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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자로 살아갑시다 (창 1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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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자로 살아갑시다 (창 13:5~13)   
  
   
가슴을 찡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해외로 입양되어 자라다가 돌아와 ‘피붙이’를 애타게 찾는 경우입니다. 가족과 만나게 되면 어머니들은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헤어졌었노라고 울먹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 자식을 고아원 앞에 버려놓고 한평생 한 맺혀 살아온 늙은 어머니가 눈물을 흘립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만남에 우리를 울리는 깊은 정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힘들었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중 70%가 부모나 둘 중에 하나가 있음에도 버림받은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먹고 살만해졌음에도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아이들을 버리는 경우들이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없어도 문제’이지만 ‘있어도 역시 문제’입니다. 그리고 없어서 생긴 문제보다는 있어서 생긴 문제가 더 복잡하고 심각합니다.

예배를 회복 한 아브람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I. 문제

5절 말씀입니다.
: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아브람의 일행 롯이 누구입니까? 
갈대아 우르에 살던 ‘데라’는 어미 아비 없는 손자 롯과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들 내외 즉 아브람과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아들의 이름과 같은 도시인 하란에서 머물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삼촌 아브람은 조카 롯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함께 기근을 당하였고, 함께 애굽에 내려갔고, 함께 애굽에서 올라왔습니다(13:1) 롯은 아브람과 함께 한 식구였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에게 아들처럼 여겨졌던 조카 롯입니다. 
   
오늘 성경은 롯을 ‘아브람의 일행’이라고 소개합니다. 아울러 롯에게 ‘양과 소와 장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유가 많았다’고 설명합니다. 롯에게 장막이 있었다는 말은 롯에게도 딸린 사람과 가축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롯은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아브람과 조카 롯의 재산이 너무 많아서, 그 땅에서 함께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재산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었습니다.
   
1. 너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났습니다. 부는 하나님이 주신 복 중에 하나입니다. 부 그 자체를 죄악시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욱이 앞으로는 부를 욕하면서 뒤로는 부를 좋아하는 이중성은 큰 문제입니다. 풍성함이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하셨다면 잘 활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풍성함에는 유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너무 많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물질적인 풍성함은 사람의 정신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엄청난 재앙을 가져옵니다. 
   
오늘의 문제는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현대는 너무 많아서 타락한 시대입니다. 요즘은 못 먹어서 생긴 병보다는 너무 먹어서 생긴 병들이 훨씬 많습니다. 소위 ‘문화병’이라는 것은 못 먹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너무 먹어서 생긴 병입니다. 또 돈도 ‘없다, 없다’하지만 다른 사람에 비하여 없다는 말입니다. 돈이 너무 많아 사과 상자에 돈을 담아 주고받는 사회가 문제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유가 너무 많아 제 마음대로 하여 ‘제멋대로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가 극도로 타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정보도 문제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자료들이 넘쳐 나서 분류하기도 벅차게 되었습니다. 없어도 문제이지만 있어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없어서 생긴 문제’ 보다 ‘있어서 생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없어서 생긴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대부분이지만, 많아서 생긴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가 됩니다. 많아서 생긴 문제는 ‘공해’입니다. 많아서 생긴 문제는 인간다움을 파괴하고 사람이 못 살 세상을 만듭니다.
   
우리는 풍요가 하나님의 복이지만 그것을 관리할 수 있는 지혜를 함께 받지 못하면 저주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람에게는 또 어떤 문제들이 있습니까?
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7a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양 떼와 소 떼와 장막은 많은데 그 땅은 그들이 함께 머물기에 좁았습니다. 많은 가축 떼에 비하여 먹일 풀과 마실 물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람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집짐승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해도 아랫사람들이 다투는 일로 두 사람 사이에도 실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2. 서로 다투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브람과 롯의 다툼은 우리네 살림살이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말에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화목하던 형제가 재산 문제로 지금껏 유지해 오던 관계가 깨어졌다는 것은 너무 흔한 이야기입니다. 요즘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거울이 이미 아브람 시대에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적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함께 누리는 화목한 형제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7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7b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아브람과 롯이 살고 있는 그 땅에 두 가족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 온 아브람 일가를 그 지역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 아브람의 행동을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3. 사람들이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소리를 지른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더욱이 자기 좋다고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는다면 문제입니다. 산 위의 동네처럼 교회의 일상은 그대로 세상에 보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교회는 유리 상자 속에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상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문제이기도 하지만 해결의 길잡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보다도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더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세상 가운데서 칭찬 듣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인생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에는 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답을 찾아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아브람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까?

