 대한 걱정으로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딸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문자메시지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I am OK, 나는 무사해요'라는 말입니다.  이 문자를 받은 부모는 이제 아이티에서 OK의 소식이 오기를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OK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난을 보는 믿음의 시각을 갖고 오늘을 사는 우리 삶에도 이 말이 들려오기를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I am OK, 나는 무사합니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열심히 삽니다, 나는 깨어 있습니다, 나는 충실하고, 나는 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래야 합니다.  모든 것에서 ’I am OK‘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한주간도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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