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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 사역의 열매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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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사역의 열매 (갈 5:22~23)

 
1월 한 달 동안 성령님의 사역 특징에 대해 여러 가지 은혜를 나눴는데 오늘은 마지막으로 성령 사역의 열매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지 겉모습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영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남의 신앙에 대해서 섣불리 평가할 능력이 못됩니다. 성품이 좋다고 신앙이 좋은 것도 아니고 성품이 거칠다고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해서 평가할 때 두 가지 방법은 거의 정확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 고백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수없이 많은 신앙 고백적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신에게 실망적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죄악 중에 출생했으며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여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입니다. 이 모든 죄를 지워주소서.” 신앙 고백적 기록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 결백적 주장도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펴보소서. 나는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였고 순전히 행하였나이다.” 죄를 짓지 않았다는 고백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평가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로소이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 다음에 남의 신앙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은 주께서 한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16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그 사람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생활을 알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신앙의 단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크게 나누면 세 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유아기 단계입니다. 이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구하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람도 있고, 교회 잘 안 나오면 찾아와 주는 사람도 있고, 마음이 상했을 때 위로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자랍니다. 그 다음 단계는 청년기 단계가 되는데 내 문제는 내가 책임지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이 좀 자라면 치유적 능력이 생겨서 웬만한 시험 거리는 내가 충분히 해결하고 치유적 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회복하고 고난을 당해도 신앙이 흔들릴 만큼 영향을 받지 않고 잘 견디며 처리해 가는 신앙이 됩니다. 

마지막 단계는 성숙 단계라고 합니다. 이때는 내 신앙은 문제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봉사적 삶을 살게 되고 이해와 양보 같은 너그러움도 실행하고 어떨 때는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 부분까지 감수하게 되는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인 성령의 열매 부분은 성숙 단계를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란 뭐냐?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에 필요한 사역의 종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또, 전도를 잘하는 사람은 전도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 봉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봉사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열심히 하잖아요? 선교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헌금 잘하는 교회도 많습니다. 물질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버린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성격에 차이점이 있는데 기독교는 절대 수양 종교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가 주워집니다.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비유를 여러분이 생각해 보십시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이 준 것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그대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책망을 아주 심하게 받았습니다. 기독교의 성격은 받은 자는 주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되는대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 내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평생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성령님이 나를 위해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도 나와 있듯이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셔서 신앙 생활하는데 약한 부분을 성령님이 날마다 채워주시고 나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성령의 역할은 변호사 역할입니다. 

나의 모든 잘못된 점을 변호해서 나를 정상적 역할로 만들어주는 일을, 협력해주는 일을 성령님이 하심으로 나를 도와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사역을 나를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어떤 때는 기도도 안하잖아요? 그러면 성령님이 탄식하신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너는 기도도 하지 않느냐?”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성령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냥 내버려 두시나요?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겠다.” 

