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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빚진 자라 (롬 1: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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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빚진 자라 (롬 1:13~17)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추위도 물러가는 듯합니다. 지난 주간,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동계단기선교팀 사역 하나님 은혜 가운데 마치고 돌아왔습니다(또 중등부, 고등부 수련회도 은혜 중). 기도로 함께 동역해 주신 교우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캄보디아 선교는, 우리교회 세계선교의 세 축 가운데 하나인데(북방선교,인도차이나선교,이슬람선교), 선교전략적인 Base Camp를 구축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선교지입니다. 이미 2008년 12월에 이성욱․오영미 선교사님 가정을 파송했습니다. 금년 12월에는 자비량전문인선교사 한 가정을 또 파송하려고 합니다. 이미, 작년부터 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할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宣敎입니다. 宣敎的인 삶을 살아야 하고,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우리의 의무이자, 빚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에게, 인간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우리는 육으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母胎로부터 태어납니다. 母胎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우리 삶에 굉장히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습니다. 성격, 기질, 삶의 형편, 장래, 삶의 방식, 등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칩니다.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만 생각해도 신비입니다.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도, 태어나지 못하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습니다. 수억의 精子 중에서, 오직 하나의 정자만이 卵子를 만나, 생명으로 잉태됩니다. 우리가 人間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만도, 문자 그대로 難中之難事입니다. 

이처럼 육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무리 귀하다 하여도 그러나, 육적인 태어남으로만 멈추어 버린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肉으로 난 것은 육이요, 靈으로 난 것은 靈이니…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3, 5-6). 아멘. 

그렇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더 이상, 육적인 존재만이 아니기 때문에, 次元이 바뀐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선교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예전에는, 들어보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국격國格이라는 말입니다. 나라의 格을 높여야 한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우리나라가 세계 열방 속에서, 國格을 논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이고, 축복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야 국격을 높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 더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고 봅니다. 60, 70년대 한국교회는 기복적인 신앙을 지향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80, 90년대 한국교회는 외향적인 교회성장을 지향한 것이 사실입니다. Base Camp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준의 신앙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頂上을 응시할 때가 되었습니다. 믿음의 정상으로 과감하게 나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使命的인 삶을 삽니다. 使命을 한자로 풀면 ‘보냄 받은 목숨’, ‘심부름 받은 목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흔히 ‘목숨’이라 합니다. 이유는, 사람의 생명의 숨길이 ‘목’에 달려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면 인간의 생명은, 목숨이 아닙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呼吸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 22).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呼吸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146, 4). 창세기 2, 7말씀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런 말씀들을 보면 인간의 ‘숨’은 ‘목’에 있지 않고 ‘코’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목숨이라기보다 ‘코숨’이라 해야 옳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코에 있는 코숨이라면,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버릴 ‘코숨’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삶 아니겠습니까? 使命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작별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심을 드러냅니다(행 20, 22-24)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聖靈이 각 城에서 내게 證言하여, 結縛과 患亂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主 예수께 받은 使命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코숨)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는 코숨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使命입니다. 사명을 망각하고 사는 인생은, 그저 육으로 난, 코숨에 불과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다하여도, 그것은 코숨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며 살면, 이 모든 것(의식주문제, 코숨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덤’(프로스테데세타이)으로 주신다는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地上의 消耗品만을 구하며 사는 삶은, 너무나 어리석은 삶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갈 때, 광야 40년 동안, 그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시고,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손과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의복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어찌, 사람으로서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나라에도 격이 있습니다. 격이 높은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신앙에도 格이 있습니다. 이젠 信仰의 格을 논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신앙의 격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다 가지고 있습니다. 使命的인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꼭 가져야 할 한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빚져 보신 경험 다 있으시지요? 인생을 살다 보면 불가피하게, 빚도 지고 삽니다. 빚 안지고 살수만 있다면, 더 없이 좋지요.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美國人, 빚). 빚을 지고나면, 갚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빚을 갚지 아니하면, 차압이 들어오지요. 갚을 능력이 없으면, 파산하거나 부도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품격 높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마음에 부담이 될 만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태도가 ‘빚진 마음’입니다. 빚진 마음에, 내 人生이 몰리듯이 살아야 품격 높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무슨 빚? 福音의 빚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면, 그렇습니다. 빚은 어지간해서 기쁜 마음으로 갚기가 참 어렵습니다. 당연히 갚아야 하는 빚이지만, 빚 갚을 때 무슨 마음 듭니까? 꼭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내가 빚 졌다는 것은 그만큼 恩惠를 입었다는 것인데, 빚질 때의 마음과 빚 갚을 때의 마음이 다른 것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캄보디아 단기선교팀 첫날(월) 아침 일어나 경건회(찬양, 말씀묵상, 기도)를 가졌는데, 그날 아침 말씀이 고린도전서 9, 16-23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가 막힌 말씀을 묵상케 하셨습니다. 그 말씀 중에, 제 마음을 두들기는 전광석화와 같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不得不 할 일임이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마지못해 하는 것이, 부득불).” 사도 바울의 말이,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복음의 빚진 것 갚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굉장한 重壓感에 시달리고 있는 바울의 심정이 잘 드러납니다. 그 다음 말씀 계속 보면, 자기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바울 자신의 자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행하는 自意가 아니라는, 신랄(辛辣)한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누구의 뜻이라는 말입니까?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 주신 主님의 뜻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自意로 복음 전하는 자의 삶을 사십니까? 自意로, 그렇게 아깝게 여기는 돈(재물) 선뜻 하나님께 내어 놓으십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으실 겁니다. 선교헌금하시려면, 고민되시지요? 사회봉사헌금하시려면 고민되시지요? 한두 번, 마음 다잡지도 않고, 그저 보통 마음으로, 선교 못합니다. 어려운 이웃 섬기지 못합니다.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 캄보디아사역팀에 참여하신 분들도 보니(한 분 한 분 여쭤보지는 않았지만), 자의로 참여하지 않고, 타의로, 권유에 의해서 참여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타의에 의해서 참여하였지만, 기쁨과 감사가 얼마나 큰지요(逆說). 

