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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보내시며 (눅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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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보내시며 (눅 10:1~9)


이번주간에,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찬송가 559장처럼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시고, 예수만 섬기는 복된 가정”의 복,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그리스도인) 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복음)전도’입니다. 요즘은 (복음)전도라는 말보다 ‘선교’라는 말을 훨씬 더 많이 씁니다. 우리교회에도, 남선교회(남전도회)가 있습니다(여전도회는, 아직도 여전도회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만). 

한 때는, 해외(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국내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리적인 개념이 선교와 전도를 구분하는 개념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선교와 전도를 굳이 구분하자면, 선교가 좀 더 폭넓은 개념의 복음전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복음전도(evangelism)를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행하라고 명하신 그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에 비하면, 복음전도는 좀 더 좁은 개념의 선교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至上命令입니다(가장 높은 명령, 절대로 복종해야 할 명령: the Great Commission, 마 28, 18-20).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핵심은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제자를 삼으라”는 단어만 명령형 본동사이고,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세 단어는 모두 현재 분사형입니다(본동사를 돕는 역할을 단어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제자 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도, 제자운동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 늘 강조하신 말씀이 있는데,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다”하십니다(요 17, 18).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하십니다(요 20, 21). 또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보면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선언하시면서 명하신 것이, 복음전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전도를 하지 않고서는(좀 더 폭 넓게 선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그러면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이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의 증인이 되게 권능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 8). 아멘.

본문 누가복음 10, 1이하 말씀은 예수님께서 70명의 복음전도자를 각 동네, 각 지역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보내실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복음전도자가 반드시 갖춰야 할 기본기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5가지 중, 2가지만).

첫째는, 복음전도(선교)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복음 전하는 교회나 우리는, 증인으로 부름 받은 일꾼입니다. 우리가 복음전도의 주체가 아닙니다.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道具일 뿐입니다. 主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일뿐입니다. 

한 때 선교나 복음전도는, 교회 또는 선교단체, 또는 좀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체가 되어서 선교하거나 복음전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교회 같은 교회들이, 그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우리가 그저 쉽게 쓰는 말이 중에 “우리가 돕는 교회들”, “우리 교회가 하는 선교” … 이런 표현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쉽게 많이 씁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참, 기막힌 말입니다. ‘아’와 ‘어’는 사실 크게 다른 점이 별로 없습니다. 모음 하나 차이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모음 하나 차이에, 우리 속마음이 담겨 있다는 이야깁니다. 숨겨진 그 속마음이 표리부동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중심이 반듯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사람중심(주인)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그림). 

선교, 복음전도는 하나님 주도적인 하나님의 사건입니다(선교학적으로는 이를, Missio Dei). 결코 사람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D. Bonhoeffer가 옥중서신에서, 교회란 이웃을 위하고, 남을 위할 때 참된 교회가 된다는 의미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Kirche f&$1;r Andere)라는 슬로건을 제창했습니다(반성일어남; West, Sundermeier). 

틀린 말은 아닌데, 여기에 숨겨진 무서운 함정이 있습니다. 본훼퍼는, 인문주의적인 부르주아 환경에서 자란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신앙적인 특성도, 그런 환경적인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서구교회들이 선교할 때, 주는 자 의식, 베푸는 자 의식을 많이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가 마치 선교의 주체인양 했습니다.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마치 선교의 주체인양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선교지나 선교의 대상자들은 마치 자기들로부터 혜택을 받는 자인 양 여겼습니다. 

‘타자를 위한(for, f&$1;r) 교회’라고 할 때, 타자는 항상 대상화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치, 우리는 돕는 자이고, 너희는 수혜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돕는 자 신드롬(증후군)’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바른 선교가 아니요, 바른 복음전도가 아닙니다. ‘타자를 위한 교회’,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교회, ’타자와 함께 삶을 나누는 교회,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누가 선교와 복음전도의 주체이십니까? 오직 하나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70명의 전도자를 보내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전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에도, 추수할 일꾼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추수꾼은 누구이셨습니까?(우리 가정은, 증조할아버지 朴 萬金–하나님 보내신 복음의 추수꾼) 우리는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권한이 있습니다. 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우리 주님께서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기독교 역사에, 위대한 열두 사도를 세우고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 주님께서,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을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 잡아 옥에 가두고 박해하던 사울이라는 인물을, 부르신 것 아닙니까? 핍박자 사울을, 위대한 사도로 바꾸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중국선교의 아버지, H. Taylor를 세우신 분, 현대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두 수선공 W. Carrey를 인도에 보내신 분, 미국의 흑인민권운동가 M. Luther King 목사님을 세우신 분, 모두 다 주님이십니다. 수많은 선교사들, 복음의증인들, 전도대원들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님은, 보낼만한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이사야에게 물으셨지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이사야가 응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그 이사야를,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옛날, 열방을 축복하시기 위하여, 복의 근원 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의 하나님 되셨습니다. 그 아들, 야곱의 하나님 되셨습니다. 그 아들, 요셉의 하나님 되셨습니다.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가정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아직도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未踏地에 사는 45억의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추수할 것은 많지만, 추수할 일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복음 들고 가야 할 선교지(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자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들을 ‘어린 양’ 같다 하셨습니다. 반면에,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자들은 마치 (맹수) 이리와도 같다하셨습니다. 물론 여기 대조되는 어린 양과 이리가, 어떤 짐승들인지 우리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여기 ‘이리’라는 말은, 짐승 이리를 가리키는 문자적인 말이 아닙니다. 복음전도를 받아야 하는 대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 밭’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이 어디에서 형성 됩니까? 삶의 방식, 가치는 어디로부터 옵니까? 자기시대의 文化로부터 나옵니다. 비유하자면, 사람과 문화의 관계는 마치 착 달라붙은 옷과도 같습니다.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가만 보십시오. 우리 시대의 문화, 그 문화 속에서 내재되어 있는 시대정신, 가치관, 삶의 방식들에 큰 영향을 받고 삽니다. 

