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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살전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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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살전 1:3~10)
 
 
1. 삶의 삼각대

성도 여러분, “삼각대(三脚臺, tripod)”가 무엇인지 아시죠?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3개의 다리를 가진 지지대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삼각대라고 합니다. 삼각대는 주로 카메라의 흔들림을 줄이기 위하여, 어떤 장면을 촬영하기 위하여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할 때, 초망원 렌즈나 대형 카메라로 촬영할 때, 결혼사진 등 기념 촬영을 할 때, 그리고 자동 셔터를 사용할 때, 이용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 사랑, 소망”을 “성도의 삶의 삼각대”라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통해 잘 알려진 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주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는 세 가지 중요한 德性인데요. 바울 사도는 이 덕성의 삼각대를 자신의 편지 여러 곳에서 언급했습니다(살전5:8, 갈5:5~6, 고전13:13, 골1:4~5).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그것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것을 통하여 성도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성 세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안정된 삶을 위한 세 가지 요소

1) 데살로니가,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는 주변에 온천이 많아서 원래는 ‘더메(Therme)’라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주전 300년 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카싼더’가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라 ‘데살로니가’라 명했습니다. 이후, 도시는 급성장하여 마케도니아 지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주전 167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점령했고, 주전 146년 데살로니가는 로마 속주가 되어 마케도니아의 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주전 42년에는 자유 도시가 되어 자치 정부를 가질 수 있었고, 자체 시민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데살로니가는 이탈리아로 연결되는 로마의 간선 도로인 ‘비아 에그나티아(Via Egnatia)’에 위치하여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은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2차 전도여행 중, 빌립보에 유럽 첫 교회를 세운 후, 데살로니가로 간 바울 일행은 회당으로 가서 세 번의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강론했습니다. 이 성경 강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해를 당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구약성경을 통하여 입증한 후, 그들에게 전하는 “나사렛 예수가 곧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17:3). 

이러한 말씀 강론의 결과, 회당 예배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서 유대인들보다는 헬라인들의 반응이 더 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헬라인들의 큰 무리와 데살로니가 사회의 영향력이 있던 귀부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17:4). 그러나 바울의 <예수 메시아론>에 동의하지 않던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의 건달들을 동원하여 바울 일행을 공격했습니다(17:5,6). 자기 이익이나 목적 관철을 위하여 조직 폭력배들을 고용하는 것이 현대 우리나라만의 모습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역사가 오래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전하고 다닌다’는 정치적 모함까지 했습니다(17:7). 이러한 소요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더 이상 데살로니가에 머물 수 없어, 밤에 몰래 데살로니가를 빠져나와 베뢰아로 갔습니다(17:10).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마치 죄를 짓고 황급히 도망하는 夜半逃走와도 같은 인상을 주는 석연치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서는 이제 갓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이룬 미숙한 신자들의 공동체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남겨두고 그렇게 한밤에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베뢰아에서의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12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하지만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또 다시 선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아테네로 떠나야했습니다만, 바울의 마음은 계속 데살로니가 교회에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하여 그렇게 걱정하고 염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➊ 우선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어린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거기서 사역한 것은 길어야 3개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➋ 데살로니가 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나아가서 로마에 대한 반역행위를 조장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➌ 그리고 데살로니가에는 성적 타락 등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심각한 도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성적 문제를 죄나 부끄러운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 믿기 전까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속에 젖어 살던 데살로니가 성도들로서는 주님을 만나서 변화된 이후라 하더라도 그 삶이나 주변 환경을 완전히 떠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➍ 또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당시 성도들 사이에는 살아서 재림을 맞아야 구원을 얻고, 재림 전에 죽은 자들에게는 상당한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4:13~18). 이런 혼선 때문에 상당수의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언제 올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일부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한다면서 아예 일손을 놓고 無爲徒食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➎ 그리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조직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형편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데, 그것을 헤치고 나갈 지도자가 없는 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염려한 나머지 실라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 그들이 어떠한지를 살피게 했습니다(살전 3:5). 그런 후, 자신은 고린도로 이동하여 사역을 계속 했습니다. 데살로니가로 갔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와 바울과 합류해서는(행18:6)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살전3:6). 데살로니가전서 3장 7,8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이제는 살 것 같다!” 그 동안 죽을 지경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사랑의 편지를 썼습니다.

