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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천히, 그러나 진실하게 (잠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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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러나 진실하게 (잠 19:1~4)


[거짓말을 하며 미련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가난해도 흠 없이 사는 사람이 낫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

• 겉과 속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공격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가시 돋친 말로 응대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공적인 자리에 설 때의 나의 모습과 사적인 자리에서의 나의 모습은 다를 수 있습니다. 가면이라고 하면 뭔가 가식적인 태도를 연상시키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가면’을 라틴어로 ‘페르조나’(Persona)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 사회가 내게 기대하거나 만들어준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어쩌면 페르조나에 대한 제일 좋은 번역어는 ‘노릇’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른 노릇, 아빠 노릇, 목사 노릇…우리 삶은 이런 노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노릇’이 우리에게 자기 충족감을 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자기의 실체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는 말괄량이 소녀가 살고 있는데, 점잖은 숙녀 노릇을 하려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나 집단이 기대하는 어떤 ‘노릇’에 실패할 때 우리는 소위 말하는 조직의 쓴 맛을 보게 됩니다. 왕따를 당하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부에 의해 강제된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나려니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갑니다. 삶이 힘겨운 것은 자기의 참 모습과 가면을 쓴 모습이 늘 조화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본문의 1절을 ‘거짓말을 하며’라고 번역해놓았는데, 예루살렘 바이블은 그것을 ‘겉과 속이 다르고’라고 번역해놓고 있습니다. 이때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것은 좀 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비열하거나 이기심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음으로 승복할 수 없는 강자 앞에서 굴종의 자세를 보이거나 아첨의 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고, 자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앞에서도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사29:13)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만, 마음으로는 제 욕심을 따르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미련하게 사는 사람’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경험은 좀 다릅니다. 우리는 자기 앞가림을 잘 하는 사람을 보면 똑똑하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서 사람들이 걷는 넓은 길을 마다하는 사람을 보면 사회성이 부족하다거나 세상 물정 모른다며 비웃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가지고 사는 것은 결국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런데 잠언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난해도 흠 없이 사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흠이 없다는 말은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인격의 통합성을 유지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가난해도 떳떳하게, 자기중심을 유지하며 살겠다고 작정하면 인생의 비애는 적어집니다.

• 그릇된 열심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식이 없는 열심’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을 ‘분별력’으로 바꾸어도 차이는 없을 겁니다. 분별력이란 ‘사물을 제 분수대로 각각 나누어서 가르는 능력’입니다. 분별력이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제 분수를 모른다는 말이겠습니다. 세상의 혼란은 제 분수를 모르는 이들의 과도한 열정이 빚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처럼, 자기 분수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평안한 삶인데, 세상은 그런 삶을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무한경쟁’,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이 우리를 얼마나 강박적으로 몰아대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교육은 아이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천품과 재능을 살려주기보다는, 이 사회의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아이들을 몰아댑니다. 교육이 오히려 아이들 속에 있는 천재를 죽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열심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열심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분별력 있는 열심이라야 자기도 즐겁고 남들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망치고 세상도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씀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롬10:2)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자기처럼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시 혹은 박해로 나타나곤 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적 열성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신앙적 기준에 맞지 않는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분별력 없는 열정이 얼마나 맹목적이며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지식 없는 열심’의 위험을 경고한 후에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 옛말에 “知足이면 不辱이고 知止면 不殆하여 可以長久니라”(노자, 44장)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데를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몸을 지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이 병통입니다. 멈추지 못하는 것은 충족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든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멈추어 선다는 것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바라는 바를 아뢰는 것만이 아닙니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삶의 키를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트로슬리에 있는 장애인시설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한 사람이 프랭크라는 장애우에게 물었습니다. “가끔 기도를 드려요?” 프랭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다시 “뭐라고 기도해요?” 하고 물었습니다. 프랭크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 “나는 그냥 들어요.” “하나님이 뭐라시던가요?” “하나님은 내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하셨어요.” 진실한 기도는 우리가 누군지에 대해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이들은 충족감을 느낍니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갈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 원망하는 버릇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세상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그 소리가 더 직접적이고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은 언제나 달콤합니다. 뱀이 하와의 마음을 호렸을 때 하와는 눈을 들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성서 기자는 하와의 마음에 일어난 일렁임을 이렇게 표현해놓았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창3:6). 성서의 새번역 작업을 한 이들도 ‘~ㅁ직하다’는 표현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달콤함의 뒤끝은 후회일 때가 많습니다. 어느 개그맨이 유행시킨 말처럼 ‘괜히 그랬어’ 후회해봐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순간, 인간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거리’, 그렇습니다. 거리가 생겼습니다. 소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눈길을 피해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나무 뒤의 실존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3:9) 인류 최초의 형제살해자인 가인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창4:9) 물으십니다. 

