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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낮아지게 하소서 (막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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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지게 하소서 (막 11:1~11)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보다나은 자리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누가 나를 끝자리나 구석 자리로 자리 배치를 한다고 해도 보통은 그냥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출세라도 한다고 치면 예전의 자기와 같은 사람을 더 우습게 여기고 무시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고귀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듯싶습니다. 그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데 더 익숙합니다. 그렇기에 하루아침에 신세가 뒤바뀌기라도 할 것 같으면 견뎌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받던 아들에서 형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이윽고는 노예로 팔려갔던 요셉은 처음에는 형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울부짖었지만 애굽으로 팔려간 다음부터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낮고 천한 자리에 서서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노예로서의 밑바닥 생활도 그리고 다시금 감옥에까지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도 결코 자기 신세를 비관하지도 한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당시 온 세계를 구원할 자로 높이 세우신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고백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형들에 앞서 이 나라로 보내신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모든 영광 하나님께 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나의 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지금까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몇 차례 올라오셨지만 짐승을 타고 올라가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탈 것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이왕 짐승에 올라타고 갈 것 같으면 보다 멀리서부터 짐승을 구해서 타고 오셔도 될 것 같은데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화려하고 번화한 곳에서 짐승을 구한 것도 아닙니다. 감람 산 뒤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하면서 제자 둘을 보내십니다. 

한데 벳바게나 베다니 마을은 전형적인 서민촌입니다. 부자들이나 고관들은 주로 예루살렘 성 안에 삽니다. 한데 예루살렘 성 동쪽의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위치한 감람 산 그것도 예루살렘 쪽을 향한 곳이 아닌 반대편 쪽에 위치한 마을이 벳바게와 베다니입니다. 그런 서민들이 주로 모여 사는 마을로 제자들을 보내 짐승을 구해오도록 하는데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를 구해오라고 합니다. 이왕이면 있는 사람들이 타는 말을 구한다거나 아니면 서민들이 애용하는 나귀라고 해도 다 자란 나귀를 타는 것이 정상일 텐데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그 주인에게 빌리는 것입니다. 

아니 이왕 빌릴 것 같으면 다 자란 나기를 빌리지 어째서 아무도 타보지 않는 나귀 새끼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낮아지시고자 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친히 가난하게 되신 이유를 부름 받은 자녀들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높고 화려한 하늘 보좌로부터 이 땅의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무런 모습도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로부터건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어라.”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면 높은 자리에 앉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사람이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될 거다. 그러니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고 하시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네 마음이 그 누구라도 섬김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누가 나를 섬겨준다면 얼마나 마음이 흐뭇합니까? 근데 막상 내가 그렇게 섬기는 데는 서툽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자식들을 오냐 오냐 하고 키우다보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찾아보기조차 힘든 그런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즘은 자기 피아르 시대 아닙니까?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류 심사와 더불어 마지막 면접을 꼭 하게 되는데 그 면접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피아르 자기를 좋게 포장해서 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요즘 상품들을 보십시오. 

과자만 하더라도 한 개씩 포장을 해 놨는데 그것도 아주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그렇게 포장해 놓지를 않았습니까? 보기에 좋은 것이 먹기에도 좋다고까지 말하지를 않습니까? 한데 남들 앞에서 나를 낮춘다면 그러면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어디 그게 쉬운 일입니까? 

