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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몸을 굽히고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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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몸을 굽히고 (요 8:1~1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판의 충돌

지난 12일 아이티에서 진도 7.0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고 17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재민 수는 300만 명이 넘으며 이번 재해로 고아가 된 아이들 수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폭삭 주저앉은 집들, 그 무너진 짚더미에 깔려 죽은 사람들, 죽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절규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도 아팠습니다. 

뉴스 보도를 듣자니 이번 지진은 아이티 위쪽의 북미판과 아이티 남쪽의 카리브판이 서로 수평이동을 하며 충돌을 일으켜 발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판(plate)의 충돌. 우리의 육안으로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며 사는 지구 지표면 밑에는 10여 개의 거대한 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판은 매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수평이동을 한답니다. 그렇게 수평이동을 하던 판이 반대편에서 오던 판을 만나면 충돌하게 되고 그 충돌로 인해 지진이 발생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그 이론이 맞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 이론은 지질학적으로만 맞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적으로도 맞는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번 아이티 대지진처럼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킨 일들은 꼭 자연재해, 판과 판의 충돌을 통해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지요. 문화와 문화의 충돌, 종교와 종교의 충돌, 국가와 국가의 충돌, 사상과 사상의 충돌, 이념과 이념의 충돌. 그와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충돌을 통해서도 무고한 생명들이 수십만 명씩, 수백만 명씩 죽어갔던 것이 우리 인류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 여호수아 헷셀이라는 사람은 ‘역사는 악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 랍비요 평화, 인권운동가로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 싸웠으며,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 운동을 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헷셀은 ‘역사는 악몽이다’는 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습니다. ‘역사는 무엇인가? 전쟁, 승리 그리고 다시 전쟁. 많은 사람의 죽음 그리고 많은 눈물. 그토록 많은 공포. 그리고, 그토록 적은, 아니 거의 없다시피한 뉘우침!’ 저는 그 문장을 만나면서 가슴 아프지만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고한 죽음, 절망과 절규, 가슴 찢기는 아픔을 수 천, 수 만년을 반복하면서도 인류는 왜, 도대체 왜 그 충돌들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요? 생명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그 좋은 가르침들이 넘쳐나건만 왜 그 충돌들은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흔들리는 터전, 흔들리는 판을 삶의 자리로 삼고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혹은 원죄일까요?

• 충돌을 조장하는 사람들

아이티 땅 저 깊은 곳에서 일어난 판과 판의 충돌을 상상하면서 떠오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8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씩씩거리며 들이닥칩니다. 그들은 어떤 여자를 개 끌고 오듯 끌고 와서는 보란듯이 사람들 앞에 세워놓고 예수님께 따지듯이 묻습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요 급작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입장에서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셨을 때부터 준비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하필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었느냐?’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말씀하셨고 이미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그 발언이 신성모독이라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말씀하셨고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모세와 관련해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을 믿겠느냐?’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지 않으셨을지는 몰라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만들었고 대립의 각을 세우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적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유대인들의 반응은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하고 혹 나도 그들의 위치에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훌륭한 말들을 한다고 해도 그가 나의 신념과 내가 오랫동안 믿어오던 가치관에 반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그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말끝마다 반대의견을 내세운다면 그와의 마음의 거리는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에 대해서 한 번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하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불편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좀더 미움이 쌓이면 그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반복되고 주변의 눈을 의식해 아닌 척하고 있다가 그가 약점을 보일 때면 그런 악감정은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됩니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악감정이 잘 드러난 대목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없앨 궁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분이셨으며 개중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없애기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예수를 없애기 위해서는 대중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습니다. 고심 끝에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율법’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모세의 율법,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율법’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 따르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간음, 간통. 혼외정사는 굳이 모세의 율법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으로도 쉽게 용인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사람들의 감정에 반할뿐더러 율법적으로도 처벌하라 명시 되어 있는 일을 가지고 예수 앞에 덫을 놓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너의 법대로 하여라’ 라고 말씀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당신의 생명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되지만, 그것은 그동안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에 반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며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나의 몸도 너희의 생명을 위해서 떼어주겠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셔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 사건을 빌미 삼아 예수에게 그의 말 값을 받으려고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 그럼 이 여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이미 그때 모여든 사람들의 손에는 돌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 돌이 여인에게 날아들 수도 있고, 예수님에게도 날아들 수 있는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충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충돌의 희생자

