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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행 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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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행 12:1~25) 
 
 
예루살렘 교회와 베드로 중심의 기록은 12장에서 마감되고, 13장부터는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됩니다. 사도행전 전반부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책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구제금이 전달될 때는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롯이 등장하는데, 본문의 헤롯은 베들레헴 유아들의 학살자인 대 헤롯(37 BC-AD 4)의 손자이며 아리스토블루스(Aristobulus)의 아들인 헤롯 아그립바 1세(Agrippa Ⅰ, AD 37-44)입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베었던 헤로디아의 오빠이기도 하지요. 에돔 족속의 혈통에 하스모니안 (Hasmonean)왕조의 피가 섞였던 그는 헬라주의자였지만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친유대주의 정책을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에게 큰 호감을 가졌는데, 요세푸스는 그가 병들어 죽어갈 때 많은 유대인들이 슬퍼하며 기도했다고 기록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스테반의 순교 때부터 대중들까지도 교회와 부딪치기 시작했습니다. 고넬료의 회심 사건 이후에는 교회가 유대교의 전통을 파괴하는 집단으로 비춰져 더욱 반감이 심해졌겠지요. 소수의 집단이 계속해서 문젯거리가 되는 것이 독제자의 눈에 좋게 보였을 리 없습니다. 헤롯은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목을 베는 것은 살인자나 배교자에 대한 형벌인데, 유대인들은 “이 일을 기뻐”했지요(3). 만족스러워했다는 뜻입니다. 전형적인 정치가였던 헤롯은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베드로까지 체포합니다.

“무교절”은 태양력으로 3-4월에 해당하는 니산(Nisan)월의 14일부터 21일까지를 일컫습니다. 엄격히 구분하면 14일 저녁만 유월절이고, 유대인의 날 계산 방식에 따라 다음날이 시작되는 14일 밤부터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이 시작되지만 통칭하여 무교절 혹은 유월절로 부릅니다. 명절에 처형을 금지한 유대인들의 종교법 때문에 베드로는 곧바로 처형되지 않고 유월절이 지나기까지 옥에 갇혔던 것 같습니다. 4인조로 구성된 4개조 감시병들이 4교대로 보초를 섰지요(4). “두 쇠사슬”(6)로 결박하는 것은 로마법상 중죄인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탈옥(?)한 경력이 있었으므로(행 5:19), 몹시 엄중하게 감시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탈옥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손에 묶인 쇠사슬을 끊고 양쪽에 있는 군인을 순식간에 처치한 후에 번개같이 옥문을 열고 감시병들을 처치한 다음 세 개의 관문을 귀신같이 통과해야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탈옥 의도조차 없었다는 증거가 많습니다. 먼저 “주의 사자”는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는데(7), ‘때려 눕혔다’고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로서 상당한 충격을 줘서 깨울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지요. 허리의 띠를 풀고 가죽 끈으로 발목을 묶는 신발까지 벗어놓았다는 것은 잠자기로 마음먹고 잠들었음을 보여줍니다(8). 천사를 따라가면서 한동안 “환상을 보는가”(9) 생각했던 것 역시 탈옥 생각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내일이면 처형당하는데도 편안히 잠든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그의 평온한 신앙을 엿보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 땅의 수고가 끝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지요(빌 1:21). 베드로 역시 죽음 앞에 평안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베드로를 살리고자 하셨지요. 주의 사자를 통해 곤히 잠든 어린아이를 깨우듯이 깨우셨고 묶인 쇠사슬이 풀리게 하셨습니다(7). 섬세하게 옷과 신을 준비하게 인도 하셨고(8),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까지 열어주셨고, 한 거리를 지난 후에야 천사가 떠났지요(10).