그건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바로의 딸에 의해서 아들로 키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저가 애굽의 가장 존귀한 자가 되어 나라를 호령하는 자리에 올라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냈다면 이 얼마나 쉽고 편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런 모세를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시고 그나마도 광야에서 목자로 지내면서 40년의 세월이 지나간 끝에 아주 초라해지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저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낼 자로 삼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하지만 악한 마귀는 하와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거야.”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는데 악한 마귀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높은 곳에 좌정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말로 악한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마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이기를 높은 자리에 올라가라고 합니다. 한데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은 끝자리로 가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진리입니다. 내가 결코 하나님 보다 앞서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나를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야 됩니다. 아니 우리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리고 모든 지혜와 능력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의 목자가 되시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으로서 살아가게 되면 나의 목자가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주시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며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니 내 생각 내 욕심 위에 주님의 뜻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바 내 욕심 내 바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에 우선해서 주님의 뜻이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주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이 주님 앞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우시는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며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그 일을 내가 감당하며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으로 또한 우리를 영화롭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스스로 돌아보아 내게 있는 것 가운데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것을 기쁨으로 주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만드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능히 더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주님의 복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고 있는 많은 사람들 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놀라운 소식 하나를 듣게 됩니다. 베다니 마을에 삼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중에 나사로라는 청년이 병들어 죽어 장사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병들어 죽고 장사지내는 것이요 흔히 있는 일이니까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놀랐느냐 하면 그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고 무덤에 장사까지 지냈는데 그런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나사로와 더불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베다니를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았고 예수께서 타십니다.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폅니다. 그리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이들은 최대의 공경을 다해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맞아들이면서 온 힘을 다해 찬양하며 춤추며 기뻐하였던 것처럼 백성들이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결코 우리의 입이 닫혀 있지 않아야 합니다. 입을 열되 우리가 입을 열어서 할 말은 주님을 기뻐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면 그런 우리를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감옥 생활까지도 찬송 생활이 되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요셉이 감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했던 것처럼 변함없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전을 품고 참고 기다리며 감사하며 찬양한 것같이 우리도 언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주시고 계심을 믿고 주님만을 따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다 따라서 행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앞에 계신데 누가 감히 이스라엘 백성을 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아말렉 사람들이 르비딤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길에서 나와 이스라엘 백성의 뒤에 처져 있던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그것도 뒤에 쳐져 있던 노약자들이나 잡족들을 쳤던 것입니다. 

앞에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으므로 감히 나서지 못하고 뒤에 처져있는 사람들을 쳤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피곤하고 지쳐서 뒤로 쳐지거나 게으르게 되면 사탕의 공격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도 결코 멀찍이 따르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밤 멀찍이 따라가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 결국 어린 하녀 앞에서 예수를 비난까지 해가며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던 맹세는 어디가고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고 말았던 이유는 먼저는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멀찍이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을 바짝 좇아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멍에를 기쁨으로 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짐이 무거울까봐 지레 짐작을 하고 겁을 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나님의 일이 힘들고 버겁다는 것은 누구 말입니까? 

주님은 분명 쉽고 가볍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마음이 쉼을 얻게 된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러니까 속지 마십시오. 악한 마귀는 자꾸 우리 마음에 부담을 갖게 만듭니다. 네 형편과 주제를 알라고 합니다. “너 그럴 시간 있어. 너 그럴 능력 있어.”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문을 막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자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고 썩는 냄새가 진동할 텐데요. 아니 죽은 지 나흘이나 된 것이 무어 대수입니까? 냄새가 좀 난들 뭐 어떻습니까? 냄새 때문에 두렵습니까? 다시 말해서 누가 뭐라고 할까봐 두렵습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네 음식 가운데 세계적인 명품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건강식품이 없습니다. 이것만 꾸준히 먹으면 건강 염려할 것도 없답니다. 그것은 바로 청국장입니다. 김한복 교수의 청국장 다이어트 & 건강법 저서에 보면 “21세기에 청국장이 으뜸 건강식품으로 주목받는 14가지 이유”가 실려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뒤로 미루고 제목만 보면 이렇습니다. 

부작용 없는 비만 해결사, 암을 막는 탁월한 항암식품, 뇌졸중(중풍)치료 예방제, 치매를 막아주는 건뇌(健腦) 식품, 당뇨병을 다스리는 천연 인슐린, 고혈압을 다스리는 천연 혈압강하제, 간기능 개선 및 숙취 해소제, 변비와 설사를 동시에 해결하는 천연 정장제, 피부 노화를 막아주는 피부 미용제,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천연 칼슘제, 심장병& 돌연사 예방제, 빈혈을 막아주는 천연 조혈제, 먹는 천연 무좀약, 남성의 기를 살리는 천연의 비아그라  

