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 잡초 잡초
  • 246
  • 0

첨부 1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남들에겐 다 있는데 내게만 없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슬픈 것도 없습니다. 그나마 뒤늦게라도 그것을 갖출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 그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절망입니다. 
어느 날 아침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버린 요셉 그는 절망의 울음을 울었습니다. 하지만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의 생활을 시작한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밝은 표정으로 꿋꿋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자기를 집안의 총무로 세웁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모함을 받아 다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갈수록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그가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비전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꿈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깊은 절망의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하나님이 그 꿈대로 이루어주실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루아침에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자로 감옥의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로 화려하게 순식간에 등장을 합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오히려 감사의 시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그는 변함없이 고백합니다. 그랬기에 때가 되매 형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요 잃어버렸던 형제애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이처럼 우리를 놀라운 승리자로 든든히 설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세한탄이나 하며 절망에 빠져드는 믿음이라면 그에게는 절망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허락하시는 바 모든 약속대로 이루실 줄을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은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주님 앞에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지 바디매오 그는 이름조차 없습니다. 바디매오라는 말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맹인입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랬기에 그에게는 이름조차 붙여주지 않았던 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는 일은 거지입니다. 정말 거지같은 인생입니다. 한 푼 적선하는 돈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습니다. 나의 힘만으로는 살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저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루 한 순간도 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되는 일 하나 없었던 사람입니다. 

무언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희망이 절망이었던 사람입니다. 도대체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살아갈 재미 하나 없는 인생입니다. 뵈는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사람이 돌아버리면 눈에 뵈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돌아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냥 태생이 그런 겁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지만 이 사람은 그럴 자격조차 없습니다. 누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데 누구를 따를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랬던 그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가 저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너도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누군가가 한 마디 해 주었을 것입니다. 돈 한 푼 주면서 “당신도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눈을 뜰 수 있을 텐데, 눈만 뜰 수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면서 혀를 찼을 것입니다. 그 말에 바디매오는 귀가 번쩍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좀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나요?” 그래서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그리고는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셨다. 그랬더니 맹인이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했다. 이에 예수님이 그 눈에 다시 안수하셨더니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 

“그럼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눈을 뜰 수 있겠네요?”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걸.” 그 날부터 이 사람은 어떻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도와준다고 한들 한 곳에 머물고만 계신 것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한 가지 길은 있습니다. 그것은 갈릴리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그러기 위해서 지나는 길이 바로 여리고입니다. 그렇다면 여리고 길목만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예수님이 그 곳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던 차에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면서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가 지나가시는 건가요?” 물을 때 누군가가 알려줍니다. “예수님이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바디매오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합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 바디매오는 볼 것 없이 튀어 일어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방향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고 다른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저렇게 꾸짖으니 잠잠해야지 아니면 국물도 없겠다”고 했다면 이 사람은 영영 눈을 뜰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꾸짖을망정 더 크게 외쳐댑니다. 혹시 그래도 기회가 주어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순간 떠들썩하던 행렬이 조용해졌습니다.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십니다. 

그래 그들이 그 맹인을 부릅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그랬더니 바디매오의 하는 꼴을 보십시오. 그냥 맹인의 겉옷도 다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옵니다. 말이 뛰어 일어나 나아오는 것이지 실제 그 걸음걸이가 온전하기나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앞을 보지 못하는 입장에서 그 걸음걸이가 아무리 뛴다고 한들 그 모습이 오죽하겠습니까? 결국 바디매오는 그토록 원하던 바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원하던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내 스스로 누구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뜻한 바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바디매오 그는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인정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 

그래 그는 비록 다른 사람들의 온정을 구하는 길이긴 해도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인생을 가꾸고자 했습니다. 결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결코 나는 지금처럼은 안 살 거다. 그는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소리소리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결코 그러한 자기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보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열정을 가지고 외치고 또 외치는 것입니다. 그는 벳새다의 맹인처럼 자신도 예수님만 만나면 눈을 떠서 볼 수 있다고 분명히 믿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더욱 뜨겁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이요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함에도 불구하도 더 뜨겁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났고 그토록 바라던 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끔도 되었습니다. 

그래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연약하고 부족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해도 그러한 나의 모습을 내 스스로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삶은 새롭게 시작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대학 시절 2년 선배였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특별히 공부에 뛰어났던 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분 손에는 항상 한 권의 책이 들려있었습니다. 그것은 헬라어 교본이었습니다. 다른 책도 물론 보았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다른 과목이나 책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저 오나가나 헬라어 교본만이 그 손에 들려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모교에서 헬라어 강의를 맡아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모교의 정교수로서 여전히 후배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분이 모교의 정교수의 자리까지 이르게 된 배경은 그의 헬라어에 대한 열정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헬라어만 가르치는 전문교수가 안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더욱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하고 헬라어에 그렇게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 헬라어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헬라어에 매진했습니다. 거기다가 나는 반드시 헬라어를 가르치는 교수가 될 거다. 그 길을 하나님이 지켜보시며 도우신다고 하는 긍정적인 믿음까지 더해졌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은 곧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 길이 오직 주님 안에서만 바로되어질 수 있음을 깨달아 주님 안에서 내 길을 바로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울러 끊임없이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것은 그 소원에 대한 열정이요 열망입니다. 주님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믿음 긍정하는 믿음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바로 바디매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그는 달리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의 부르짖음은 단순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바디매오처럼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부르짖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 그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예수님을 만났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니 그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누군가 그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부러 바디매오를 찾아와서 전해주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우연히 지나가다가 바디매오를 보며 문득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을 전해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작정하고 찾아왔든 우연스럽게 이야기하게 되었든 간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그것도 바로 직전에 이루어진 벳새다에서 맹인을 고쳐주셨다는 소식을 전해준 그 사람이야말로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디매오를 불쌍히 여겨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기에 바디매오는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고 또 예수시라는 말에 뛰어 일어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쳐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나는 우연찮게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한데 그런 나의 작은 관심이 작은 배려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복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별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 것도 아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생명수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가 지니고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와서 안드레가 했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너무도 보잘 것 없어서 남들 앞에 내놓기조차 부끄러운 그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한 사람 먹기에도 부족한 것만 같았던 그것이 주님 손에 들려질 때 그 오병이어는 더 이상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오병이어를 내놓은 고사리 손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누구보다도 더 배고파했을 그 고사리 손길이 자기 밥을 예수님께 내미는 그 마음을 보십시오. 얼마나 예쁩니까? 

