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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의 주체로 서다 (수 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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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체로 서다 (수 2:8~13)


[정탐꾼들이 잠들기 전에, 라합은 지붕 위에 있는 그들에게 올라가서 말하였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당신들 앞에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으며,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당신들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주 당신들이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안에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주님 앞에서 맹세를 하시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확실한 징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를 살려 주시고, 죽지 않도록 우리의 생명을 구하여 주십시오.”]

• 가나안의 목전에서

모압 평원, 여리고 맞은쪽에 있는 느보 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모세는 후손들이 들어가 살게 될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땅이었지만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모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120세를 향유하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신명기 사가는 죽을 때까지 “그의 눈은 빛을 잃지 않았고, 기력은 정정하였다”(신34: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맑고 깨끗한 눈,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그의 눈을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바짝 드는 느낌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눈빛 맑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갑작스런 모세의 부재로 인해 자칫하면 백성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백성을 이끌 책임을 여호수아에게 맡겼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보좌하면서 총사령관이 되어 전투를 이끌기도 했고, 회막을 지키면서 늘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살던 그였지만, 맡겨진 책임은 너무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굳세고 용감하라’며 그를 격려하십니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수1:5)

이 약속으로 그의 가슴에는 든든한 기둥 하나가 섰습니다. 어떤 시련이나 고통으로도 흔들 수 없는 굳건한 기둥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한 가지 전제 아래서만 유효합니다. 그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의 말씀을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붙드는 것, 그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쓰여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1:8)

말씀을 길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길 없는 곳에도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시킵니다. 백성들은 며칠 분의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각 지파의 용사들에게 출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 역사 변화의 기미

그리고 정탐꾼 두 사람을 여리고 성으로 보냅니다. 가나안 땅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가운데 하나인 여리고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정탐꾼들은 슬그머니 그 성에 스며들어가 라합이라는 창녀의 집에 묵었습니다. 다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성전에 소속되었던 제의적 창녀를 일컫는 말은 ‘커데샤’입니다. 이들은 세속적 매춘행위는 하지 않았고 사회적 지위도 어느 정도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라합에게 적용된 단어는 ‘조나zǒnā’인데, 세속적인 창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라합은 그러니까 그 성읍 국가의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엄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남성들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다가 그런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고단한 삶의 수레바퀴 아래 깔린 사람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그들의 정체는 금방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정탐꾼이 왔다는 첩보는 왕에게까지 알려졌고, 왕은 라합에게 전갈을 보내 정탐꾼들을 데려오라 이릅니다. 그러나 라합은 두 사람을 지붕 위로 데려가 널어놓았던 삼대 속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수색대를 맞이합니다. 다그치는 그들 앞에서도 라합은 주눅 들지 않은 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로 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떠났는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빨리 사람을 풀어 그들을 뒤쫓게 하시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니다.”(2:4b-5)

이것은 일종의 반란입니다. 왕의 지엄한 명령을 그는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히브리 여인들이 아기를 낳을 때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역했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역할을 라합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합은 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분명한 의지로 정탐꾼들의 보호자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라합은 어쩌면 단 한 번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밑바닥에서 사는 이들의 예민한 지각력으로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이것을 일러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 했습니다. 말은 어렵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마치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면 동물들이 제일 먼저 감지하는 것처럼, 땅에 가까운 사람들, 계층적으로 보면 사회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오래된 성읍 국가의 밑바닥에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살던 라합은 어떤 기미를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 히브리의 하나님

라합은 여리고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진 자들만을 위해 일하는 신들로 인해 밑바닥 사람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향기’라는 뜻이지만 ‘달 신을 섬기는 곳’이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풍요와 안전을 제공해준다는 달신을 숭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풍요와 안전은 라합과 같은 계층 사람들과는 무관한 현실이었습니다. 춘향전에서 어사가 된 이몽룡이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가서 읊은 노래는 계층 사회의 이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金樽美酒千人血(금잔미주 천인혈)/아름다운 술잔에 좋은 술은 백성의 피눈물이요
玉盤嘉肴萬姓膏(옥반가효만성고)/옥그릇에 담긴 기름진 음식은 만백성의 고혈이고
燭淚落時民淚落(촉루락시민루락)/켜놓은 촛불에서 흐르는 촛농은 백성의 눈물이고
歌聲高處怨聲高(가성고처원성고)/노랫소리 높을수록 원망소리 더욱 높아진다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던 라합에게도 히브리 노예들의 애굽 탈출 이야기가 들려왔을 것이고, 노예살이를 운명으로 여기지 않고 자유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무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싹텄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거짓말처럼 정탐꾼들이 자기 집에 들어왔습니다. 라합은 그것을 새로운 역사의 초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라합은 추격자들이 돌아간 후 정탐꾼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단호하게 밝힙니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9)

여리고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야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셨는지, 그리고 넘실거리는 홍해를 어떻게 가르셨는지 그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모리 족속에 속한 두 나라 헤스본과 바산을 어떻게 정복했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라합이 이 정복 이야기를 요약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라합이 하필이면 하나님의 행위의 초점을 왕의 제거에 맞춘 것은 출애굽의 하나님이 불의하고 무도한 지배자에 맞서는 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2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신실한 사람도 끊어지고, 진실한 사람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1)

현실의 어둠 속을 직시하던 시인은 어느 순간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련한 사람이 짓밟히고,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으니, 이제 내가 일어나서 그들이 갈망하는 구원을 베풀겠다.”(5)

하나님은 세상의 억압과 착취와 불공정을 제거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뭇 나라의 도모를 흩으시고, 뭇 민족의 계획을 무효로 돌리시는 분이십니다(시33:10). 

• 새로운 역사의 고리

여리고 성의 창녀 라합은 가나안 성읍 국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그는 새로운 역사를 여는 일에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라합은 불의한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평등한 대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과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이제 창녀가 아니라 혁명가입니다. 신앙이란 결단입니다. 그리고 모험입니다. 아브람은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착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목사가 한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식이 끝나고 목사가 부모와 회중들이 다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아기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가야, 이 세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너를 앞으로 평생 동안 걸어갈 여행으로 맞아들인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삶을 통해 이루실 일의 시작이란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디로 이끄실지, 그래서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 다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뿐이란다.”(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복 있는 사람, 2008, 76-77쪽)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이라고 고백합니다. 멋진 일입니다.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합은 그 꿈을 가슴에 품었기에 위험을 무릅쓸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인가요? 라합은 유다의 며느리 다말, 나오미의 며느리 룻,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와 더불어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다말은 후사를 잇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의 권리를 찾은 여인입니다. 룻은 남편도 자식도 다 잃은 시어머니를 차마 홀로 둘 수 없어 자기 민족과 고향을 버리고 어머니의 삶 속에 육화해 들어간 여인이었습니다. 밧세바는 다윗이라는 권력자에게 유린당하고, 남편까지 죽임을 당했지만 좌절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끝까지 살아낸 여인으로 솔로몬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구원의 역사란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연민의 마음을 통해, 또한 불의의 사슬을 끊으려는 의지를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려는 의지를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계절은 이제 입춘을 지나 우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미 은총의 봄이 심어졌습니다.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인해 겨울처럼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자아의 속박에서 풀려나 주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 가운데 동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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