그런데 청국장의 단점이라면 바로 지독한 냄새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냄새 안 나게 끓이는 방법도 있다고 하죠. 먼저 찌개를 다 끓이고 난 다음 불을 끄고 청국장은 넣으면 된다고 하네요. 청국장을 먼저 넣고 끓이다보면 영양소가 파괴될 수 있다고 하니 냄새도 없앨 겸 나중에 청국장을 넣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어쨌든 냄새 난다고 청국장 안 끓이고 안 먹으면 건강에 좋은 여러 가지 효과를 볼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냄새 불구 건강을 생각한다면 뭐 다른 건강 보조식품 찾을 것도 없습니다. 그저 청국장 매일이라도 드십시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거나 열심을 내어 주님을 따른다고 할 때 우리 마음에 여러 가지 염려되는 생각들에 결코 매이지 마십시오. 그건 악한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앞서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항상 감사와 찬양이 우리 입술에서 넘치도록 하십시오. 그럴 수 없는 경우처럼 보여도 찬송하십시오.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수록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상급이 따름을 믿고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아주 힘듭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그것은 힘든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며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상급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그러니까 아 피곤해 대신에 주님 감사, 아 힘들어 대신에 주님 감사, 아 신경질 나 대신에 주님 감사 이렇게 주님 감사가 입에 붙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나 피곤한데가 아닙니다. 그 대신 뭐라고요? “주님 감사”입니다. 그리고 먼저 자원하도록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던 마지못해서 하는 것처럼 하지 마십시오. 자원해서 앞장서십시오. 그리고 찬양을 하십시오. 그러면 찬양 중에 힘이 넘쳐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찬양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에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차음에는 억지로라도 입을 열어 찬양하십시오. 왜 처음에 찬양하기가 힘이 드는가 하면 찬양의 능력을 악한 마귀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로 감사하지 못하게 하고 찬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반면 감사와 찬양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족하게 채우시는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다에 나가면 조그만 예인선이 자기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나 되는 커다란 배를 끌거나 밀고 가는 것을 봅니다. 감사와 찬양이 바로 복을 불러오는 예인선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선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감사와 찬양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결코 그냥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그에 합당한 상급이 따릅니다. 먼저 은혜를 주시어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 뼈마디가 든든하게 해주시고 온 몸이 다 건강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힘들다 어렵다 피곤하다 괴롭다 두렵다고 하지 마시고 그저 한 마디로 감사하다고 하십시오. 하나님 감사 이게 사실은 청국장보다도 더 좋은 줄로 믿으십시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낮아짐입니다. 주님이 낮아지신 것처럼 우리도 낮은 자리에 처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스스로 종의 멍에를 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십니다. 사람이 세우는 것은 뒷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어버리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워주시면 그건 누구도 건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툴 때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결과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주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니 더 이상 자기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누가 크냐가 관심이 아닙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주님의 멍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역입니다. 서로 세워나가는 일입니다. 내가 낮아질 때만이 상대방을 세울 수가 있고 그러면 나도 함께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뭐냐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아십니다. 따라서 때가 되면 주님이 영화롭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찬양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나귀 새끼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면 어떻습니까? 주님이 올라타시니 보잘 것 없던 나귀 새끼가 가장 존귀한 분을 태우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내가 비록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어 보여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 시간 주님 전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는 곧 나를 주님께서 필요로 하신다는 뜻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은 주님의 필요를 따라 나를 복되게 만들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을 누리는 비결은 주님의 필요를 따라 나를 드릴 때 가능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십니다. 그렇다면 결코 도망치지 마십시오. 두려워 피하지 마십시오. 두렵다는 것은 내 생각 아니 내 생각을 사로잡는 악한 마귀의 생각일 뿐입니다. 결과가 두렵다고요? 내 꼴이 어떠냐고요? 나귀 새끼는 자기 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주님을 태웠을 뿐입니다. 남들이 손가락질 한다고요? 하라고 두세요. 주님이 칭찬하시는데 사람의 손가락질이 뭐 대수겠습니까? 거기에 따르는 상급이 있는데 뭐 누가 뭐라고 한들 뭐 어떻습니까? 

나귀 새끼가 주님을 태울 때 무슨 모양새가 있었겠습니까 아니면 그 걸음걸이가 온전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호산나 호산나 그건 그들이 나귀 새끼를 본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가 태운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오직 나를 지극한 눈길로 바라보시는 주님과만 눈을 마주치십시오. 그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아니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을 생각하십시오. 그 주님께 온전히 감사하십시오. 주님 내 형편과 사정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도 나를 필요로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모든 능력이 되심을 믿습니다. 이 귀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 앞에서 최고로 복을 받아 누리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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