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 11:29~12:2)

  • 잡초 잡초
  • 2575
  • 0

첨부 1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창 11:29~12:2)


창세기 11:29-12:2
(11: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30)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이제부터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시작입니다. 인류의 기원과 세계에 대해서 언급하던 거대 규모의 스케일은 급격하게 한 사람으로 좁혀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출애굽의 역사가 모세라는 한 아기의 탄생으로 시작하고, 전 인류 구원의 역사가 베들레헴 마구간의 구유에 놓인 한 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듯이 인류를 향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역사 또한 75세의 한 늙은이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를 원역사라고 하고 12장 이후부터를 구원사라고 합니다. 원역사는 역사 이전의 시대라는 의미이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사의 도구로 삼으신 배경에 해당합니다. 1-11장은 인간의 탄생과 의미를 밝히는 배우 중요한 사건들을 싣고 있지만 실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서막에 불과 합니다. 영화에서 그렇지요. 본격적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주인공의 탄생 배경이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한 스토리가 간략하게 언급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의 주인공입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수만 년의 인류 역사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나 한 사람의 탄생을 위한 전사에 불과 합니다. 자기 눈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이라는 무대의 주인공들입니다. 별이 빛나는 이유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선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시는 시각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소중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펼치기 위해서 수십억 년을 준비해왔고, 당신이 없으면 우주도 끝입니다.

물론 1장에서 11장까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사랑과 심판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아담도 사랑하고 가인도 사랑하고 노아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은 보다 특별합니다. 그동안은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할 아들을 택하고 신부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1-11장까지 반복된 죄와 심판,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인간의 길은 하나님에게 썩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 한 사람을 통하여 한 민족을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여 접근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에 매여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시는 분입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하면서 하나님은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였고 그 때문에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속앓이를 하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아이를 낳으면서 자기 자유를 잃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탄생할 이스라엘과 결혼관계를 생각하시며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구속합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행동하며 먹고 쓰던 자유를 잃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시는 이 순간은 또 한 번 자신의 자유를 억류하는 순간입니다. 호세아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2:19-20)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결혼 맺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셨고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의 사랑을 고슴도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너무 멀리 있어도 안 되고 너무 가까이 있어도 안 됩니다. 

멀리 있으면 사랑이 아니고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서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사랑의 지혜일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속성은 아닙니다. 사랑은 상처받게 되어 있고 상처를 각오하고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못에 박히고 가시에 찔렸지만 이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사라는 잉태하지 못하여

성경을 보면 모든 역사의 주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접근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작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은 전혀 쓸모없는 노인이었습니다. 12장 4절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그 나이 75세였습니다. 75세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나이입니다. 11장 30절에서는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저주받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며 희망이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무능력하고 희망이 없는 인생을 들어서 자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무능력한 사람을 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뛰어난 사람은 일이 잘 되면 자기가 잘 나서 그렇게 된 거라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들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무능력한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성경에 이런 모습은 매우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드온과 3백 용사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미디안의 군대와 싸우려 나갈 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 많은 수의 군대와는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7:2) 그래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나니 1만 명만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많다고 하시며 그들을 물가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물을 먹는데 개가 핥는 것 같이 그 혀로 물을 핥는 자가 대부분이요, 무릎 꿇고 손으로 움켜 마시는 자가 3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만 선택하여 미디안 군대와 싸우게 하고 나머지는 돌려냅니다. 어떤 분들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물을 먹는 신중함을 보여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닙니다. 