여러분, 억지로 진 구레네 시몬의 十字架 기독교 歷史의 한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그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요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니느웨 도성의 사람들, 그래도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내서라도, 그 都城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고, 명하여 보내신,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命令을 拒否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니느웨 백성들, 하나님의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마음은, 니느웨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다시스’로 내려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배 삯을 지불하고,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지요. 결국 물고기 배를 타고 니느웨로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이고, 그릇된 선민주의에 빠진 요나를 고쳐서라도,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야 맙니다. 부득불 순종한 요나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요나를 통해서, 니느웨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쁨으로 주의 복음 전하고, 선교하면 더 없이 좋지요. 그러나 부득불 한다 하여도, 해야 합니다. 내 자의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치기 때문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복음 전하는 일에, 선교하는 일에, 자의로 하지 아니하여도 관계없습니다. 부득불 하여도 괜찮습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하여도 좋습니다. 그 부담스러운 마음, 가지고 복음의 증인 되어 봅시다. 선교의 동역자가 되어 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福音을 위하여 집이나 兄弟나 姉妹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子息이나 田土를 버린 者는, 現世에 있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迫害를 겸하여 받고, 來世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 28-30). 예수님은 복음을 위해서 이와 같이 자기를 否認하고 十字架지는, 품격 높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헬라人이나 野蠻人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者라”(14)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能力이기 때문입니다. 差別이 없습니다. 區別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복음 전해야 할 대상을 보면, 다양합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도 있습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배우지 못한 분들도 있습니다. 권력 있는 자도 있는가 하면, 힘없는 자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자를 구별하면 안 됩니다. 

가진 자의 복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者만의 福音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세리와 창기가 비록, 自己 義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말씀하셨지만, 바리새인 서기관들 그들 역시도, 복음의 대상자들입니다. 제외시키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선교의 대상을 제한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탈북자자녀들과 필리핀 톤도 쓰레기장에서 사는 빈민들, 어린아이들(200여명), 거리의 천사들을 섬기는 일,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헬라인들, 곧 지식인들(당대 최고의 문화,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로마인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소원하였던 바울의 빚진 자의 심정 또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선교의 열정이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5)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교회의 선교사역 안에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하버드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hristensen)교수님이, 한국경제를 이야기하면서 “한국경제는, 이미 5년 혹은 10년 뒤를 생각할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대다수 국민들이 이런 위기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한국경제의 위기요인은, 지나치게 하이엔드(high-end)시장, 頂點市場, 최첨단 고부가치시장만을 추구하는데 있다는 겁니다. “시장 밑바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겁니다. 밑바닥시장, 低價市場을 중국과 인도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입니다. 

그런 면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도 심각한 위기라고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기업들이, 스스로 밑바닥시장(로엔드, low-end)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위기요인이라는 겁니다. 선교에도 굉장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선교의 대상을 가리면 안 됩니다. “헬라인이나 野蠻人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롬 1, 14).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도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 주옵소서. 복음의 빚진 자의 마음 가지고, 품격 높은 선교적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우리교회가, 헬라인 야만인 지혜 있는자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빚진 자의 사명 감당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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