나는 기도 안했는데도 하나님 백성의 유지는 성령님이 나를 위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를 대신 드려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는 성령을 제발 근심되게 하지 말고 탄식하게 만들지 말라.” 이 말이 있는 겁니다. 어떤 때 우리는 기도를 잘못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님이 “너 그렇게 기도하면 어떡하느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기도한 것을 수정해서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을 향하여 공갈 협박적 기도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그것을 다 알고 나를 살피고 그 기도가 훌륭하게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도록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성령님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님이 곧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2장 11~13절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것이 성령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나의 영의 만남을 통한 교통이 하나님의 역사를 할 수 있게끔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필요한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역할을 하는데 사도행전에 구체적으로 많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제일 뚜렷한 일이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뭐든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는 것을 나도 똑같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로 보면 하나님이 교회를 참 사랑하십니다. 이 땅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주님이 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교회를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기업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들은 주님과 똑같이 이 땅에 인간 구원을 위해 가장 축복받은 공동체인 교회가 잘 되도록 온갖 노력을 하게 되고, 나 때문에 교회가 훌륭하게 되도록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을 평생 해서 오늘 이 세상에 교회들이 많아진 겁니다. 이러한 교회관이 정립된 사람이 세상에 교회를 많이 세우게 되는데 미국의 록펠러와 카네기는 이 세상에서 교회 건축을 가장 많이 한 사람들인데 한 사람이 교회 건축을 5천개씩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사람들이 그 시대에서 제일 잘 살았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선교지에 교회 건축을 많이 하는데 교회 건축은 다 개인이 저를 찾아와서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헌금한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 일반 헌금을 가지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따로 다른 데 쓰지 않고 밀려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미처 해내지 못합니다. 이런 일은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열매로 다 되어지는 일입니다. 요즘에 서울에 있는 대표적인 한 대형 교회가 교인들이 너무 많이 늘어서 예배드릴 자리가 절대 부족함으로 새로 교회 건축을 한다고 발표를 했더니 여기저기서 반대 의사를 내고 그것 때문에 모임을 갖고 세미나도 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대표자들이 그것을 결정하고 30명이나 저를 찾아왔습니다. 우리교회 전부 돌아보고 “목사님! 말씀으로라도 좀 협조해 주십시오.” 요청했습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교회 교인들이 자기들이 예배드릴 자리가 부족하여서 자기들이 헌금하여 자기들 예배드릴 교회를 건축한다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만약 그 교회가 정부에게 “우리가 이렇게 건축을 해야 하니까 국민들이 낸 세금을 좀 보조해 주십시오.” 이랬다든지 다른 교회들한테 도움을 요청했다면 그것은 안 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교회 자체 교인들이 결정하고 교인들이 해야 할 문제이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왜 왈가왈부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 교회가 필요 이상으로 베드로 성당이나 바실리 성당같이 사치한 건축을 무리하게 한다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필요를 채워주는 프로젝트는 절대 사치가 아닙니다. 우리교회도 옛날에 삼성동에 있었잖아요? 많이 모자라니까 여기 분당으로 나와서 이렇게 좋은 교회를 건축한 것 아닙니까? 만약 이 우리교회도 건물이 너무 낡고 교인들이 더 많아져서 도저히 수용 능력이 없어졌을 때는 헐고 다시 더 크게 지어야 되는 게 필요를 채워주는 프로젝트이지 그게 사치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온 세상을 다녀보니까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기독교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대한민국에 가면 어느 교회를 가보라.” 할 만한 건축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교회에 교인들이 제일 많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도 “대한민국 가면 그렇게 교인들이 많고 교회가 많은데 어느 교회를 가 봐라.” 저는 이렇게 역사성 있는 교회 건축물 예배당 하나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전도하는데 필요한 모든 사역은 성령님의 인도임을 영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입니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숨어있던 도망가던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더니 얼마나 권능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 제자들이 그 후에 뭐가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피면 금방 해답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 열매를 맺다가 칼에 맞아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도들이 새끼줄로 그를 묶어서 길바닥에서 하도 끌고 다녀서 피와 먼지투성이가 되어 길바닥에서 순교했습니다. 누가는 그리스에서 올리브 나무에 매달아서 순교 당했고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했고 야고보는 사람들이 성전 맨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밀어 던져서 추락사로 순교 당했고 안드레는 예수님과 똑같이 죽고 싶다고 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못 박혀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아픔을 참고 설교를 하다가 숨졌습니다. 맛디아와 바나바는 돌에 맞아서 순교했고, 바울은 도끼로 목을 쳤습니다. 

지금 로마 베드로 성당에 가보시면 그 안에 바돌로매가 자기 껍질을 들고 있는 큰 동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껍질을 벗기는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은 것입니다. 도마는 땅 끝까지 가기 위해서 인도에 가서 순교의 열매를 맺어서 지금도 인도는 기독교를 도마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게 다 뭡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결과적으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너 무슨 열매를 맺었니?” 내가 성령 충만하려면 “내가 맺는 열매는 뭔가?” 결과적으로는 여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님이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열매에 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여기에 목표를 두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2만 명 이상의 한국 선교사가 온 세상에 퍼져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수요 예배 때 이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저는 별 사람을 다 만나서 고생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에 매우 똑똑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사람은 앉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자기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모릅니다. 자랑할 만합니다. 

그 사람은 대한민국에서도 최고 인정을 받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했고 미국에 와서도 서부 지방에서 최고 좋은 학교에서 박사가 되었고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위치에 있는 대단한 인물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이 사람은 얼마나 잘난 체를 하는지 한국 사람과 이야기를 해도 절반은 영어로 합니다. 못 알아들으면 “아니, 당신 미국 사람에 살면서 그것도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살아?” 막 핀잔을 줍니다. 거기까지도 좋습니다. 

