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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안수하시매 (막 8: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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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수하시매 (막 8:22~35) 


서론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나가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어떤 사람은 엘리야, 어떤 사람은 선지자라고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더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질문을 중간고사 성격의 질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이적을 보여준 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정답을 말하였습니다. 

Ⅰ. 2천 년 전 베드로의 고백과 21세기 우리의 고백 

1.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 

여러분께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대화에 담겨진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27절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빌립보 가이사랴(예전 개역 성경에서의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갈 때 하셨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중 한 곳으로 헬몬산(지금의 골란고원)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만년설이 덮여 있었으며 아래로는 폭포와 샘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로마가 차지하고 있던 이곳을 헤롯 대제 때 이스라엘에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헤롯 대제는 도시 한복판에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후 그 아들 헤롯 빌립이 왕이 되고 나서는 그 곳에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우게 됩니다. 또한 로마 황제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로마 황제의 명칭인 가이사랴와 자신의 이름 빌립보를 붙여서 빌립보 가아사랴라고 불렀습니다. 

이 도시는 갈릴리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심장부에는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었으며 로마인이 자랑했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웅장한 석재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건설했고 수많은 조각상을 세웠습니다. 또한 그곳의 사람들은 보통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화려한 의복으로 치장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상을 제패하고 있던 로마 황제의 신전이 있어서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던, 황제의 도시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황제의 도시 한복판에서 초라한 예수님을 향해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에 담겨진 의미는 이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였던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에 의한 평화를 이야기했던 로마 황제가 더 이상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권력과 군사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자신의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있었던 로마 황제가 구원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나사렛 예수 당신이 인간을 위한 구원자요 하나님이시라고 베드로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이 고백이 21세기,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된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우리 성도님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돈과 권력과 과학, 지식이 우리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어떤 탁월한 지도자도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만이 인간을 위한 유일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2. 베드로에 주신 세 가지 말씀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하시면서 베드로에게 3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게 계시는 내 아버지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세우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이 지식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 세상에는 2가지 빛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인 빛이 있고, 또 하나는 초자연적인 빛입니다. 자연적인 빛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 속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이 빛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가 있습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지식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주십니다.” 