R. Niebuhr가 쓴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1)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2) 문화의 그리스도, (3) 문화 위에 계신 그리스도, (4)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5)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설 명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하나가, 조상제사문제입니다. 제사문화와 무관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남존여비사상입니다. 아시는 대로 제례에는, 아들을 통해서 호주를 상속하고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볼 때, 우리나라 결혼적령기 남성은 129명인데 비해, 여성은 100명밖에 안 됩니다. 이 말은 지금부터 20년 전, 여자태아를 그만큼 많이 낙태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불법낙태수술문제가 의료계 내부에서 문제제기 되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09년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134개국 중에서 115위입니다(다른 나라가 보는 기준). 

많은 분들이 전도할 때, 예수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 중 하나가 조상제사를 모시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조상들에게 不孝子가 되기 싫다고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우리 문화에 뿌리 깊게 내린 ‘조상제사 문화’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마치 맹수와도 같은 ‘이리’가 되는 것입니다. 

갑골문자 전문가인 김경일 교수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보면, 제사제도가 생기게 된 역사적인 연원(淵源)은 조상효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지금부터 3300년 경, ‘조갑’이라는 사람이 부친의 명을 어기고,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로 兄 ‘조경’을 제거하고 왕권을 찬탈합니다. 그 쿠테타를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그때부터 조상제사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天神이나 토템과 애니미즘(만물에 신령이 존재한다는 신앙), 황하 江(마치, 옛날 애굽 왕 바로가 나일 江을 神으로 숭배한 것 같이) 위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 제사들은 다 없애고, ‘유(儒)’라는 무당이 조상제사를 관장케 했습니다. 아주 엄숙하고 까다로운 제사의식을 만들어서, 자신의 직계 혈족들의 제례, 조상신 하나만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게 했습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조상제사의 출발은, 자신의 권력만 유지하려는 권력욕에서 비롯된 제도라는 겁니다. 아시는 대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평민과 상민들은 절대로 조상제사를 지내거나 족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혹 제사를 지내기라도 하면, 끌려가서 곤장을 맞았습니다. 조상제사 제도가 부자연스러운 신분사회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제사제도에는, 탐욕스러운 사농공상이라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를 보십시오. 金씨․李씨․朴가가 전체 성씨의 45%를 차지합니다. 그 중, 金씨가 전국민의 21%입니다. 일본은 성씨가 8만개나 되고, 중국도 1만 2000개가 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찌, 이 세 성씨가 45%나 됩니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백성 중 40%는 성씨가 없었습니다. 

예전엔, 남자가 장가를 갔습니다(말은 남아 있다). 신사임당도 아이들을 여럿 낳고서야 시집에 들어갔습니다. 남자가 장가를 간 것이지요. 그러나 유교가 뿌리를 내리면서부터,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중국으로부터 親迎制를 도입하면서부터,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결혼문화가, 조선중기에 와서 정착됩니다. 그 후, 제사제도가 일반화되기는, 일제 시대 때부터입니다. 일제가 수탈의 방편으로 인적자원 파악을 위해서, 평민상민도 모두 성씨를 가지게 했습니다. 그때 너도나도 金씨 李씨 朴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집집마다 조상제사도 지냈습니다.

명절 때보면, 종교가 있건 없건, 장남 집으로 다 모이지 않습니까? 모이면, 남녀노소가 종과 횡으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죽은 자’를 향해서 일렬로 뒤통수를 보고 섭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제사문화입니다. 가족관계에서 죽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문화가 제사문화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 가족들의 행복이나 소통에는 큰 관심이 없는 문화, 제도입니다.

미국은, M. Luther King 목사님을 추모하는 날이 휴일입니다(지난 1월 18일, M. Luther King Day). 우리와 다른 점은 King 목사님이 죽은 날(39세, 1968년 4월 4일 암살)을 기념하지 않습니다. 그의 생일 날(1929년 1월 15일)을 기념합니다. 우리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부모님, 조상들의 기일을 기념하여 모이기보다는, 태어나신 생신날에 모여서, 조상들․부모님의 삶과 신앙을 기리고, 계승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제사문제는 분명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이리’와도 같은 맹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 조상제사문제뿐이겠습니까? 이리와도 같은 ‘조상제사’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는 가족, 친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아계신 부모님께 이전 보다 더 효도하십시다. 형제자매 친지 가족들을 존중하고, 화목하게 지내십시다(다음 주 계속).

[기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 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세주로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주님께서, 먼저 믿은 우리들을 추수할 것 많은 이 때에, 추수꾼으로 보내기를 원하시는 데, 우리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응답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이리와 같은 제사문화에 사로 잡혀 있는 가족, 친지, 이웃들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 위에 가정을 잘 세우는 우리 모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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