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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을 세어보아라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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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세어보아라 (눅 15:1~7)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

성경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선한 목자’의 반대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악한 목자’나 ‘나쁜 목자’가 아니라 ‘삯꾼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12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선한 목자는 위험할 때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만 삯꾼 목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저 살려고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삯꾼 목자는 누구일까요? 예수님 당시에는 삯꾼 목자가 많았습니다. 보통 한 사람의 목자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숫자는 30마리에서 최대 75마리기 때문에 많은 양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삯을 주고 양을 맡긴 사람을 ‘삯꾼 목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삯꾼 목자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무조건 사이비, 엉터리 목자는 아닙니다. 다만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광야의 환경이 워낙 척박하고 황량하다 보니 양 주인은 삯꾼에게 양을 맡길 때 대략 20%의 손실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양이 100마리면 20마리 정도는 길을 잃어 탈진하거나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어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삯꾼은 자기가 맡은 100마리 중 20마리 정도는 잃어도 별 문제가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양을 다 키워 돌려줄 때 80마리만 돌려주면서 나머지 20마리는 길을 잃고 탈진해 죽거나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주인도 그 정도는 각오를 했기 때문에 물어내라는 소리도 안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삯꾼 목자는 허약해서 쓰러지는 양을 애써 돌보거나 소생시키려 할 필요도 없거니와 길을 잃은 양을 찾아 헤매거나 양을 공격하는 이리나 사자 같은 사나운 맹수와 맞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아, 오늘도 몇 마리 없어졌구나” 하면 그만이고 사나운 짐승이 공격해오면 나 살려고 먼저 도망가면 그만입니다. 그깟 몇 마리 잡아먹혀봐야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한 목자는 삯꾼이 아니라 내 양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한 마리만 아파도 내가 아픈 것처럼 가슴이 아프고, 한 마리만 길을 잃어도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매고, 사나운 짐승이 달려들면 몽둥이(시 23:4에 나온 ‘막대기’가 바로 이 몽둥이입니다)를 들고 생명을 걸고 싸웠습니다. 왜요? 남의 양이 아니라 바로 내 양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면서 수시로 양들의 숫자를 점검해야 합니다. 양들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혹시 광야의 뜨거운 햇빛에 기력을 잃고 쓰려져 낙오된 양은 없는지 수시로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대열에서 이탈한 양은 몇 시간만 방황해도 탈진해 죽거나 사나운 맹수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는 낮에 양들을 인도해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로 데려가면서도 수시로 세어야 하고 또 밤에 양들을 우리로 인도해서 넣을 때도 또 세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양의 숫자를 세어보니 100마리여야 하는 양이 아흔 아홉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잘못 세었나 싶어 아무리 다시 세어도 틀림없이 한 마리 부족한 아흔 아홉 마리입니다. 한 마리는 도대체 어디 간 것일까요? 낮에 인도하다가 없어졌는지, 무리에서 낙오해 뒤에 쳐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순간 목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목자가 삯꾼이라면 아마 양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서 20%까지는 괜찮다고 했지요? 그러니 그깟 한 마리쯤이야 대수겠습니까?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가 건재한데 말이지요. 아직도 열아홉 마리까지는 더 잃어도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선한 목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목자가 바로 이 선한 목자였습니다. 어떻게 그가 선한 목자인지 알 수 있습니까? 찾아 나섰거든요. 4절에 보세요.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선한 목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는 들에 두고 갑니다. 물론 들판에 아무렇게나 방치한 것은 아니고 아흔 아홉 마리도 문제 안 생기게 잘 놔두고 찾아 나선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과정이 자세히 안 나왔지만 목자는 틀림없이 양을 꽤 오랫동안 고생하며 찾아 헤맨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4절에 그냥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찾아내기까지” 다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 “찾아내기까지”라는 한 마디 속에서 목자가 상당히 오랜 시간 고생하며 찾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 만 한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아낼 때까지” 찾아다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찾은 후에 목자는 너무 기뻐합니다. 5절에 보면 “즐거워 어깨에 메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즐거워’라는 말은 그냥 기쁜 정도가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노래도 부르며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홍분이 되는 상태를 뜻하는 낱말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으면 노래를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며 그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왔겠습니까? 쉽게 찾았으면 이럴 리 없습니다. 찾아 나섰더니 바로 비탈 아래 있더라 하면 이러지 않습니다. 너무 고생하고 찾아 헤맸는데 마침내 찾으니 이렇게 기쁘고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집에 돌아와 벗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면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양 한 마리 값보다 적게 나올 리가 있겠습니까? 틀림없이 양 몇 마리 값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목자의 기쁨이 너무나 커서 이렇게 손해까지 봐가며 잔치를 벌일 정도라면 양을 찾는데 너무 힘들고 고생했다는 뜻이 됩니다.