2) 삶의 삼각대

이렇게 해서 기록된 데살로니가전서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편지 형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사>로 시작했습니다. 1장 2절부터 10절까지에서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감사는 편지의 중심으로까지 파고 들어가 있습니다. 2장에서도 바울은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13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하면서 다시 고마움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가 하면 3장 9절에는 감사가 감탄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정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렇게 다른 書信書에서는 일부분을 차지하는 “감사”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니 아예 本論을 이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바울의 감사의 중심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범적인 삶의 삼각대에 관한 업급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삼각대는 무엇입니까?

➊ 첫째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입니다. 믿음을 통해 중생한다는 차원에서 구원의 통로이며, 계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주는 관계의 상태라는 차원에서 경건 생활의 조건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능력 행사의 수용 수단이기도 합니다. 원래 이 믿음이라는 말은 ‘상업적인 계약이나 약정’, ‘전쟁 당사자 간의 휴전 협정을 맺음에 있어서 그것을 상호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이 개념은 그러한 약정을 맺음에 있어서 ‘쌍방이 서로 자기 신을 내세워 그 협정이나 약속의 확실함을 드러내려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이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아가 ‘신의 계시나 신의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했으며, 이것은 신의 존재와 행위에 대한 ‘신념(conviction)’이라는 의미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은 자신을 신의 보호에 맡김으로서 ‘신에게 위탁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의 믿음은 너무 지식적입니다. 머리로만 믿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칫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기 쉽습니다. 머리에 성경지식이 많은 사람들, 무언가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동체는 냉랭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때로 우리의 믿음은 너무 감정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보다 느껴지는 대로 행할 때가 많지요. 마음이 뜨겁고, Q.T.도 잘 되고, 모든 게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고, 기분이 좋으면 교회에서도 열심히 섬깁니다. 그런데 뭔가 자기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거나, 기분이 언짢으면, 교회에도 잘 나오지 않고, 또한 자신의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너무 잘 변합니다.

그러나 성경 원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의 말씀과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고, 그의 능력과 행하심을 믿는 것이며, 그 주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란 무슨 뜻입니까? “역사”란 성경 원어로 “에르곤”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가지고 일하는 온갖 종류의 일들’을 뜻하는데요, 예를 들면 건축, 기술, 문화, 예술 활동과 관련된 말입니다. 또한 ‘사회적인 임무나 도덕적인 임무로서의 일’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적극적인 열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역사란 믿음이 있으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어떤 것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주 적극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과 NASB는 이것을 “Work of faith”라고 번역하고, NIV는 “work produced by faith”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역사, 즉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이런 의미 때문에 서로 다른 단어로 번역이 되었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역사'나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약2:26) 똑같이 헬라어로써 ‘에르곤’입니다. 야고보는 에르곤(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역사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지금 바울 사도는 예수 믿은 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역사’가 있었다고 칭찬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이고, 또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의 믿음도 적극적이고 열심 있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➋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일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렸습니다만, 신양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고대 헬라어에는 성경이 말하는 “아가페”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의미의 아가페라는 말은 성경 외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그것도 성경이 기록된 이후의 것입니다(A. D. 2세기).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언어 가운데서 사랑이라는 말은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가족 간의 사랑인 '스톨게(혹은 스토르게)',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만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님께서 몸으로 전 삶으로 보여주셨고,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면서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 바로 “아가페”라는 단어인 셈이죠. 이런 사랑, 아가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주신 것으로 낮아지심이요, 오래 참고 기다리심이요, 스스로를 희생하심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신 뒤에 성도들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수고”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수고”라는 말은 ‘때리다, 치다’에서 유래했는데, 이것은 ‘신체를 구타하고 매질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여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 ‘너무 고되게 일을 하여 지치고 피로하거나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상태’를 뜻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해 스스로 힘든 노동을 한 것(살전 2:9 살후 3:8), 복음을 전하기 자신이 겪은 그 수많은 고생(고후 6:5 고후 11:23 고후 11:27)을 열거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수고란 무엇입니까? 몸으로 직접 일하는 것이며, 그것도 무리할 정도로 일하여 심신이 지치고 피로할 정도인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온 몸으로 실천하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죠.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함부로 자신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자기 착각에 빠져 혼자서만 흐뭇해 하다가 정작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할 때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감정의 유희가 아닙니다. 그 흔하게 쏟아져 나오는 사랑의 고백과 노래와 詩句는 얼마나 자주 허망한 느낌의 잔치로 종결되고 있는지…. 사랑은 노력이고, 땀이며, 눈물이며, 피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랑은 곤란과 어려움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그 몸으로서 힘들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수고와 정신의 긴장과 부담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바로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셨습니다(눅 10:25-37). 사랑은 자기가 가던 일을 멈추는 것이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치료하는 것이며, 그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여 계속 돕는 것이며,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이는 것이며, 그 다음까지 책임지는 “After Service”까지 보장하는 것입니다. 