II. 해결

8절 말씀입니다.
: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은 롯에게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너의 목자들과 나의 목자들 사이에, 어떠한 다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7절에서 ‘다툼’[리브]은 ‘말다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8절에서 ‘다툼’[메리바]은 ‘성을 내는 싸움’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말다툼에서 끝내고 더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조그만 문제가 있을 때 해결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비록 목자들 사이에 불편함이 있었더라도 가나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삼촌과 조카가 재산 때문에 싸우는 추한 싸움은 하지말자는 것입니다.
   
1. 싸움을 키우지 맙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문제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가 없는 곳은 공동묘지 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늘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있고, 사회에도 문제가 있고, 국가에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룩한 교회에서조차 문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문제로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갈라져 서로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수습하였습니다(행 6:1-7).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해결해야합니다. 문제를 키워서는 안 됩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욕심이 없을 수 없지만 욕심이 죄를 낳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더욱이 죄가 사람을 죽이도록 자라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욕심이 생길 때, 욕심이 죄를 낳지 못하도록 빨리 버려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싸움을 키우지 마십시오. 싸움의 불꽃이 일기 시작할 때 빨리 수습하시기 바랍니다.

싸움을 키우지 않게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다시 8절 말씀입니다.
: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람은 롯에게 “우리는 한 핏줄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아브람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은 ‘삼촌’이고 롯 너는 ‘조카’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삼촌으로서의 의무 이상 아버지로써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촌수나 위계질서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한 골육’임을 말하였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하여 먼저 아브람은 자신과 롯 사이에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2. 공통점을 확인합시다.
   
서로의 차이점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확대 포장해서 내세우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공통점을 찾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면서 서로 닮도록 하셨습니다. 부부가 더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개성을 중시한다고 사사건건 차이점만 들고 나서면 싸울 일만 늘어갑니다. 차이점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냉장고를 전혀 다른 냉장고로 선전하는 것과 같은 상업성에 길들여 진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천국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영생교회 교인이지요!
“우리는 한 친족이라!”(:8)

다툼을 키우지 않기 위해서 공통점을 확인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9절 말씀입니다.
: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평화를 위한 제안입니다. 아브람은 롯을 강제로 멀리 쫓아버릴 수도 있지만 간청합니다. 삼촌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다 펼쳐 놓고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부탁이라면 롯이 아브람에게 하여할 터인데 도리어 아브람이 롯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양보입니다.
   
3. 사랑으로 양보합시다.
   
양보는 없어서 문제인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인 세상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데도 이 지구의 다른 편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하루에 삼천 명이나 있습니다. 먹는 것을 양보하여야 합니다.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교통 문제가 심각할 때 우리가 먼저 양보해야합니다. 
   
양보는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양보는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자신을 ‘잘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양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추한 싸움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나라의 모든 보화를 가진 자로써 복음을 위하여 양보해야 합니다.
양보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양보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작은 욕심에 끌려가기 쉬운 우리가 어떻게 사랑으로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단순히 좌우를 둘러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저것 여러 조건을 따져 보았습니다. 즉, 롯은 탐욕에 찬 눈과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땅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요단 온 들을 택하였습니다. 
   
롯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롯은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음’(:13)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롯의 가정은 뒷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함께(창19:28)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롯에게는 물질 중심적인 애굽 정신이 남아있었습니다. 롯은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기적인 선택이 머지않아 몰고 올 불행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보이는 것을 따르지 맙시다.
   
많아서 문제가 되었을 때 양보로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양보한다고 사회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로 무책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바르게 판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크고 많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12절 말씀입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의 양보와 롯의 선택으로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살았고, 롯은 여러 도시에서 살다가 마침내 소돔으로 천막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롯이 소돔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소돔은 어떤 곳입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소돔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못할 짓만 하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도시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들은 죄인이었습니다. 롯에게는 매우 흥미롭고 유쾌한 일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롯은 사람의 기준을 따랐습니다.
   
반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랐습니다. 아브람의 지혜로운 행동과 희생적인 양보 때문에 둘 사이의 불화의 틈을 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막았습니다. 롯과 화평을 유지하고 이방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더욱 더 하늘의 분깃만을 의지함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어갔습니다.
   
5. 하나님의 기준을 따릅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예배자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기준을 따르면 죄인입니다. 
   
여러분의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내일을 위한 선택입니까, 아니면 영원을 위한 선택입니까? 눈에 보이는 데로 결정하는 것은 오늘을 위한 선택이지만 믿음으로 결단하는 것은 내일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문제는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움을 키우지 말고 공통점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양보해야 합니다. 바른 선택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데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야 합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무릎을 꿇는 사람입니다. 예배자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람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이름을 불러 예배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능력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 무릎을 꿇는 것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예배자로 세상을 살기 위하여 언제나, 어디에서나, 무엇에나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능력과 인도하심을 기도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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