❚잃었다 찾은 자의 소중함

오늘 우리가 이 잃은 양의 비유를 바로 이해하려면 이 말씀의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누가복음 15장에는 온통 잃은 것을 되찾은 기쁨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잃은 것을 찾은 비유 세 가지가 나오지요. 첫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백 마리 중에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비유이고, 두 번째가 8절부터 나오는 열 드라크마 중에서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은 비유이고, 마지막 세 번째가 11절부터 나오는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 즉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되찾은 비유입니다. 그런데 왜 누가복음 15장에는 이렇게 잃었다가 찾은 비유가 많이 나올까요? 그 까닭은 바로 15장 첫머리인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당시 유난히도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이 바로 세리와 창기 같은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안식일이나 율법을 지킬 수 없어서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은 사람들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스스로 의롭다 여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을 가장 경멸했는데 이날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 예수라는 작자는 왜 만날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도 같이 먹는거야?” 하고 말입니다. 이들이 항상 예수님을 ‘죄인의 친구’(마 11:19, 눅 7:34)라고 부르며 경멸한 것도 바로 이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예수님이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어리석은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비유를 세 가지나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 비유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온 세 개의 비유, 즉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렇게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를 세 번이나 들려주셨겠습니까? 그 답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맨 마지막 절이자 탕자 비유의 맨 마지막 절인 32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읍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탕자는 너희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왜 저 탕자 놈만 그렇게 두둔하고 잔치까지 베풀어 주냐고 투덜거리는 맏아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너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느냐? 아버지는 집에 잘 있으면서 말 잘 듣고 산 맏아들도 귀하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며 다 탕진하고 돌아온 저 둘째 아들도 똑같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는 지금까지 집에 잘 있었고 네 동생은 나가서 방황하고 죽을 고생 하고 돌아왔으니 내가 크게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잃었다가 찾은 기쁨이 더 큰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들 하나를 잃었다가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만 늘어놓은 큰아들처럼 세리나 죄인들처럼 영적으로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수군거린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은 앞서 소개한 삯꾼 목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돌보라고 보낸 목자들 아닙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잘 먹이고 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야 할 목자였는데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백성들을 정죄했습니다. 율법의 올무로 백성들을 매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세리나 창기들처럼 율법을 잘 못 지키면 더러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경멸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주장을 위해 백성들을 판단하고 정죄한 이 사람들이나 양을 잃어버리고도 귀찮아서 안 찾아 나서고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사나운 짐승 달려들면 걸음아 나 살려라 먼저 도망가는 삯꾼 목자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들이 백성의 목에 율법의 올무를 씌운 것은 마치 양이 자꾸 딴 데로 가고 길 잃어버리는 것이 귀찮다고 해서 양의 목에 줄을 감고 꼼짝 못하게 붙들어 두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또 주인이 삯을 주며 내 양 좀 잘 돌봐달라고 했더니 한 20% 정도는 희생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어떤 양은 죄인 만들고, 어떤 양은 포기하고, 어떤 양은 내다 파는 삯꾼 목자처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잘 돌보라고 맡기신 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죄인이라고 잃은 양이라고 내팽개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양 아흔 아홉 마리는 아직 남았으니 그깟 한 마리 포기하자가 아니라 끝까지 찾아 나선 선한 목자는 예수님 자신이요, 하나님 아버지지만 아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삯꾼 목자였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삯꾼들이 잃었다가 되찾은 선한 목자의 마음이나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며 날마다 동구 밖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눅 15:32). 물론 이런 삯꾼 목자들은 나중에 하나님께 상을 받을 리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께 큰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양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주인님, 여기 양 80마리가 있습니다. 관습에 허락된 대로 20마리는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머지 80마리를 가지고 왔으니 괜찮지요?” 하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관습이라니? 무슨 소리냐? 내가 분명히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했는데(마 18:6) 나에게 천하보다 소중한 그 양들은 어디 갔느냐?” 하고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목자의 심정으로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牧師)라는 말은 칠 목(牧), 스승 사(師) 즉 목자로서 하나님이 맡기신 양을 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선한 목자가 되어야지 하나님께 책망 받는 삯꾼 목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목사는 늘 부지런히 셉니다. 양의 숫자를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배 때 “오늘 좀 사람이 많이 왔네, 오늘은 좀 자리가 비네” 수준으로 느낄지 모르지만 목사는 늘 숫자를 셉니다. 

