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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한 사랑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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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사랑 (고전 13:1~13)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정답이나 모범 답안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가치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도자기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골프채나 낚싯대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나 손자를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권세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높은 지위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참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돈은 없어도 사랑이 많으면 그는 진짜 부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참 잘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서 단순히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말씀을 통해서 신앙 생활의 근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이라는 말을 넣어도 그 의미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사랑이 빠질 것 같으면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왜 이 편지를 썼습니까?
교회 안에 참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썼습니다. 원래 고린도라는 도시는 문제가 많은 도시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항구 도시는 문제가 많게 마련입니다. 물자가 풍부하고 인적 교류가 활발할 것 같으면 자연히 사치와 향락이 따르게 됩니다. 바로 고린도가 퇴폐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타락한 도시를 말할 때 '고린도처럼 되었다.'고 했겠습니까?

그 고린도의 퇴폐적인 도시 분위기가 교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몇 가지만 그 예를 살펴봅니다. 교회 안에 파당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음행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끼리 세상 법정에서 다툼이 있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언의 은사 때문에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성령이 충만했고 그 충만한 성령의 은사들이 참으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은 앞의 12장 말씀에서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친 후에 그 가르침을 보충하기 위해서 덧붙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 결과 성령의 은사들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가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방언의 은사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 정상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앞을 다투어 방언하는 성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성령의 은사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도구에 불과한 것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방언이 신앙 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아울러 다양한 은사들은 서로 우열이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성령의 은사들을 바르게 사용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언을 못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서는 결코 아니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방언은 소중한 은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자랑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는 결코 방언을 하찮은 은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방언이 소중한 은사로 사용되기 위해서 사랑이 빠져서는 결코 아니 된다고 그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누구를 예로 들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예로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우쳐 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참 사랑은 이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먼저 나 자신이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실 때 비로소 참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중심 아닙니까? 단체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찾으면 제일 먼저 무엇을 봅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입니다. 내 모습이 잘 나왔으면 그 사진은 잘 나온 사진입니다. 그러나 내 모습이 잘 안 나왔으면 그 사진 전체가 잘못된 사진이 됩니다. 때문에 먼저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결코 참 사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주님의 성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면 더 이상 시기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교만할 수도 없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이 사시면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친구를 멀리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일까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기 자랑을 많이 하고 거만하게 굴면 됩니다. 그러면 붙잡아도 다 도망갈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 사랑은 동사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은 ~이다.'라고 하지 않고 '사랑은 ~한다.' 또는 '사랑은 ~하지 않는다.'라고 동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느낌이나 개념이 아니고 역동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참 사랑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아가페를 단순히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의 실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처럼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결코 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사랑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늦습니다. 지금 여기서 사랑해야 참 사랑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8~10)
때가 되면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은 모두 다 소중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것도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사가 소중하지만 그 은사를 은사가 되게 하는 것은 참 사랑뿐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안다고 하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참 사랑뿐입니다. 장차 다 사라질 것입니다. 남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입니다. 그리고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구원의 주님과 그 주님의 몸된 교회를 참 사랑으로 충성스럽게 섬기는 귀한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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