이 모든 과정에서 베드로는 전적으로 수동적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탈옥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는 순교하도록 두셨지만 베드로는 살리셨습니다. 성도를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님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야고보보다 신앙이 더 좋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뜻에 따라 어떤 사람은 고난을 허락하시나 어떤 사람은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늘 베드로처럼 다루신다고만 생각한다면 올바른 신앙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임을 알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다는 자세입니다(롬 14:8).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옥에서부터 단숨에 마가의 집으로 옮기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차례차례 많은 난관들을 제거해주셨지요. 구출 하셨다는 ‘결과’보다 구출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깨달아야 할 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라도 주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이 나서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고 고백하지요. 이때부터 베드로는 적극적으로 피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씁니다(17). 하나님을 믿는답시고 일부러 자기를 위험 속에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깊이 잠들어 있는 동안 여러 성도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12). 베드로가 밤새 뜬 눈으로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자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일 것 같은데,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베드로가 문밖에 있다는 로데의 말을 듣고도 “네가 미쳤다”고 반응합니다(15). 이미 야고보가 죽은 상황인지라 베드로가 사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기 어려웠겠지요. 베드로가 죽더라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당장 감옥에서 나와 현관문을 두드리도록 기도하지는 않았지요. 그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결과로 인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16)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를 할수록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은혜를 받곤 하지요. 때로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병이 낫지 않기도 하고, 평안을 누리기를 바라지만 그냥 고난 속에 두시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 결국은 합력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뿐입니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해 기도자는 하나님께서는 내 소원을 들어주는 도라에몽이나 램프의 요정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소원과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게끔 하시지요.

베드로의 구출 사건의 앞뒤로 교회의 ‘기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사도행전은 여러 상황에서 교회의 기도에 대해 기록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전에(1:14), 유다 대신 사도를 채울 때(1:24), 교회가 위협 받았을 때(4:31), 직분자를 세울 때(6:6),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질 때(8:15), 사울의 회심에서(9:11), 다비다를 살릴 때(9:40), 고넬료의 회심에서(10:2, 9) 등등 계속 기도와 관련됩니다. 교회의 기도가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가 전진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기도를 귀하게 쓰셨음도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교회는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위기에 직면한 교회는 베드로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5).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번 핍박도 잘 해결해 주실 것이라 생각하며 뒷짐 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했지요. 하나님의 주권을 강하게 신뢰했던 초대 교회는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고 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지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한 몸 된 공동체의 신성한 의무입니다. 간절한 기도가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 있음을 보여주기보다 형제에 대한 의무 태만과 사랑의 부족을 보여줄 뿐입니다.

참된 신앙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동시에 인간의 책임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 주권 50% + 인간의 책임 50%’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권 99.9% + 인간의 책임 0.1%’조차 아닙니다. 하나님 주권 100%, 동시에 인간의 책임 100%입니다. 어떻게 인도하시든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려는 전적인 수동적 자세와 동시에, 어떻게 인도하시더라도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헤아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실지라도 홀로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으시고 교회의 기도와 순종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성경은 동시에 성도의 애쓰고 힘쓰는 자세도 명령합니다.

18-23절은 교회의 대적자 헤롯왕의 비참한 말로에 대한 기록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일날 은빛 찬란한 왕복을 입고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군중들을 압도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군중들은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22)고 반응했지요. 그러나 “영광을 하나님께로”(23) 돌리지 않은 헤롯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그 순간의 태도 때문만이 아니라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았던 그의 전 생애 때문이겠지요. 헤롯은 죽기 전 5일간 심한 복통을 앓으며 악취를 풍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내장에 기생하며 25-40센티까지 자라는 회충(Ascaris lumbricoides) 때문에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지요.

헤롯이 교회를 대적했지만 그 배경에는 교회의 탄압을 기뻐하며 교회의 패망을 기대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3, 11). 이제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는 그들을 떠나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이방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지요(25). 유대 역사에 있어서 이 일은 헤롯의 죽음보다 치명적인 영적 사형 선고였습니다. 반면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24)는 평가로 마무리됩니다. 역사는 결국 교회의 대적자들이 무너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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