주일 낮 예배에는 양이 몇 마리 왔는가? 주일 저녁에는, 또 수요일에는, 새벽에는 몇 마리 왔나? 해마다 연말이 되면 부목사님들과 앉아 세고 또 셉니다. 올해 이사 가거나 다른 교회 간 양은 몇 마리이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사라진 양은 몇 마리인가? 또 올해 새로 전입 온 양은 몇 마리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헤매다가 다시 돌아온 탕자 양은 몇 마리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인 저의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세고 또 세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다가 한 마리라도 없어진 것을 발견하면 정말 큰일입니다. 정말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제 가슴이 찢어집니다. 아직 수백 마리가 남아있지 않냐고 한다면 그건 목자의 마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수백 마리가 남아 있든, 수천 마리가 남아 있든 상관없이 단 한 마리라도 없어진 것을 알면 목자는 가슴이 찢어집니다. 솔직히 제가 부목사 때는 잘 못 느꼈습니다. 왜 자꾸 담임목사님은 숫자를 세라고 하지? 숫자가 다가 아닌데 하며 불평도 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가 되고 보니, 대장 목자가 되고 보니 양이 남의 양이 아니라 내 양입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의 심정이 어떤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밤낮으로 세고 또 세는 것입니다. 늘 어, 오늘 몇 마리 안 보인다. 잠시 출타했는지, 아니면 길을 잃었는지 잠이 안 와요. 이것이 목사의 마음이요 목자의 마음입니다.

오해는 하지 말고 들으세요. 저는 최근 이사하는 성도들을 보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직장 때문에 가는 것이고 더 잘 되어서 가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래서 축하하면서도 아픕니다. 그렇다고 이사하는 분들 미안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목자의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가 잘 된 것을 알면서도, 기뻐하면서도 눈물짓는 그런 심정임을 이해해 주세요. 또 세어보다가 없어진 양이 있음을 알게 되면 너무 충격적이고 또 아픕니다. 

그들 중에는 몸이 아프거나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못 나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면 목자의 마음은 참 아픕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빨리 회복되고 해결되어 다시 오게 해달라고요. 그들 중에는 “저 교회 안 갑니다. 다른 교회 갑니다” 하고 말하고 가는 분들도 계세요. 목자의 마음은 그런 말을 들을 때 찢어집니다. 그들 중에는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모르게 슬그머니 사라진 분도 계십니다. 그럴 때면 목자는 가슴을 쥐어짜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양을 이렇게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으니 나는 삯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 나온 목자처럼 그 때부터 목숨 걸고 찾기 시작해서 마침내 찾아낸다면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천하를 얻은 것보다 기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안 세었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는 세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역장이나 지단체의 회장이나 항존직분자나 팀장이나 교회학교 부장이나 모든 교회의 책임을 맡은 분들은 똑같은 책임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들도 세어야 합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길을 잃은 양이 생기고 사라진 양이 생긴다면 그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가슴이 찢어져야 당연한 일입니다. 담임목사가 한 교회의 모든 양을 책임 진 목자라면 여러분은 구역을 책임지고, 부서를 책임지고, 팀과 지단체를 책임진 목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양이 사라지고 그 양이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 목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선한 목자냐? 삯꾼 목자냐? 너는 진짜냐, 가짜냐?” 하고 말입니다. 어떤 핑계도 변명도 소용없습니다. 양이 없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제가 좀 바빠서, 좀 힘들어서요, 그 양은 제 책임이 아닌데요? 제가 싫다고 나갔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런 변명이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처럼 “제가 그런 사람이나 지키는 자입니까?”하고 하나님께 항의라도 하시렵니까?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성도가 한 마음으로 목자의 마음을 가진 교회는 다릅니다. 그런 교회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길 잃은 양, 사라진 양 한 마리에 목사뿐 아니라 온 성도가 가슴 아파하며 내 책임이라며 “찾아낼 때까지” 찾아나서는 교회, 그러다가 그 길 잃은 양이 집으로 돌아오거나 또 한 마리 새로운 양이 들어올 때 잔치를 베풀며 뛸 듯이 반기며 기뻐할 줄 아는 교회는 다릅니다. 세어보고 또 세어보는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풍성한 양을 허락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 성장학이나 전도학 이론으로 볼 때 전도해서 들어온 성도들 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숫자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해에 100명이 들어오면 그 중에 반드시 3~40명은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빠져나가는 숫자에 대해 별로 죄책감을 안 느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다 변명이었다는 것을요. 관습상으로 20%는 잃어도 상관없다는 삯꾼 목자의 심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아닙니다. 단 한 마리라도 그는 하나님께 천하보다 소중한 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세고 또 세어야 합니다.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새해에는 저와 목회자들뿐 아니라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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