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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밝은 눈 (마 9: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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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눈 (마 9:27~31)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지난 금요일 심야 기도회 시간에 함박눈이 마구 펑펑 쏟아져서 자동차를 가지고 왔는데,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아직 감기로 고생을 하고 있는 아내가 걱정되어서 함께 가려고 늘 앉던 자리를 살펴보니까 보이질 않아요. 마침 다른 줄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내인 듯싶어서 손으로 어깨를 살짝 누르며 가자는 신호를 보냈어요. 그리고 몇 걸음 나가서 기다리는데, 얼마 후에 뒤를 돌아다보는 분을 자세히 보니까 아뿔싸 아내가 아니라 어떤 권사님이었어요. 아무리 밤이라고는 하지만 수십 년간을 같이 살아온 아내마저 분간할 수 없는 좋지 못한 시력 때문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지요. 

사람에게는 오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 중에서 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본다’는 표현이 유난히 많습니다. ‘먹어 본다’ ‘생각해 본다’ ‘걸어 본다’ ‘말해 본다’ ‘만져 본다’ ‘들어 본다’ ‘맛을 본다’ ‘맡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과거 본다’고 하였고, 오늘날은 ‘시험 본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예술은 눈의 예술이고, 문명도 눈의 문명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보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지체 중에 어느 지체가 중요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마는 그 중에도 특히 눈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고 해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찬란한 태양 빛이 비추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검은 옷을 입든 흰옷을 입든 보지 못하는 사람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맹인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불쌍한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해준 이적을 상고해 보면서 ‘밝은 눈’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27절에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 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중근동 지방에는 맹인들이 유독 많았는데, 그 원인은 석회가 섞인 모래 바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막의 눈부신 햇살과 모래바람, 그리고 주야의 격심한 기온 차이와, 또 그들의 생활 관습이 주로 옥외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안질 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스펄젼목사님의 설교 집에 보면 근동 지방에 맹인이 얼마나 많은가를 짐작할 수 있는데, 카이로의 거지 100명 중에서 20명은 완전히 소경이고, 10명은 외눈박이며, 다른 20명은 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아서 주님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에도 맹인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여섯 명의 눈먼 자를 치료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맹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군중들 입에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한 경우는 이 두 맹인이 첫 번째입니다. 이 두 맹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만왕의 왕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이 예언하기를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 왕족의 후손 중에서 나올 것이며, 다윗 왕조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곧 메시아를 가리키는 신앙고백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두 맹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비록 육체적으로는 장애인이었을지라도, 영적인 눈은 아주 밝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비록 박식한 지식과 건강한 육신의 눈은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었던 반면, 본문에 나오는 두 맹인은 비록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밝은 영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영적인 안목은 육신의 눈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백성 중에 장애자인 맹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 구약 성경에 능통한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허다했으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저 한 선지자나 랍비 정도로만 알고 대했습니다. 또 백성들은 자신들의 병과 굶주림을 해소시켜 줄 세속적인 메시아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습니다. 그러기에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신성 모독자로 오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표적에만 관심을 두고 그 말씀에는 불순종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무지와 오해는 옛날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으로 섬기지 않고 경망스럽게 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다윗 왕과 같이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예언했고, 만국의 왕이시오 만왕의 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긴다고 하는 성도들 가운데서도, 주님을 경홀히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축복이나 신비한 표적만 중히 여기고, 왕 되신 주님의 명령에 전혀 순종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 사람들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리스도를 뛰어난 윤리 도덕의 모범자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고 경외심이 없습니다. 맹인들처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겸손과 순종심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고대에 왕이나 군주를 호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지전능하시고 세상 모든 것의 통치자이시며, 우리 인생들의 생사화복의 대주재이신 영원한 왕으로 알고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앞에 겸손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게 되며, 그 권세를 의뢰하는 참 성도의 생활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8절에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할 줄을 믿느냐?”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바로 고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신 이유는, 먼저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선뜻 은혜를 베푸시는 때가 있는가 하면, 여러 번 간구하고 수고해야 응답하는 경우도 있음을 복음서는 보여줍니다. 

수로보니게 즉 시리아 국경 지방의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이방의 개’라는 수모를 듣고도, 물러서지 않고 간청함으로서 귀신들린 딸이 고침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무슨 이유로 어떤 간구에는 쉽게 응답하실까요?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보시고 테스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쉽게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무언가 믿음의 요소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테스트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신 후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맹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확신에 가득 찬 믿음을 확인하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소경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려면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아 따라오는 일이 맹인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기도 응답을 받으려는 성도는, 오직 믿음과 확신으로 나가야 한다는 원리를 배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믿음과, 주님은 아무리 천하고 연약한 자라도 업신여기시는 분이 아니심을 확신하고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고 낙심하며 불평하고 포기하면, 결코 주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두 맹인들처럼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성도만이, 풍성한 은혜와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맹인들에게 “너희 눈들이 떠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확신으로 가득 찬 맹인들에게 예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믿음은 모든 기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인이 됩니다. 