그러기에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측은하게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마음은 사랑의 감동입니다. 정말 가슴 뭉클한 정겨움입니다. 이러한 따뜻함이 있는 한, 세상은 결코 메마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그 따뜻함은 우리의 마음을 녹이고도 남습니다. 많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뜻한 한 마디만으로도 족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내밀어주는 손길만으로도 족합니다. 

예수님이 바디매오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주님이 나에게 물으십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주님 앞에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올려드렸습니다. 2010년을 시작하면서 새해의 소원이라고 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소원을 주님 앞에 올려드렸습니다.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원 없이 베풀고 나누며 섬기며 가르치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신학교 교장으로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국내 신학교 사역뿐 아니라 올해는 중국 신학교도 분기마다 한 번씩은 다녀오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봐야 북경 두 주간 연변 두 주간입니다. 하지만 저 혼자 하는 것은 아니기에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또한 준비하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목사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제 임지를 좀 바꿔주실 수는 없나요? 문제가 있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이 너무 힘이 듭니다. 한 주일에 십 만원 이십 만원 나오는 예물 가지고 교회 기본비용을 지불하고 나면 생활할 것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니 이건 부족한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해외 선교뿐 아니라 국내선교에 힘써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국내 들어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내 선교사도 후원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연약한 이웃 교회를 도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한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억만금을 들여서라도 주님을 전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을 한다면 얼마든지 더 잘 살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한 영혼을 붙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듯 그러한 마음으로 국내 작은 교회를 우리가 지원해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교회 역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원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랬던 우리교회가 놀랍도록 세워진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나누어주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최소한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재장의 십분의 일 이상을 구제와 선교를 위해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이 우리교회와 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들을 복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한번 그 시기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목사님께 주머니를 다 털어서 쥐어주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생각해봅니다. 마음껏 나눌 수 있다면 마음껏 섬길 수 있다면……. 결코 누군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건 배고픈 정도가 아닙니다. 생존의 문제입니다. 목회자의 삶이란 그렇습니다. 생활비를 많이 받는다고 해서 제 뱃속을 채우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아니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건 내 뱃속을 채우라고 주신 것이 아님을 믿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나 쓸 것도 모자라는데도 다른 약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나마 있는 것도 다 털어주는 그게 바로 목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제가 더욱 이렇게 베풀고 나누는 일에 더욱 신경 쓰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는 자에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안겨주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용기를 북돋아주는 따뜻한 마음 깃든 말 한 마디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왜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까? 아니 맹인이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쳐대는데 그가 무얼 원하는지 예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끙끙대지 말고 부르짖어 구하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이것이 이렇게 저렇게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시인하여야 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이 일을 능히 이루실 줄 믿습니다. 하지만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한데 마음으로는 간절한데 왜 그걸 입을 열어서 구하지 않습니까? 

왜 혼자서만 끙끙대고 있습니까? 부끄러워서요? 안 될까봐서요? 그래서는 결코 아무 것도 이루어질 것이 없습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그래도 구해 보기라도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한데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걸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입을 열지를 못합니까? 그게 바로 우리가 속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요? 창피는 잠시뿐입니다. 오히려 바디매오는 그럴수록 더욱 소리 질렀습니다. 

사람들이 꾸짖는다고 해서 조용했더라면 결코 그는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아뢰십시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고백하십시오. 내게는 이런 저런 것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이런 저런 일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이 역사해 주십시오. 얼마든지 구해도 아무리 입을 크게 열어도 하나님은 결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보세요.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는 믿음을 버리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세요. 그건 어디까지나 내 믿음입니다. 믿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어 놓으면 주님 앞에서 시인하면 주님이 다 이루어주시는데 주님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하시는데 시인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고 로마서는 기록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믿음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베푸십시오. 나누십시오.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힘을 북돋아 주십시오. 함께 해 주십시오. 어떤 형편에서라도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막지 마십시오. 나누는 손길을 거두지 마십시오. 없기에 더 나누십시오. 사르밧 과부는 찢어질 듯이 가난했습니다. 더 이상 먹고 살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누었더니 주의 종을 섬겼더니 베풀고 대접했더니 먹고 살길이 열렸습니다. 더 이상 염려할 것도 없었습니다. 

죽음마저도 저를 괴롭힐 수가 없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었어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섬기며 베풀고 나누는 자의 받는 복입니다. 그 복은 자기 혼자 누린 것도 아닙니다. 자식까지도 함께 그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든지 우리가 불쌍히 여길 대상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소개해주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십시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리고는 주의 사랑으로 그들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십시오. 아울러 내가 먼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신대로 우리의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