그런데 기회만 있으면 목사들 욕을 하고 망가뜨립니다. 목사에 대해서 험악하게 말합니다.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목사들은 사기꾼들이야. 그걸 몰라서 교회에 가서 돈을 내고…. 바보, 병신들 같으니라고….”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저것들 할 게 없으니까 미국에 와서 영어도 못하니까 목사질이나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또 뭐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기독교 진리의 허구성에 대해서 나와 공개 토론할 목사 나와라.” 이 사람은 기독교, 불교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도 좋고 시청의 공공장소 빌려도 좋고 누구든지 광고해서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다 오라고 해서 그 많은 자리에서 나와 마주 앉아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토론할 목사 나와라.” 

여러분, 이 문제는 고린도서에 이미 바울이 헬라 철학을 자랑하는 고린도에서 이미 지나간 것 아닙니까? “어리석은 변론을 하지 말라.” 바울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 그것을 누가 나가겠습니까? 아무도 안 나가고 아무 목사도 안하지요. “이거 봐라. 저 사람들 뒤가 다 꿀리니까 못 나오지 않느냐? 내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느냐?” 얼마나 잘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거기다 토를 붙입니다. “이 지역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와 토론 하자.” 그게 접니다. “나와라! 당신이 전하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자신 있으면 공개 토론하자는데 왜 못하냐?” 막 이러면서 소문내고 교인들은 와서 “목사님!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물어보고 그러니까 목사들은 그 사람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은근히 신경을 씁니다. 어떻게든 목사와 맞붙어서 뭘 한번 해보려고 자꾸 기회를 보려는 이런 사람이 하나 있어서 목사들이 고난을 겪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목사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우리가 놀리는 겁니다. “여보시오, 사기꾼! 뭐 해먹고 살게 없으면서 영어도 잘하면서 목사하십니까?” 잘못했다고 죽을 지경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설교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여러분! 저를 아시지요? 내가 누굽니까? 이 지역에서 제일 잘났다고 날마다 기독교 비판하고 목사들 까부수던 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목사가 되었겠습니까? 성령의 초능력적 사건을 제가 체험했습니다. 나 과거에 죄 많던 사람입니다.” 지금 그러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에게 최대 원수 역할을 하던 사울을 길바닥에서 때려잡아 거꾸러뜨려서 바울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훌륭한 성령님의 열매인가를 우리가 평가해 볼 때 2천년 기독교 역사의 흐름을 한번 조명해 보면 도움이 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3백 년 동안은 핍박 시대였습니다. 그 핍박 시대 중심에 누가 섰느냐? 로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로마 군병들이 못 박았잖아요? 그 후로 계속해서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313년에 기독교 박해 금지를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밀라노 칙령이라고 말합니다. 밀라노에서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붙은 겁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완전히 자유와 해방입니다. 로마의 박해를 받다가 로마의 후원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권력과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통해서 기독교의 복음은 삽시간에 유럽으로 퍼져갑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이 완전히 복음화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서 기독교 전성기가 되었습니다. 유럽을 다 장악해 버려서 서구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까 새로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독교 자체가 권력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가 예산 50퍼센트가 다 교회 재산입니다.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까지 교회가 다 조절합니다. 

왕 되는 사람은 교회의 인가를 얻지 못하면 왕이 못됩니다. 여러분! 파리 미술관을 가보세요. 나폴레옹이 황제 즉위식 할 때도 성직자가 왕관을 갖다 씌어주어야 왕이 되는 건데 아무도 안 씌어줍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자기가 자기 손으로 가서 왕관을 뒤집어쓰고 왕이 되고 그것을 벗어서 다시 자기 아내 조세핀에게 씌어줌으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따라온 불행이 온 유럽 사회에 교회의 권력이 엄청나게 커지니까 교회가 부패했습니다. 부패 일변도의 길을 가게 되니까 민초들이 “교회가 이게 뭐야?” 그래서 러시아에서부터 혁명이 일어나서 막 뒤집어집니다. 