맹인의 눈을 즉시 보게 한 이적을 행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에 대해서 갖는 세속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시려고,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맹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은 고침 받은 자들에 의해 금방 사람들에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복음 전파는 신자로서의 의무감이나, 교회의 수적 증가를 위한 전략에 의해 행해져야할 행위이기보다는,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하심을 체험하게 되면 불가항력적으로 행할 수밖에 없는 자발적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맹인이 눈뜬 사실, 그리고 맹인 된 당사자들이 눈을 떠 보게 된 사실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삼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이 오히려 무리가 아닐까요? 그들의 가족이 있고 친구들이 있는데, 그 눈뜬 놀라운 은혜를 어찌 침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 고침 받은 사람치고 소문 안 낸 이들이 없었으며, 오히려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그 사실을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때로 침묵이 필요합니다. 때와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지혜도 성도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도저히 잠잠하고 숨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값비싼 보석이나 멋있는 배우자를 얻은 자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데, 이 세상 최고의 보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영생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들은 모두 그 은혜를 자랑하고 전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소문내지 말 것을 엄히 명령받은 사람들도 주님의 은혜를 전파했는데,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우리가 침묵하는 생활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의 은혜를 소문내고 다니는 참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눈을 ‘아인’이라고 합니다. 이 ‘아인’이라고 하는 말은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샘’이라는 말이요 ‘원천’이라고 하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눈은 우리의 생각과 우리 모든 경험, 또는 지혜의 샘이요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히브리인들은 눈을 가리켜 원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물학자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과,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사람은 깊은 관심이 없이 봅니다. 나무가 크다, 작다, 무슨 나무냐, 멋이 있다, 그런 정도로 봅니다. 그러나 식물학자가 볼 때는 무슨 과에 속하는 어떤 나무인가, 어느 나라 산인가, 몇 년 되었을까, 영양상태가 어떤가, 이 나무는 이 토양에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지식과 전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봅니다. 보는 눈이 벌써 다릅니다. 그래서 관(觀)하면 보통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샅샅이 보고, 주의 깊게 보고, 의도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인생관이라 하고,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역사관이라 하고,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가치관이라 하고, 국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국가관이라 하고,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눈이 어두우면 어두운 인생이고, 눈이 고장 나면 고장 난 인생입니다. 

이 보는 것의 중요성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선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더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우리도 맹인인가”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맹인인줄 아는 맹인은 맹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맹인이면서 맹인인줄 모르는 인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본다고 하면서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을 산 헬렌 켈러 여사에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헬렌 켈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처음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여 깨달은 것은 눈을 가지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무는 보면서도 숲은 보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새는 보면서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는 보면서 그 우주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가지고도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참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도 영원한 세계도 보지 못하는 인생,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바로 영적 맹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이 보이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천국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떻게 예수님과 인사하시겠습니까? 혹시 이렇게 인사하실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처음 뵙겠습니다.” 정말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듣습니까? 주일마다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계신 그분을 뵙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내 눈이 아무리 깨끗하고 밝아도 빛이 없으면 못 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눈이라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영안이 열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주셔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장차 천국에 뿐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주님을 뵙게 됩니다. 오늘 이 순간도 여러분이 말씀을 성령으로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뵈옵는 영의 눈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시력 테스트에서 2.0이면 우리는 최고로 좋은 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을 훨씬 넘어 9.0을 가진 부족이 있다면 여러분 믿으시겠습니까? 2007년 MBC 예능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9.0이라는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태국의 모겐족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모겐족은 태국의 ‘수린 군도’ 지역 섬에 사는 부족인데, 모겐족 시력은 5.0-9.0 사이라고 하며, 9.0이라는 시력은 독수리 시력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하루 2시간씩 구름을 쳐다보고 대자연에서 생활하며 그 지역에서만 난다는 열매 가루를 눈에 바르는 것이 뛰어난 시력의 비결로 알려졌습니다. 

호수 같은 눈, 쌍꺼풀 진 눈, 시력 테스트에서 2. 0이 나오는 눈, 9.0의 시력을 가진 모겐족의 눈, 아니 천리안보다 더 좋은 눈 밝은 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보는 눈,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않는 눈, 정결한 눈,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볼 수 있는 눈, 영혼의 가치를 분별할 줄 아는 눈, 희어진 밭을 볼 수 있는 추수군의 눈,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눈,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눈,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앙망하는 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밝게 살고, 아무리 불안해도 평안하며, 절망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영혼의 햇빛 예수님 가까이 비춰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항상 밝은 영안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영혼의 햇빛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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