두 번째로는 이 믿음의 반석 위에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이 믿음의 고백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의 기초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속에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님들의 삶이 세워지면 반석이 되어서 어떤 어둠의 세력도 결코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열쇠는 자기만 들어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의 고백이 성도님들의 고백이 되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놀라운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Ⅱ.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방법과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방법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신 후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31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은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중간고사 성격의 베드로와 제자들의 고백을 받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세상을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실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 황제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을 주시겠다고 예수님께서는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인간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난, 질병, 무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에덴동산을 주시면서 건강,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부패했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요하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떠납니다. 힘들고 절망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무리 책망을 하고 채찍질을 해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은 교육도, 기적도, 부자가 되는 것도, 탁월한 지식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셨을 때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로 하여금 인간의 모든 죄와 연약함과 모순을 대신 짊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5~6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제 길로 가는 것(self-insistence, 자기 주장)’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장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포함한 세상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내 것으로 취하기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 첫 번째 조건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성도님 한 분도 예외없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분이 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구원과 풍성한 삶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Ⅲ. 참된 제자의 삶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항변(rebuke, 꾸중)을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돌아서셔서 제자들을 보시면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보시고 3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말씀은 암송하셔야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참된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야망에 지배되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용하고 사람들을 이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복된 삶을 위해서 예수님처럼 그들의 연약함을 대신 지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를 거의 공황상태에 빠뜨렸습니다. 또한 저에게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모태신앙이었고, 저는 예수님을 저의 성공적인 삶을 도와주는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물리학과에 들어가게 되었고 저의 꿈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노벨상을 받으면서 “이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말하면 에녹처럼 천국에 바로 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의 삶은 좋은 대학을 가고 노벨상을 받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또한 비판에 관해서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비판을 통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의 이 두 생각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산산이 조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때까지 믿고 신앙생활을 했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성공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를 비판을 통해 일깨우라고 말씀하시는 대신에 자기 십자가를 져라, 그들의 연약함을 네가 대신 감당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나서 저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달라지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깨닫고 난 후에 저는 더 이상 제 야망을 위해서 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그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면 과거에 맛보지 못했던 기쁨을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닐 때 결혼하기 전까지 7년 동안 남자 8명이서 자취,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기 부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집에 가면 언제나 설거지, 빨래거리가 쌓여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저는 그들을 위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어서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다보면 억울한 생각도 들고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우리가 같이 살면서 다른 사람이 부족해도 그것을 품어주고 그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어서 섬기고 희생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대신 담당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이다.’라는 사실은 정말 저의 삶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제가 사역을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저의 전공은 물리학과였지만 신학을 하게 된 것은 제가 섬겼던 내수동교회 대학부의 전통이 선배가 대학부의 전도사가 되는 것이어서 였습니다. 대학부를 섬겼던 대학부 전도사님이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되어서 11월 어느 날 저를 찾아오셔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신학생이 없다. 유일한 길은 네가 신학교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그 공동체에 다음 사역자가 나올 때까지 연결시켜줘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저의 모든 삶을 한순간에 바꾸게 되어 신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대학부 사역을 마친 후에도 좋은 교회에 가기 보다는 조금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난지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난지도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난지도를 나오게 되었고 유학과 좋은 교회에 갈지 고민을 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대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중고등부를 다녔던 대구의 교회 후배들을 보니, 그들보다 신앙이 안 좋았던 저도 대학 가서 좋은 믿음의 선배들, 지도자를 만나서 제 삶을 주님 안에서 준비하게 되었는데 저보다 비교도 할 수 없게 신앙이 좋았던 제 후배들은 다 방황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를 대구로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세상적으로 잘 나가는 청년들을 섬기다가 난지도에서 험한 애들을 섬기고, 또 우리교회 청년부를 섬기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많은 기도를 하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이들을 비판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연약함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난지도에서, 그리고 처음 청년들을 섬기면서 혼자 많이 불렀던 찬양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이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하나님! 저들 가운데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이시라’ 주님은 저들을 바꾸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 기뻐하시며 너무 사랑하시고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 마음이 이 찬양을 부르면서 새롭게 확인되어졌습니다. 

저는 오늘 나누었던 이 말씀을 순종하면서 세상 사람들, 자신의 야망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결단코 맛볼 수 없는 하늘에 속한 기쁨, 감격, 깨달음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참된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세상적인 면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대신 지고 희생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 또 한 번의 안수와 또 한 번의 변화 

오늘 본문 앞부분에 또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8장 2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안수를 하셨습니다. 안수하신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맹인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을 듣고 그 눈에다가 다시 안수를 하셨고 맹인은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4복음서에도 예수님이 한 사람을 고치는데 2번 안수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안수 한 번, 말씀 한 마디에 어떤 질병에서도, 어떤 더러운 귀신 가운데서도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에는 왜 예수님이 2번 안수를 하셨겠습니까? 이 사건은 4복음서 가운데 마가만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벳새다 광야에서 한 소경을 2번 안수하셔서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은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맹인이 밝히 보기 위해서 또 한 번의 안수가 필요했듯이 예수님을 향해 신앙고백을 하는 제자들에게도 또 한 번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님들의 삶 속에 또 한 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길 원합니다. 이 한 번의 변화는 병 낫거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나를 위한 예수님으로 믿어 왔습니다. 나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내가 되는 그런 변화가 되길 원합니다. 

한국 교회가 왜 세상 속에서 비판을 받겠습니까?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자신의 성공,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것도 귀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참된 제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의 야망과 행복, 성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섬겨야 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두가 돈과 권력과 쾌락을 쫓아 살아가는 이 도시 한복판에서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대신 담당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셔서 남도 살고 나도 사게 되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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