그 다음 단계는 종교개혁 시대입니다. “부패한 종교를 바로 세우자.” 이렇게 되니까 교회끼리 싸우게 되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충돌이 사람을 서로 죽이는 불행의 역사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서구사회에 가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동상 문화가 길거리에도 많습니다. 사람을 목을 밟고 창을 목에다 대고 있는 동상입니다. 그 밟힌 사람이 개신교 신자입니다. 구교가 신교를 핍박하는 겁니다. “마귀 새끼는 죽여 버려야 한다.” 종교 개혁 이후에 이러한 일이 벌어져서 교회끼리 싸우는 역사를 오랫동안 하고, 서로 원수시 하는 불행한 역사를 교회가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기독교를 핍박하는 국가가 존재하지만 세계적 추세는 뚜렷한 핍박도, 뚜렷한 교회 권세도 없습니다. 한국과 같은 나라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세상 문화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아무 권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핍박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가장 바람직한 위치로 정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시대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대에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에 교회의 본질적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본질적 사명에만 충실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공동체로서 뚜렷한 네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 교육, 선교, 친교입니다. 이 네 가지 기능을 훌륭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해나가면 훌륭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가 되는가? 역사를 보면 교회는 예수님 시대부터 끊임없이 언제나 문제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했던 지도급을 분석해보면 우리의 갈 길이 보입니다. 

복음서에 반응된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가장 큰 마찰을 가져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 특공대입니다. 율법을 위해서 살고 죽습니다. 절대로 율법을 어기지 않습니다. 율법이 하라는 그대로 하면서 사는 신앙 특공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이 사람들의 율법 해석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자기들 교리에 맞춰서 하나님을 가둬놓고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일종의 도그마티즘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이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닌 것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느냐?” 그래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을 끌고 가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표시로 죽여 버렸잖아요? 사두개 종교인들은 세속주의에 빠진 종교인들입니다. 본질을 다 흐리게 해버렸습니다. 부활도 부인하고 천사도 없으며 영도 다 부인해 버립니다. 사두개인도 예수님이 다 부정해 버렸습니다. 제사장들은 권위주의에 빠졌습니다. 권위로 진리를 가리고 있는 종교지도자입니다. 

중세기 종교 개혁은 같은 이유에서 일어났습니다. 서기관들은 성서학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지식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다 부정해 버렸습니다. “그 알고 있는 지식이 뭐하는 거냐?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열매가 없다.” 빌라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현실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자기 입으로 몇 번씩 말하면서 죄가 없으면 무죄 석방이라고 말하면 되는데 자기 입으로 죄가 없는 사람을 현실적으로 민중들이 데모를 하니까 “그러면 할 수 없다. 죽여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성령의 열매가 교과서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9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1호 목록입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삶은 사랑을 기초로 살라.” 희락은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시게 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큰마음입니다. 양선은 최고의 선을 향하는 목표입니다. 충성은 옳은 일에 대한 결단입니다. 온유는 거칠고 사나운 것의 반대입니다. 절제는 규모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런 것을 가지고 살라.” 

그러면 오늘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 마음의 방향을 정하고 성령 충만의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좋은 삶의 철학을 방향 제시해 주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미완성 단계의 자기 모습의 발견입니다. 내가 열심히는 살고 있지만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나는 앞에 있는 저 푯대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 푯대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저 목표를 정해놓고 있는 힘을 다해서 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완성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미완성 존재가 곧 나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죄 많은 부족한 존재이지만 한 가지 의가 있는데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열심히 목표를 정하고 가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 자녀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울의 방향 제시를 우리가 본 것입니다. 

완성 존재가 되지 못한 것에 실망할 필요가 없고 더 거룩해 지지 못한 부족감에 대한 좌절도 하지 말고 이만하면 나는 성령의 열매자로서 넉넉하다고 자만하지도 말고 오직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요 부족한 것이 많지만 그러나 이 하나는 분명합니다.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며 열심히 방향을 바꾸지 아니하고 좇아가고 있는 불완전한 미완성 단계의 하나님 자녀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 한 달 동안 우리가 살펴본 성령 사역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생각하면서 성령의 열매가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는 끊임없이 저희들의 영 가운데 임재하사 어떤 일보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기능인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발걸음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직은 미완성자이지만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정하고 오늘도 그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가는 순례자임을 고백하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매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도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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