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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심을 넘어 믿음에로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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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넘어 믿음에로 (요 20:24~29)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역설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에 종교 창시자의 죽음을 예찬하는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음을 예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죽음이라고 고백하며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억하며 찬양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이 있다는 것과 죽음이 너무 귀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고난의 길을 갔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의 길을 갈 수 있고, 그분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목말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생명을 경험하며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생명에 반대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입니다. 마치 잘 돌아가던 필름이 어느 순간 멈춰버린 것과 같습니다. 죽음은 더 이상 진행이 안 됩니다. 다음 장을 펴야 되는데 다음 장을 펼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이것은 죽음 앞에서 내 인생이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얼마나 슬프고 아픈 것인지를 아는 동시에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가를 예찬하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축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것일까요? 보통 풍요 속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것은 잠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가난할 때 우리에게 주신 풍요가 소중한 것을 깨닫습니다. 빈곤할 때, 질병으로 고난 속에 있을 때 생명과 건강의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으면서 기뻐합니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으면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질병을 앓으면서 조금씩 삶에 만족할 수가 있었습니다. 고열에 시달리고 나면 열이 나지 않는 날이 얼마나 상쾌한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기침을 많이 하다보면 기침 없는 목 상태가 얼마나 편안한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으면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욕창이 생겨 몇 날 몇 일을 모로 누워 새우잠을 자고나면 비로소 똑바로 누워서 잘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달콤한 휴식인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야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습니다. 침상에 누워보고 나서야 걷고 뛰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과 축복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너무 늦게 고마움을 깨닫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의심 때문에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합니다. 게으름과 불평과 원망 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지나가버립니다. 
  
어느 신학자가 기적에 관한 특별 강연을 했습니다. 그것이 다 끝난 다음 한 남자 청중이 기적에 관한 예를 들어 달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 하나의 기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당신은 지난해에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젊은 미인을 보고 심장이 마구 박동한 경험이 있습니까? 언젠가 당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말을 걸 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자진해서 그 고통을 대신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모두, 혹은 대부분에 ‘아니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이미 지금 죽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서 함께 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살아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런 감동이 없으면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고, 살아서 움직이며 생각하고 마음속에 감동을 받는 것 자체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참다운 생명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인간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생명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의 이야기를 들은 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도 생명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그건 거짓말이야. 난 믿을 수 없어. 내가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봐야 예수님이 진짜 살았는지 알 수 있지.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도마는 의심의 눈초리로 다른 동료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가 없는 자리에서 10명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이 때 도마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도마를 회의론자나 의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도마를 묵상하면서 생각해보면 그는 단순한 회의론자가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믿는 사람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처음부터 쉽게 믿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삽니다.” 
 
이런 말을 듣자마자 ‘아멘’하고 마음속으로 금방 믿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축복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게 믿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그게 사실이야?” 
 “정말 믿을 수 있어?” 
 “예수님에게 내 인생 전체를 걸 수가 있어?” 
 “그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야?” 
  
우리 속에는 이런 의심이 있습니다. 옛날 보수적인 가정에서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의심 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 일단 덮어놓고 믿어. 무슨 젊은 친구가 자꾸 의심하려고 해. 네가 내 나이가 되면 저절로 깨달을 거야.” 
  
어떻게든지 자녀들에게 강제적으로 믿음을 전수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음껏 의심하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의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도마는 다른 친구동료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것을 거절하며 말합니다. 
 “네가 본 것은 내가 이해하겠어. 네가 만진 것까지도 내가 이해하겠어. 그러나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도마는 네가 아닌 내가 보고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오기같이 보여 지지만 이처럼 신앙은 객관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내 삶에 체험적인 신앙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3인칭 신앙만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내가 믿는 개인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 전체가 체험적인 신앙만 있다면 전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체험적인 신앙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맡길 수 없습니다. 신앙이란 개인적인 결단과 도전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향한 삶 전체의 맡김입니다. 신앙이 역동적이려면 반드시 일인칭 단수의 개인적인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일인칭 단수로 고백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의해서 뒤따라가는 신앙만으로는 우리의 신앙이 살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친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목사의 신앙에서 내 신앙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순간이 너무 어렵지만 기도하며 결단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신앙은 역동적입니다. 신앙은 도약합니다. 신앙은 삶 전체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의 기쁨과 헌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인칭 단수의 신앙을 소유하게 하기 위해서 질문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심을 갖고 있을 때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의심과 질문을 하나님께 표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질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 가르쳐 주시면 제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막연하게 하지 마시고 제 가슴속에 직접 다가오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신앙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않고, 의심에 직면하는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까지 부딪치지 않고 조금 질문하다가 귀찮아서 멈춥니다.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가지고 머리 숙여 기도하면서 부딪히다가 그냥 적당히 끝내버립니다. 야곱처럼 얍복강 가에서 혼자 남아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내게 복을 주고 말씀할 때까지는 결코 당신을 놓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열정과 하나님에 대한 부딪침이 없기에 요만큼 질문하고 일년 동안 멈춰 있다가 다시 작년에 한 질문을 올해 또 조금 하다가 다시 멈추고, 내년에 가면 또 하기에 신앙에 성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반복만이 남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질문으로 우리 인생을 채워 나아갈 때 거기에는 예수님을 믿는 기쁨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참된 감격과 헌신의 역사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의심에는 두 가지 의심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정의 의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에서 부정으로 나아가는 자기 파괴적인 의심입니다. 이런 의심은 어떤 도움도 안 됩니다. 과학적인 사고를 할 때도 이런 의심은 도움이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생산적인 의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에서 호기심으로 나아가고, 호기심에서 믿음으로 성숙하는 긍정적인 의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적인 의심을 하다가 어정쩡하게 조금 있고, 또 조금 의심하다가 머무르는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는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서 스스로 탄식합니다. 
 “왜 제 신앙은 안 자라나요? 왜 제 신앙은 점점 죽어가나요?” 
  