남부 칠레의 늪지에는 ‘리노데르마르’라는 작은 개구리가 살고 있습니다. 산란기가 되면 개구리의 암컷은 젤리에 쌓인 알을 낳습니다. 그 순간 곁에 있던 수컷은 이 알들을 모두 삼켜버립니다. 물론 그것을 완전히 삼키는 것이 아닙니다. 수컷은 식도 부근에 있는 자신의 소리 주머니에 그 알들을 간직하여 성숙하기를 기다리는데요. 이 기다림의 과정은 수컷 개구리에게는 희생의 날들입니다. 수컷은 자신의 존재 이유며 중요한 쾌락인 우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먹는 것을 포기합니다. 음식을 먹기 위하여 입을 벌렸다가 알이 밖으로 나갈 수 있고, 알에게 해로운 것이 들어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들이 완전히 성숙하기까지 아예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알들이 완전히 성장했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자신의 입을 벌려 마치 긴 하품을 하듯 새끼 개구리들을 입 밖으로 내 보냅니다. 

이렇게 수고와 아픔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이 주님이 보여주셨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➌ 세 번째는 “소망의 인내”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무엇입니까? 고전 헬라어에서 이 “소망(엘피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이 단어는 ‘凶事나 吉事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미래사에 대한 예상’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단어였습니다. 여기에 ‘좋은, 밝은, 기쁜’과 같은 형용사가 붙어서 비로소 ‘소망’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소망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 기록되면서 독자적으로도 긍정적이고 밝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그 의미는 종말, 즉 주님의 재림과 관련 된 것이었습니다(롬8:24, 롬12:12, 롬15:13, 엡2:12 등). 즉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이나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망의 유효기간, 소망의 끝은 주님의 재림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소망의 인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내란 ‘밑에 머무르다’에서 온 말인데요. 시험과 환난의 상황에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눈물 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거나,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철저히 그 밑에서, 그 상황 속에서 버티는 것이 소망입니다. 언제까지요? 말씀드린 대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러니 소망의 특징은 인내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믿음이 분명하다면 현재를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견디는 耐性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소망은 인내로 검증됩니다. 참음과 견딤이 없는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심한 핍박 가운데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믿은 이후에도 심각한 방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2:14). 그러나 그들은 그로 인하여 약해지지 않았습니다(3:16). 그들의 소망이 예수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망 때문에 거듭되는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자주 절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 소망 때문에 도리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소망의 사람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의 상황을 다 보시고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 인내하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고 바라는 대로 반드시 응답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주님과 주님의 손길과 응답과 역사를 기다리되,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어려움과 상관없이 미리 즐거워하여 ‘히죽히죽’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소망의 사람입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큰 환난과 투옥과 핍박 가운데서도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는 그 지독한 환난 가운데서도 “믿음이 바를 때 소망은 결코 병들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쇠고랑을 찬 죄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 그가 탄 배가 심한 풍랑 가운데 위험에 처했습니다. 

뱃사람들은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져 살 소망을 포기했습니다(행27:20).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소망을 주며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에 대한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이 세상 그 어떤 어려운 일도 참아 내고, 또 극복해 가면서, 활기가 넘치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허무와 절망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3. 안정된 삶의 세 요소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지금 핍박 가운데 있으면서도 사도로부터 “너희의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칭찬을 받은 내용입니다. 감사와 칭찬의 이유는 그들이 성도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 그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갖추고 있었던 건강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의 세 가지 요소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란 믿음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행동하는 믿음,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 헌신하는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적극성과 열심을 가진 실제 행동을 말합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수고”란 힘써 일하는 사랑, 몸이 아프기까지 수고하는 사랑, 희생하여 죽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랑을 말합니다. 셋째로 그들에게는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소망의 인내”란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소망을 말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한결같이 계속 되는 것이 참 소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 세 가지 신앙의 요소를 다 갖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카메라의 ‘삼발이’나 ‘삼각대’처럼, 안정되고 확실하여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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