만약 엎드려 개처럼 핥아먹는 자가 300명이었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적은 쪽을 선택했고 그래서 300 용사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300명을 데리고 가서 미디안의 군대를 물리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자와 약한 자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스스로 작다고 느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이나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이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무능력한 자를 선택하시는 이유는 무기력할 정도로 자신이 비워져야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생각이 강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기 어렵습니다. 빈 항아리여야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도 없고 나이도 늙었기 때문에 충분히 비워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쓰실 만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실 때는 그가 애굽의 왕자였을 때가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서 40년을 썩고 난 후였습니다. 모든 것을 비웠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우리가 약한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강해집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문제 앞에서 새로운 도전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자기 인생 앞에는 사라처럼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희망을 던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에게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힘으로 잘 헤쳐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병든 자에게 필요하듯 하나님은 병자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감당할 능력도 없는데 하나님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을 던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무기력하게 사는 것을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어 하십니다. 75세의 나이에 자식도 없이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는 아브라함을 역사의 무대 한 중앙에 세워놓으십니다.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나이에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도록 충동질 하시며, 하늘의 별을 보며 자기 자손들이 그렇게 되리라는 꿈을 꾸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그러셨습니다. 모세의 나이 80이 되어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의 불을 그 가슴에 붙이셨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바로 이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 인생의 꽃을 피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너무 가혹합니다. 꿈을 꾸기에 현실은 너무 냉혹합니다. 젊은이들은 인생의 첫 출발부터 실업의 공포에 질려 있습니다. 실업자 수가 400만 명이 넘어가고 대부분은 청년 실업이라고 합니다. 고용 요건은 갈수록 열악해 집니다. 중년들은 회사에서 퇴출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합니다. 감원, 구조조정, 선진화 이런 말들이 거침없이 흘러나오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사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과 한 가정에게는 그 삶의 기둥을 송두리째 흔드는 소리들입니다. 50을 넘으면 이제 서서히 물러가야 할 때가 됩니다. 

평균수명은 자꾸 늘어나는데 은퇴 연령은 자꾸 단축됩니다. 이번 주에는 한국과 미국의 명문대를 나왔고, 최고의 엔지니어이며 삼성전자 부사장이었으며, 집과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고 연봉이 10억이 넘는 사람이 업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런 사람도 자살을 하나 하지만 이런 경쟁의 공포는 승자나 패자나 모두에게 일상화가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마치 달나라 이야기처럼 현실감이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 한국사회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대고 사랑과 나눔의 사회를 이루지 못하고 극심한 경쟁사회와 이기적인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질중심의 사회를 만들다 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물질을 밟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물질에 매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꿈도 꾸지 못하고 물질에 매인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실만 탓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현실에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끊임없이 불을 던지시는데 우리 눈과 마음이 현실에 빼앗겨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우리는 좀 채로 마음을 열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바로 거기에 우리 인생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늙은이가 열방의 아비가 될 꿈을 꾸고, 죽었던 몸에서 생명이 잉태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성령은 우리로 꿈을 꾸게 하는 영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7)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위기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먼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은 삶의 터전입니다. 친척은 자기를 보호해주는 세력을 의미하고, 아비 집은 곧 자기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의 확고한 의지처들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사31:1) 하나님만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22)고 말씀합니다. 그 청년은 영생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것 같았지만 실상은 재물을 의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던 자들에게는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몇 년 전에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윈 형제라는 분인데 중국에서 가정교회 사역을 하며 모진 핍박을 받았지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놀라운 기적들을 행했던 분입니다. 74일간 감옥에서 금식을 했지만 살아났고, 감옥 문이 열리고 공항 관리의 눈을 어둡게 해서 외국으로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이 분이 유럽에서 순회를 할 때 유럽인들이 서구에서는 사도행전과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데 당신네 나라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주 일어납니까하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윈 형제는 우리는 가진 게 없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데 당신들은 가진 게 많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합니다. 버려야 할 본토 친척 아비집이 많으면 결국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끔 벼랑 끝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 죽을 것 같은데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음을 알게 합니다. 벼랑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우리 안에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쉽고 편안합니다. 그러나 편안하면 인생에 변화나 기적은 없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아브라함은 아마 편안한 여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는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한 늙은이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안전한 곳을 떠났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요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서도 주님은 애굽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애굽은 안전하고 풍요롭지만 그곳에서는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편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가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도 사라지고 애굽 민족에 흡수될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길을 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애굽 땅에서는 확실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면 애굽을 떠난 곳에는 그래도 절반의 희망이 있습니다. 실패할 확률도 있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확률도 적어도 남아 있습니다. 

