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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허락하심 (삼상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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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허락하심 (삼상 1:1~28) 
 
 
사무엘서는 사사들이 통치하던 시대로부터 왕들이 세워지기는 과도기적 시기 100여 년간(B.C. 1100-1000년 경)의 기록입니다. 시대별로는 사무엘 시대(삼상 1-12장), 사울 시대(삼상 13-31장), 다윗 시대(삼하 1-24장)로 구분할 수 있지요. B.C. 2세기에 헬라어로 번역된 칠십인역(LXX)은 사무엘서는 1-2 왕국서로 열왕기서는 3-4 왕국서로 나눕니다. 하지만 원래 히브리 성경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가 두 개의 두루마리로 된 한권의 작품입니다. ‘사무엘상·하’라는 명칭은 히브리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Jerome, 347-420)의 벌게이트역(Vulgate)의 영향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장은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의 출생 배경을 기술합니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 땅의 고산지대 “라마다임소빔”에 살고 있는 레위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1, 대상 6:34-38). 그에게는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가 있었는데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는 없었습니다(2). 엘가나는 매년 성막이 있는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삼손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있었지요(3). 제사를 드리는 날에 엘가나는 제물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4). 5절에 한나가 “갑절”을 받았다는 기록을 칠십인역에 ‘한 몫’만 받았다고 번역했습니다. ‘두 얼굴의 한 분깃’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이 애매하기 때문이지요.

한나의 몫은 불분명한 반면 5절과 6절은 “여호와께서” 그녀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분명히 언급합니다. 여호와께서 태를 닫으셨다는 사실을 빌미 삼아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려고 화를 몹시 돋웠습니다(6). 이런 일은 해마다 되풀이 되었습니다. 예배하러 갈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화를 돋우면 한나는 울면서 먹지 않았습니다(7). 엘가나는 자신이 열 아들보다 낫다며 위로해보았지만 한나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있어야 할 명절이 한나에게는 오히려 슬프고 고통스러운 날이었지요. 한나는 명절만 되면 가족들이 한바탕 싸우는 전형적인 역기능 가정의 일원이었던 셈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은 숨은 죄가 있어서 신의 호의를 받지 못한 것으로 손가락질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자식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과 상급으로 여겼으며(시 127:3), 무자한 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로 간주했지요(창 20:18). 그런데 사무엘서가 불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한나의 고통이 사사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했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구별된 열매를 잉태하지 못하여 주변 이방인들로부터 조롱 받는 현실이 닮았지요. 한나의 고통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고(7), 남편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으며(8), 마음이 괴롭고(10), 마음이 슬펐습니다(15).

사사 시대의 부패상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도무지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고, 누구라도 절망하고 탄식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음이 괴롭고 슬퍼서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00여년 만에 기적처럼 찬란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과도기적 상황에서 성경은 한 불임 여인을 소개합니다. 모든 괴로움과 슬픔을 여호와 앞에 가지고 와서 통곡하는 그녀의 기도로부터 서서히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음을 기록하지요. 이 일은 부패한 한국 교회의 현실 속에서 성도가 어떤 자세를 취할 수 있을지 보여줍니다.

10절을 보면 매년 울기만 하던 한나는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 한나에게 있어서 아들은 여호와께서 그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그녀를 “생각하시고” 그녀를 “잊지 아니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확증을 얻은 후에 아들 자체는 다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합니다. 그녀의 “오래 기도”(12)하는 것을 보고 엘리가 “취한 줄로 생각”(13)한 것을 보면 당시 축제 때 취하는 여성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여러 부류의 여인상을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사람을 격동시키는 여인이 있지요. 축제 때에 진탕 술을 마시는 여인들도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아픔을 토로하며 기도하는 여인도 있습니다. 동일하게 힘든 현실을 살고 있지만 행동방식은 서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부패한 사사 시대에서 찬란한 왕국 시대로 변천하는 과도기에 탁월한 지도자였던 사무엘을 낳는 것은 사회 활동이 제한된 당시 여인에게 있어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아무에게나 아무렇게 던져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격동시킨 여인이나 술 취한 여인들이 아니라 “여호와 앞에 … 심정을 통한”(15) 여인에게 주어졌지요.

남편과 대적을 탓한다면 속은 잠깐 시원할지 모릅니다. 진탕 술을 퍼마신다면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좀 나아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고서도 은혜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불임 여성이 기도하기만 하면 사무엘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음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서원하기만하면 소원 성취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방편으로 기도를 사용하셨습니다. 한나는 통곡하며(10), 자신의 영혼을 여호와께 쏟았고(15, pouring out my soul, NIV), 오랫동안(12), 먹지도 않고(18) 기도했습니다. 한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일방적이지만 은혜의 방편인 기도를 통해 역사했습니다.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은 가운데서(16), 마음을 굳게 먹고 기도한 것임을 알고 나서 엘리 제사장은 한나를 축복합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제사장의 공식적인 축복을 받은 한나는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었습니다(18). 한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더 이상 괴롭고 슬픈 표정으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간절히 기도한 후에는 언제 어떤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든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괴로움을 견디며 신실하게 기다릴 뿐이었지요.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셨습니다(19).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하셨습니다. 구약 성경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기도를 자기 욕망을 채우는 방편으로 삼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나가 잘 보여주었듯이 기도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방편이지요.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집착하고 초조해하는 것은 은혜의 방편을 올바로 사용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올바로 사용했다면 기도 후에도 한나와 같은 자세를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한나는 잉태하고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했지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20)는 의미와 연관하면, ‘듣다’는 뜻의 ‘샤마’와 ‘하나님’이라는 뜻의 ‘엘’이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름인 듯합니다. 기도가 응답된 후에 마음을 바뀔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지요. 피눈물 흘려가며 얻은 귀한 아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온전히 드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기 쉽지요. 하지만 한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여호와께서 주신 아이임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분을 잊지 않았지요.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습니다(21). 아이를 젖 뗀 후에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22)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아내의 서원은 남편이 허락해야만 성립되었습니다(민 30:6-8). 그런데 엘가나는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고 허락합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지요(23). 당시에는 어머니가 아이들을 세 살 무렵까지 젖을 먹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2마카 7:27). 한나는 젖을 뗀 후에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의 여호와의 집으로 나아갔습니다(24).

사무엘서 1장은 엘가나의 가정이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으로 마감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는 말씀대로, 한나는 더 이상 대적으로 인해 시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불임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문제까지도 해결된 셈이지요. 그 시대에는 여인들이 사회에 진출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어려운 때였습니다. 유일한 소망은 사내아이를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는 것밖에 없었지요. 한나는 불임이었으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쓰셨습니다.

사무엘 상하는 한나의 기도(삼상 1-2장)와 다윗의 기도(삼하 22-23장)가 시작과 끝에 위치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사무엘서의 주제를 반영하는 인클루지오(inclusio) 구조로 되어 있지요. 한 여인의 기도가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어놓는 중대한 계기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상황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좋은 상황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백성답게 행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큰 역사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의 기도로부터 시작하는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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