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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눅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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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눅 15:1~7)
   

영국의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방문객을 인도하던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와 무덤에 묻혀 있는 위대한 영웅들의 삶을 얘기합니다. 현재 사원이 운영하는 프로그램까지 설명합니다. 설명이 끝나자 방문객 중에서 미국의 여자 교인이 물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설명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 사원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안내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몹시 당황하였다고 합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로 말미암아 평가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능력이나 실력, 창출해 낼 수 있는 경제성을 우선으로 따집니다. 기업마다 연봉제를 선호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나 연예인은 이것을 몸값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경제성인 돈과 결부시키고 성공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는 사회의 구조에서는 한 영혼의 가치가 철저히 무시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본문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목자와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온 방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여인을 보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을 때 잔치를 하며 기뻐하고 있음도 보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한 영혼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남편의 연봉과 자녀들의 사회적인 성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와 하나님은 관심의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우리 교회가 혹시 우리를 기준으로 교회에 올 수 있는 사람과 올 수 없는 삶을 구분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사람의 아픈 과거를 중심으로 현재를 판단하며 비판하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과거를 기준으로 해서 오늘 두 손을 들고 고백하며 찬양하는 모습을 위선으로 몰아치지 않는지요. 우리들의 알량한 수준을 따지며 사람들을 그것으로 구분하려 하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소유자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종이나, 국가, 재산, 성, 교육의 수준과 관계없이 한 사람의 영혼을 귀히 여기십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을 품에 안기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담겨 있는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세 번째는 탕자가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의 비유를 반복으로 말씀하시면서 강조하시는 것은 한 영혼의 소중함입니다. 

베니스 미술 대학 벽에는 종교 재판의 빌미가 되었던 파올로 베로니스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어느 잔치석상에 앉으신 그림으로 한쪽 구석에는 로마 병사들이 노닥거리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어떤 남자가 술에 만취해 코가 빨개져 있습니다. 주인 없는 개들은 사방을 휘젓고 다니고 군데군데 술 취한 사람들, 난쟁이들, 흑인들, 심지어 시대에 맞지 않는 훈족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으로 인해 베로니스는 불경죄로 종교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로니스는 종교재판에 소환되어 이런 불경한 내용의 그림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았습니다. 베로니스는 ‘복음서를 기준으로 보건데 예수님은 그림에 나오는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분입니다’ 라고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의 변호를 들은 재판관들은 분개하며 그 그림을 성화에서 제외시키고 제목도 바꿀 것을 명했습니다. 

베로니스의 그림의 배경이 오늘 본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베로니스를 종교재판 했던 상황을 본문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이 오늘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1,2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노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온 이유는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정부에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가장 질이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 창녀, 절도범, 걸인, 병자 등, 그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 천국은 자기들이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죄인으로 낙인찍고 저주 받은 인생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비난했습니다. 그런 상황과 분위기를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그들이 멸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다르게 보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천하고, 추하다고, 막장 인생이라고 비난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죽어가는 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어느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목자는 저녁이 되어 양들을 양 우리에 넣기 위해 양의 수를 헤아려 보니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양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나 곁길로 샌 것입니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넣고는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잃은 양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 다녔습니다. 혹시 들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쌓여 혼신을 다해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목자는 산 중턱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양을 발견했습니다. 목자는 기쁨으로 양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고는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음식을 나누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목자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함으로 양 한 마리를 잃은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기꺼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잃었던 양 한 마리에 대한 사랑과 진정한 가치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동전이 비유에서는 동전을 찾은 기쁨을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은 22-24절에 보면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영화내용입니다. 2차 대전이 종전으로 치닫는 치열한 전황 속에서 미 행정부는 전사자 통보업무를 진행하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4형제 모두 전쟁에 참전한 라이언 가에서 며칠 간의 시차를 두고 3형제가 이미 전사하고 막내 라이언 일병만이 프랑스 전선에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네 명의 아들 가운데 이미 셋을 잃은 라이언 부인을 위해 미 행정부는 적진에 들어있는 막내인 라이언을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밀러 대위는 일곱 대원을 데리고 그를 찾아 나섭니다. 여덟 명이 한 사람을 구하러 가는 무모한 명령에 한 대원이 묻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여덟 명의 목숨과 바꿀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러자 밀러는 대답합니다. ‘라이언은 우리가 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만큼 착한 사람일 것이다.’ 결국 대원들을 하나씩 잃어가면서 라이언 일병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서 라이언만 살고 밀러와 대원 전원이 죽습니다. 

그 때 밀러는 라이언에게 말합니다. ‘오직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목숨을 바쳤다. 그들의 희생으로 너는 살아났다. 그들은 더 이상 바칠 것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는 있다. 너는 그들의 희생에 맞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여덟 명이 목숨을 던진 것입니다. 한 영혼을 찾으려는 이와 같은 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2010년도 표어를 작년에 이어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라고 정했습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여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시 유언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집은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2010년 한 해 동안 한 영혼을 우리의 가슴에 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그리스도 앞에 세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것을 믿습니다. 우리 한번 2010년도 표어를 함께 외치며 한 영혼을 우리의 가슴에 품기를 바랍니다. 제가 먼저 선창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마더 테레사의 시를 한 편 읽어 드리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만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못했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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