두 경우 모두 질문이라기보다는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구나’ 하는 질책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돌아오라는 부름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입니까? 성경에는 ‘돌이키라’는 음성이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지금 우리는 벗어난 자리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챙겨주신 청정한 마음 다 잃어버리고 황량한 욕망의 들판을 굶주린 이리처럼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이 힘겨울 때면 우리는 일쑤 누군가를 탓합니다.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히브리 지혜자의 말은 얼마나 통렬합니까? 

“사람은 미련해서 스스로 길을 잘못 들고도, 마음속으로 주님을 원망한다.”(3)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자기 삶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하나님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합니다. 물론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은 건강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 옛 말에도 탓하는 마음의 병통을 지적하는 말이 많습니다. 글씨를 잘 못 쓰면 필묵 탓, 떡이 설면 안반 탓, 양식이 떨어지면 며느리 손 큰 탓, 일이 안 풀리면 조상 탓…. 사람이 제 아무리 어리석어도 남을 책망하고 탓하는 데는 밝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허물을 보는 데는 어둡습니다. 

탓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도 병들 게 하지만 다른 이들의 마음도 어둡게 만듭니다. 어두운 샘에서 물을 길어 밝은 데 쏟아 붓는 것이 사랑입니다.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선하고 온유하고 깨끗한 성품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와 편견과 어려움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불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정이 급한 시몬에게서 베드로 곧 반석을 보아내셨습니다.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아내셨습니다. 영혼이 성숙한 이들은 상대를 너그러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삶이 힘겹고 어렵다고 하여 하나님이나 남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본디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면 돌이키십시오. 그런 후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용기를 내십시오. 원망하고 탓하는 버릇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 재물과 친구

본문의 마지막 대목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태를 반영하는 말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씁쓸합니다. 

“재물은 친구를 많이 모으나,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4)

설마 이 말씀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어야 돼!’ 하고 결의를 다지시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표정들이 왜 그러세요?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1840년 겨울,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권돈인과 더불어 삼총사처럼 지내던 친구 김유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낙심합니다. 이듬해에는 부인마저 잃었습니다. 거듭되는 우울한 소식에 그의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더구나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소식을 끊어 그의 외로움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는 책과 서화를 벗 삼아 소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인 이상적은 해마다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계의 최신 정보를 전해 주었고, 진귀한 서적들을 구해다 주었습니다. 가까운 친구조차 유배를 떠난 그를 멀리하는 세태 속에서 이상적의 한결같은 모습이 추사의 마음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추사는 문득 <논어>의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자한子罕’ 편에 나오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나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는 구절이었습니다. 

이상적이야말로 공자가 말하는 송백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던 추사는 붓을 들어 자신의 처지와 이상적의 절개를 비유한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창문 하나 그려진 조그만 집 하나, 앙상한 고목의 가지에 듬성듬성 잎이 매달린 소나무 한 그루, 그리고 나무 몇 그루를 그렸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歲寒圖>입니다. 이 그림을 통해 추사는 선비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들지 않음’(後彫)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후조’ 곧 시들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까? 저는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 너희’(눅12:4, 요15:15)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눈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벗들에게조차 배신당했습니다. 어려운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다 예수 곁을 떠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선물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의 눈길이 머물고 있는 곳, 고통과 참상이 있는 곳에는 한사코 다가서려 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때에 주님 곁을 떠났던 제자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궁핍하면 친구도 떠난다’. 이 말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해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좋아서 주님 곁에 머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합니다. 하지만 너무 서둘 것 없습니다. 한 걸음씩이라도 주님과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가면 됩니다. 늘 우리 마음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진리가 주는 자유로움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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