잠시 고민에 빠져 계신 예수님,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 그 사이에 간음한 여인이 서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면서 머릿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나와 함께 있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거지? 아, 함정이었던 말인가? 그럼 난 예수님을 잡기 위한 도구로, 미끼로 쓰였던 건가? … 정말, 예수님은 뭐라 말하실까? 나는 이렇게 허망하게 죽고 마는 것인가?’

세력과 세력이 충돌하는 곳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북미판과 카리브판이 충돌하는 곳에는 수십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하는 곳에서는 수백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하는 곳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충돌이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우익과 좌익, 사측과 노측, 남자와 여자,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선배와 후배, 혹은 같은 그룹안의 분파, 더 나아가서 개인 내면의 충돌까지 수많은 충돌들이 존재합니다. 그 모든 충돌에는 희생이 발생합니다. 양자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명분과 입장을 가지고 있겠지만 대립의 각이 크면 클수록, 충돌이 크면 클수록 그로인한 피해도 커집니다.

그때는 꼭 그 말을 해야할 것 같아서 했는데,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아서 했는데 나중에 그로인해 서로 주고받은 상처를 바라보며 때늦은 후회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일단 충돌하기로 마음먹고 나면 그에 따른 희생은 잘 보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희생이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더욱 그렇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 여자가 죽든지 예수가 죽든지 자신들이 손해 볼 것은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충돌을 통하여 자신이 잃을 것이 별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충돌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그렇지요. 힘을 가진 사람들은 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이 알아서 기도록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을 법한 충돌의 의지를 사전에 분쇄시키는 거지요. 그러다 누군가 하나 자신의 권위에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에게 제대로 실력을 행사해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본때를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지금 율법의 힘을 빌려 예수에게 본때를 보여주려하고 있습니다. 한 여인의 살고죽음의 문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죠.

• 다시 몸을 굽히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 예수님,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굽히십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끄적이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가?’라는 질문는 성서학 자들도 풀어내지 못한 수천 년된 미스테리입니다. 어떤 사본에 따르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죄목을 쓰셨다는 말이 나와 있다고는 합니다만 그리 신뢰는 가지 않습니다. 예수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잠시 뻘쭘해 있던 유대인들은 다그칩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실꺼요?’ ‘돌로 칠까요 말까요?’ ‘어디 그 말 잘하는 입으로 한 말씀 해보슈.’ 예수님께서는 몸을 일으키시고는 말씀 하십니다. 7절 말씀인데요,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7절의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일깨웠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둘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7절의 말씀도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그보다 8절에 나온 예수님의 행동이 더욱 중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 자리를 바로 떠나셨다면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저마다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굶주린 짐승처럼 예수를 향해 으르렁거리던 성난 유대인의 감성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돌을 움켜쥔 팔뚝의 힘은 그런 그럴싸한 말 한마디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두 번째 몸을 굽히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때 바닥에 무엇을 쓰셨는가보다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신 행동에는 ‘이 여인을 치려면 나도 함께 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거리는, 예수님께서 여인을 가리켜 ‘저 여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 여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서 그리 멀지 않은, 혹은 가까운 거리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날아드는 돌은,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겠다는 뜻으로 몸을 웅크리고 앉으신 예수님을 향해서도 얼마든지 날아올 수 있는 돌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거대한 판(plate)의 힘에 의지해 예수와 예수의 말과 부정한 죄를 지은 여자를 깔아뭉개려던 성난 군중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율법보다 큰 이가 앉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 진짜 자기 말대로 저렇게 죄된 여자 하나를 위해서, 죽어 마땅한 자를 위해서도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이었어. 누가 저럴 수 있단 말인가? … 저 사람 … 진짜 메시아 아닐까?…’ 
예수님께서 두 번째 몸을 굽히시고 여인 가까운 곳에 앉아계신 모습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팔을 펼쳐 상처 받은 한 영혼을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작은 생명 하나를 감싸 안으시는 모습, 그 생명 하나 지키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웅크려 그 생명을 덮으시는 모습, 자신에게 어떠한 피해가 온다 해도 그 상처받은 영혼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모습은 충돌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성난 마음을 멈추어 세웁니다.