이 딜레마를 표현하는 굶어죽은 어리석은 당나귀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당나귀가 어느 날 보니까 두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가 이쪽과 저쪽 끝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더 큰가를 봤는데 두개 다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중간에 서서 양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운데서 머뭇 머뭇거렸습니다. 이 상태가 계속 되자 당나귀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자니 불안해서 교회를 가기는 가야 합니다. 엄마가 하신 말씀이 자꾸만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자니 아직도 의심이 생기고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놓기가 아깝습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마음속에 마치 당나귀가 굶어 죽은 것처럼 신앙이 어중간한 상태는 매우 위험합니다. 믿음도 상실되고 하나님에 대한 열정도 사라집니다. 
  
열정은 의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의심이 있으면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천국에 가면 더 이상 믿음이 필요 없다. 이미 다 알고 소망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소망이 필요 없다. 그런데 천국에 가면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는데 사랑은 필요하다.”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의심하면서 믿습니다. 의심하면서 소망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더 커져야 합니다. 소망이 의심보다 더 커져야 성숙하고 자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은 결단이고 결심입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것도 결단입니다. 이 결단을 유보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정신적인 게으름, 영적인 게으름, 신앙적인 게으름의 표시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도마의 의심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도 도마처럼 의심해보았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는 없고 10명의 다른 제자만 있는 자리에 오셔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때 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나를 무시해? 내가 없는 동안에 등장하시다니, 나는 제자로 인정도 안 해? 내가 보기만 해봐라. 내가 꼭 보고말지. 내가 꼭 만져봐야 당신이 살았다고 증거할 수 있지 그 전에는 당신을 증거 할 수가 없어.” 
  
여러분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수련회에 100명이 참여했는데 99명이 모든 은혜를 받고 좋아하는데 나 홀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 부럽다. 나도 저렇게 믿었으면 좋겠는데. 왜 내게는 하나님께서 안 찾아오시는 걸까?’ 그래서 마음속에 ‘에이, 저건 이상한 사람들이야. 저건 광기 들린 사람들이야. 뭔가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이나 저렇게 믿지. 제 정신 같으면 어떻게 저렇게 믿을 수가 있어.’하며 조롱하며 믿음의 현장에서 떠나가려고 했던 적은 없습니까? 
  
저도 대학교 다닐 때 500여명의 대학생들이 참석하는 한 여름수련회에 참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수련회 마지막 날 목사님이 예수님을 새롭게 믿게 된 사람, 그동안 믿었다가 다시 헌신할 사람들을 찬송을 부르면서 다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그때 500명이 모두 단상에 나가는데 저 혼자서만 회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이렇게 버텼습니다. ‘내가 나가나 봐라. 나는 안 믿는다.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히 나타나셔야 믿지. 나는 저렇게 감정적으로 휩쓸려서는 안 나간다. 내 지성이 판단해서 확실하지 않으면 나는 예수를 안 믿는다.’ 
  
그 밤 저는 혼자 남아서 하나님께 화를 내고 씨름하다가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부터 고백하면서 믿게 되었습니다. 
  
의심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심 안에 머물러서 믿음으로 도약하지 않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부어주시는데 우리의 지성(知性)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지성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헬라 철학의 지성은 믿는 것이냐, 아는 것이냐를 가지고 싸웁니다. 믿으면 아는 것이 무너지는 것 같고, 알면 안 믿는 것이 인간의 본질처럼 생각해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이것이 헬라적인 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성에 성령 세례를 받으면 사고가 바뀌어 집니다. 믿으면 더 알게 되고, 알면 더 믿게 되고, 믿으면 더 풍성해집니다. 
  
기독교 신앙은 히브리 백성들이 갖고 있던 생각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세상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지성이 세례를 받으면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함께 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하나님, 더 알게 해주세요. 알면 더 믿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의심이 변하여 엄청난 믿음의 사건으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제자들 중 도마를 중심인물로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야, 내 손을 만져봐라. 내 옆구리를 만져봐라.”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실제로 손을 만져보거나 옆구리를 만져보지 않고도 그냥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이며 고백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이때 예수님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우리의 의심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가르쳐 주시면 하나님이 나보다 얼마나 지혜와 능력이 많으시고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진정한 지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지혜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지성이 세례 받고, 감정이 세례 받고, 의지가 세례를 받을 때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축복을 이 땅 위에서 누리면서 사는 하나님의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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