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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 (창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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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님이신 하나님 (창 15:1~11) 
 
 
“관계 전문가”로 유명한 게리 스몰리라는 분이 [관계 필터링]이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을 보면 한 때 자신의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있었답니다. 사역이 커져갔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해 졌고, 명성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차츰 관계들이 틀어지기 시작하더랍니다. 아내와 대화가 끊기고, 자녀들과도 소원해 지더랍니다. 그리고 함께 사역하던 사람들과도 소통이 잘 되지 않더랍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조바심이 생겨나게 되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헝클어져 버린 것만 같더랍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인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고,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서도 별 문제를 찾을 수 없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성공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착각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있더랍니다. 아주 작은 일을 결정할 때도 그 결정권을 하나님께 맡겼던 자신이 점차 큰 일 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더랍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이루게 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자기중심의 삶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결국 게리 스몰리는 자신의 모든 문제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일 부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고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답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기대 수준을 가능한 제로까지 낮추면서 하루를 시작하길
둘째,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길 
셋째, 모든 당황스런 경험은 하나님을 경배할 기회로 삼기를 
넷째,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면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지 묻는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저는 이분이 하나님과의 맺은 관계를 “주와 종의 관계”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매일 아침 드린다는 기도를 “종의 기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하게 세워지면 다른 모든 관계들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다른 모든 관계들도 제대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세워가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주와 종의 관계”입니다. 

특히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아브람이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는 “아도나이”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말을 “master” 또는 “lord”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경에는 이 말을 “주”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아도나이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아돈”이란 말의 강조형입니다. 이 아돈이란 말은 ‘소유하다, 다스리다, 판단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도나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소유자, 통치자, 주권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도나이 즉 주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는 뜻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아도나이 곧 주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에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엘로힘”이라는 보통명사로 소개되었습니다. 이제 본문에 오면 관계적인 명칭으로 아도나이라는 말이 처음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주라는 명칭은 아브라함이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나님을 자기 나름대로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은 주와 종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자기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도나이 곧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주와 종의 관계로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할 때 기초로 삼아야 할 관계입니다.
그러면 이 아도나이 곧 주라는 말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아브라함이 왜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게 됐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하나님께 자기의 절박한 문제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가 이미 80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아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자기 집의 종인 엘리에셀에게 상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참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었습니다. 남들의 땅 가나안에 이민 와서 자리를 잘 잡고 살았습니다. 가진 것도 풍족합니다. 많은 재산과 종들이 있었습니다. 불과 318명의 작은 병력으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서 큰 전리품도 챙겼고 그 지역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맹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들이 없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아들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핍입니다. 가문과 부족이 대를 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재산과 소유를 상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치명적인 결핍이 아브람에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됐던 것입니다. 만일 이것마저 다 잘됐다면 아브람은 결코 하나님을 주라 고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80년대와 90년대를 풍미했던 “조덕배”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꿈에”, “나의 옛날 이야기”,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은” 같은 노래를 히트시키며 이 시대의 음유시인이라 칭송을 받던 싱어 송 라이터입니다. 

정말 잘나가던 이분에게 한 가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대마초입니다. 몇 차례 교도소를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다 작년 4월 돌연 뇌출혈로 쓰러졌고 왼쪽 몸에 마비가 왔습니다.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금년 5월 발매 예정으로 CCM 음반을 준비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투병생활하면서 비로소 하나님 앞으로 다시 나온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30년 동안 어머니를 따라서 건성으로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세상 인기와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죠. 이렇게 몸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회로 안 나올 것 같아 하나님이 날 쓰러뜨린 것 같아요. 아직도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셨나보죠...” 

바로 이 조덕배씨가 다니던 교회가 우리교회입니다. 이분이 조덕민 집사님의 형이십니다. 오래 전 어머니 장례식에서 권면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머니 유언도 있고 하니 이번 기회에 다시 교회에 나오시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시지요” 인사치례로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부족한 것이 없어 하나님 앞에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미신 손을 이제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핍이 은혜입니다. 부족한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손을 붙잡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십니까? 하나님을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들이 태어나 상속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정말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아브람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다라고 되어있지 않고 여호와를 믿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말씀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것이지만 여호와를 믿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믿음을 주셨고, 또 그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었고,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 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믿음의 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서 ‘the author of faith’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삶을 시작하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자고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울 때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면 그분이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운동경기입니다. 42.195키로를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은 정말 힘드는 일입니다. 이 마라톤 경기에서는 반드시 두 번 정도의 ‘사점’(death point)이 있다고 합니다. 초반 약 10키로 지점과 종반 약 37키로 지점이라고 합니다. 그 지점에서는 너무 힘이 들어서 경기를 포기하고 싶어진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옆구리가 아파오고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기를 거부하는 것 같이 된답니다. 실제로 이 지점에서 많은 선수들이 기권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점만 잘 견디고 이겨내면 또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리가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또 뛸 수 있게 된답니다. 실레로 황영조 선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사점을 지날 때 자기는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한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나서 그 사점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꼭 이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달리다 보면 누구나 사점과 같은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이 근본적으로 뒤흔들립니다. 믿음을 지켜가기가 힘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람이 그랬습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약속을 받은 지 5년, 10년이 넘어갑니다. 이제 자기 나이가 여든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 늙은 나이에 어떻게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가겠습니까? 바로 여기가 아브람에게는 하나의 믿음의 사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사점을 지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 믿음의 사점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그러자 이 믿음의 사점을 통과해서 다시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믿음의 사점의 지나고 계십니까? 믿음의 주이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다시 믿음의 경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 뜨거운 목소리로 “하나님은 나의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허락하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아서 상속절차를 밟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주님으로 섬기게 됐던 것입니다.

히 11:8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나이 75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은 너무도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우선 나이 75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아브라함으로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울타리가 될 만한 것들을 다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되어 질 일들도 자기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철저하게 인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순종했습니다.

1955년 미국 오레곤 주 유게네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한다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도 그 참상이 딱했습니다. 겨울이 다가 오는데 신발도 없고, 옷도 없이 떨고 있는 불쌍한 아이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한 넉넉지 못한 농부 부부의 마음에 파문일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농부로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설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 가운데 그들의 마음이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농장 일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여 데리고 왔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에 기사화되자 여러 사람들이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위해 고아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아예 이 일을 위해 헌신키로 했습니다. 

이 부부가 해리 홀트 부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것이 홀트 아동복지회입니다. 지금도 홀트 아동복지회는 이 부부의 정신을 받들어 “사랑을 행동으로”(Love in Action)을 모토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다른 모습은 순종입니다. 행동으로 실천된 믿음이야 말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마 7:2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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