• 몸을 굽힌 사람들

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숲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한 마리의 비둘기가 급히 날아와 살려달라고 합니다. 수도자는 비둘기를 품속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러자 잠시 후 매가 한 마리 날아옵니다. 그 사람 품속에 비둘기가 숨어든 것을 알고 매가 이야기 합니다. “그 비둘기를 나에게 내놓으시오. 그 비둘기는 내 먹잇감이오” 수도자는, “안 돼요. 이 비둘기의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살아있는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해쳐서는 안 돼요.” 라고 말합니다. 매가 비웃으며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소. 비둘기의 목숨만 중요하고 나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단 말이오? 나는 비둘기를 먹지 못하면 굶어 죽는단 말이오.”

잠시 고민하던 수도자는 한 덩이의 고기를 원하는 매를 위해 비둘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엉덩잇살을 떼어주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면 매도 살고 비둘기도 살고 자신도 조금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것이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니까요.
저울을 가져다 놓고 자신의 엉덩잇살을 베어서 재어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둘기 몸무게만큼이라고 생각했는데 비둘기 쪽이 더 무거운 겁니다. 다시 더 많은 살을 베어 올려놓았는데 여전히 비둘기가 더 무겁습니다. 결국 두 다리를 잘라서 올렸는데도, 또 팔을 잘라서 올렸는데도 역시 비둘기가 더 무겁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온몸을 올렸습니다. 그때서야 저울대가 수평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가치와 가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며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몸을 굽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었습니다. 몸을 둥글게 굽혀 그 품 안에 작은 생명 하나를 품으신 예수님, 상처받은 그 생명이 더 다치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신 예수님.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일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고 사시던, 자기를 지워가시던 어머니. 세월이 갈수록 점점 등이 굽어가시는 어머니. 남편과 자식들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시고 삶의 어려운 굽이굽이마다 더욱 힘써 기도하시던 어머니. 고등학교 시절 어느 추운 겨울밤,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잠시 들렀던 교회 기도실에서 그 늦은 시간까지 기도하고 계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몸을 웅크리시고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드시며 기도하시던 어머니. 그 모습은 참으로 거룩한 느낌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교회 권사님들도 새벽에 뵈면 기도하시는 모습이 저희 어머니와 어쩜 그리 똑같으신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저분들의 기도 위에 우리교회가 서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건 이래서 잘 못 됐고, 저건 저래서 잘 못 됐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몸을 세우고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데도 나름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제안들을 통해 어떤 성과를 얻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로만 그칠 때 그것은 아니 말함만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사람 마음에 상처를 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기 쉽습니다. 그러나 묵묵하게 작은 일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여 애쓰는 사람은 그 공동체의 점성黏性을 높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한 명 두 명 늘어날수록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오후에는 임원교육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헌신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헌신獻身. 몸을 굽히지 않고 헌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전보다 한 번 더 몸을 굽히는 사람들이 됩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상처받은 한 사람을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 생명을 위해, 나에게 맡겨진 작은 사명을 위해, 우리 교회 공동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을 위해 한 번 더 몸을 굽힙시다. 
판과 판의 충돌, 가치와 가치의 충돌은 계속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충돌로 인한 희생자들 또한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악몽 같은 역사는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길은 있습니다. 희망은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 한 명을 위해 몸을 굽힌, 상처 받은 한 영혼의 곁을 끝까지 함께한 예수가 길이요 희망입니다. 그 아름답고도 거룩한 예수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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