많은 위인들이나 위대한 사업가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할 때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미국이 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들이 유럽이라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도 그들이 고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정주영 회장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도 고향을 떠난 사람입니다. 6남 2녀 중 장남인 그를 아버지는 일등 농사꾼을 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하고픈 생각이 강해 네 번이나 가출을 시도하였습니다. 결국 고향을 떠났고 그는 현대라는 일류 기업을 만들어냈습니다. 지난 1998년도에는 남북 통일 역사에 있어서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소떼 1천 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에 있는 고향에 간 사건입니다. 정주영 회장은 어린 시절 가출 하면서 아버지가 소 판 돈 70원을 훔쳐 달아났었는데 이제 그 천 배에 해당하는 소를 몰고 고향으로 간 것입니다. 그가 고향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위험은 있습니다. 다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떠나는 것이 더 높습니다.

셋째, 과거와 단절하라는 뜻입니다. 과거가 우리 발목을 잡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우상을 섬기던 집안이었습니다. 오래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여호수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우상을 섬기는 집안 분위기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것을 단절하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아비 집이라는 것은 또한 우리 안에 있는 좋지 않는 습관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녀가 만나 결혼할 때 그 집안의 분위기나 내력을 보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집안 분위기라는 것은 곧 배우자의 성격이자 인생관입니다. 그 집안이 우애가 있고 신앙적이고 긍정적이며 뼈대가 있는 집이라면 좋습니다. 

미국의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 대표적인 두 가문의 5대 후손들을 조사했다고 합니다. 한 가문은 에드워드 요나단이란 목사의 집안이었고, 다른 한 가문은 마크 슐츠의 가문인데, 맨하탄의 유흥가 술집을 운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요나단의 후손은 896명이었는데 이 후손들 중 목사 및 선교사가 116명, 대학교수와 교사가 86명, 문인이 75명, 의회 의원이 4명, 부통령 1명, 사업가 73명, 발명가 21명이었답니다. 반면 슐츠 가문은 5년 이상형의 형을 언도받은 죄수가 96명, 술꾼, 마약중독자, 정신병자 58명, 매춘부 65명, 극빈자 286명, 무식불량자가 무려 46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문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옛 과거를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옛과거는 사망과 죄가 지배하고 그래서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사건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는 돌 감람나무와 같은 존재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롬11:24)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15:5) 이제 우리는 예수의 가문으로 존재를 바꾼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런 결단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목표를 향하여 가다보면 언젠가는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어느 날 담대히 결단하고 출발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비집을 즉시로 떠났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곳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어디까지 갑니까? 하란입니다. 하란에 가서야 겨우 데라를 떠납니다. 친척을 떠났습니까? 아닙니다. 가나안 땅까지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야 겨우 롯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서 매우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는 말입니다. 오늘 12장 1절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어떤 땅으로 인도할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결단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갔던 길을 한 번 따라가 보십시오. 

11장 31절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원래 목적지가 가나안 땅을 향하고 있었다고. 아브라함이 이동했던 갈대아 우르와 하란과 가나안, 그리고 애굽을 학자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합니다. 그 지도 모양이 초승달 형태로 유목민들과 문화의 이동통로입니다. 목자들이나 상인들은 양떼나 물건을 싣고 이 지역을 왕래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땅에 대해서 매우 궁금도 하고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데나 갈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비전은 품었지만 어디로 가야 모르니 그냥 유목민들이 자연스럽게 이동하던 곳을 따라 갔던 것입니다. 그러다 12장 7절에 가나안 땅에 도착할 즈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과거와의 단절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결단이란 것도 그리 대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항상 주님의 말씀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과 비전을 바라보며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 비전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나침반을 보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나침반은 N극은 항상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 북쪽만을 가리킬 때는 없습니다. 북쪽을 향하여 좌우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이 나침반의 바늘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완벽하게 주님만 향할 수는 없습니다. 좌로도 치울 칠 때도 있고 우로도 치우칠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방향을 못 찾아 뱅뱅 돌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을 바로보고 비전을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흔들려도 북쪽만을 향하려 할 때 우리는 목적지에 가게 될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바로 그런 생애였습니다. 그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여러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성공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끝까지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인내하며 끝까지 말씀을 바라봄으로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