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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자) (시 5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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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자) (시 51:16~17)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者)가 어떤 예배(자)인가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詩, 시편 51편 16-17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主께서는 祭祀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主는 燔祭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傷한 心靈이라. 하나님이여 傷하고 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 17). 아멘.

우리가 부르는 복음송 중, 󰡔마음이 傷한 자를 고치시는 主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1절 만). 아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예배할 때, 예배하는 행위도 매우 소중하지만, 하나님은 예배행위 그 자체보다 더 소중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배자로 예배할 때, 예배자인 우리의 마음을, 예배행위보다 더 먼저 요구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예배자의 마음은, 傷한 心靈입니다. “傷하고 痛悔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셨습니다. 

20세기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J. K. Galbraith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時代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규정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불확실성의 基底(기초를 이루는 밑바탕)에는, 가치의 혼돈(란)이라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가치부재, 가치혼동, 이것이 불확실성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겁니다.

요즘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적인 갈등의 요인도 따지고 보면, 價値混沌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모 國會議員이 국회에서 행한 폭력이 단독판사의 재판결과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또 어느 TV방송국의 PD수첩 ‘광우병 보도’도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런 잇따르는 무죄판결로 사회적인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같은 사안의 문제에 대하여 판사마다 판결이 다른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각자 나름대로의 생각과 소신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인 갈등현상은,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혼돈의 문제에, 사태의 본질이 있다는 점입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지나간 歷史를 반면교사로 삼아보는 것은 우리시대, 사회를 가늠하는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역사를 돌이켜 보면, 法이 불의한 적도 있습니다. 어느 사회나 국가에는 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법은, 그 사회․국가의 도덕의 最高善(至高善)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의 最下限線(더 이상 내려 갈 수 없는 한계선, 더 내려가면 안 되는 선)이 法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法이 불의한 적이 너무 많습니다. 나치 獨逸에서는, 유태인들과 ‘열등한 종족들’을 죽이는 것이 합법이었습니다. 반면에, 영화에서도 보셨듯이 죽음의 무덤 아우슈비츠에서 천여 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살려낸 Oskar Schindler 같은 인물은, 불법자였습니다. 나치 독일에 항거하였다고 해서, 어찌 그것이 불법이고, 불법자입니까?

미국의 제16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시대, 미국의 남부를 중심으로 人間奴隸를 사고파는 것은 合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노예를 해방시켜 주거나, 탈출을 돕거나, 그들을 도와주는 행위는 불법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과거 미국의 노예 학대행위는, 명백한 죄악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에 서명을 하고 奴隸制度는 不法이라고 선언한 이후부터, 노예제도가 불법이 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노예해방선언 이전에도, 노예제도는 늘 불법이고, 잘못된 제도였던 겁니다. 종국에 가서, 법이 노예제도를 불법으로 규정하게 된 것뿐이지요.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것, 나치 독일의 인종학살 같은 문제는, 당시 미국과 독일의 실정법이 합법이었다고 해서, 합법적인 것이 아니지요. 처음부터 그것은 불법이었고, 그 어떤 이유로도 정의요, 진리요, 옳은 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를 넘어서는 眞理와 非 眞理에 속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存在인가?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로 샤아, שׁעה לא, 가인의 제사와 그가 드린 제물, 로 샤하;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멸시치 않으시는 예배는, 傷한 심령을 가진 자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傷하고 痛悔하는 마음을 가진 자의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며칠 전 일간지 신문에, 캡처(capture, 순간포착 된 사진)된 두 장의 사진이 한 동안 제 눈을 사로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서로 상반된 두 얼굴 사진이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은 매우 의아한 눈빛이 역력한 놀란 얼굴표정의 사진이고, 또 한 장의 사진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가 온 얼굴에 가득한 사진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진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 비유에서 당대 가장 대조적인 두 人物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아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 말은, 아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남과 스스로 區別하여 義로운 자라고 자칭하던 자들입니다. 당시 6000여명 쯤 있었던 유대종교의 한 파를 형성하고 있었습지요. 그들 중에 서기관도 있고, 율법학자, 랍비들, 주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당시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가장멸시 천대받던 稅吏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중, 각각 한 사람씩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너무나 대조적인 태도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로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稅吏와도 같지 아니함을 感謝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목요일, 율법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했습니다(철저한 십일조: 박하: 香菜, 근채, 회향: 양념이나 약재로 쓰이는 식물, 아주 사소한 수확물을 가리키는 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드린 십일조를 책망하신 말씀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십일조 드림을 자기 의로 여겼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십일조 드림이나, 율법지킴을 마치 하나님께 품삯을 받기 위해 하는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稅吏는 어떻게 기도 합니까?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罪人이로소이다.” 이 한 마디 기도가, 그의 祈禱 全部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기 존재가 너무 초라한 죄인이라는 것을 성찰한 거지. 마음이 상하여, 너덜너덜해진 자기 모습을 부둥켜안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인 것이지요. 비록 남보다 돈은 더 많이 벌었지만, 돈으로 성공해보겠다던 그런 자기 자신에게도 絶望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돈이면 다’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는데, 도리어 그 돈이, 자기 존재를 세상으로부터도 철저하게 소외시켜버린, 오갈 때 없는 자임을 깨달은 거지요. 그 아픈 마음을 토로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결론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 14상). 

우리는 홍수 후에, 方舟에서 나온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노아 洪水는, 40일 동안, 하늘의 궁창이 열리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진 홍수입니다. 그것은 마치 수문을 완전히 열어젖힌 댐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은 홍수였습니다. 그렇게 쏟아진 물이, 150일 동안 온 땅에 창일하였으니, 지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초토화라는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신학적으로 굳이 표현하면, 창조질서의 파괴입니다. 150일 동안, 온 땅에 창일하던 물이 드디어 물러가고, 대홍수가 시작된 지 정확하게 1년 10일이 지나고서야, 노아의 가족들은 비로소 마른 땅에 다시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창 8, 14).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첫 번째로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모든 정결한 짐승들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제사를 드렸습니다(속죄제사가 없던 시대, 번제가 속죄기능을 대신하던 때). 그러면,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을까요? 노아는, 당대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義人입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홍수 후에 方舟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동이, 하나님께 번제제사를 드림이었다는 겁니다. 노아는,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평가받았지만, 그런 자기 안에도 있는 인간의 깊은 罪性을 성찰한 거지요. 하나님 앞에, 번제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고, 스스로 참회한 거지요.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야 하는 우리는 단지 그저 한두 번 죄를 지은 前科者(그저 전과가 한두 번 있는 자)가 아닙니다. 전과자가 아니라 罪人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내가 기억나는 죄, 지은 죄 한두 가지, 내가 죄라고 인정하는 몇몇 가지 죄 때문에, 懺悔하고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한 사람들입니다. 내 존재의 근본이 罪人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고백하고, 그 점을 懺悔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윗의 고백을 보지 않습니까? “母親이 罪惡 中에서 나를 孕胎하였나이다.”

그저 내 머리로 記憶하는 몇몇 가지 罪들만 罪인줄 알고 悔改하는 것은, 마치 이런 겁니다. 죽을 병에 걸린 환자가, 드러난 문제의 현상만을 치료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머리가 아프다고, 타이레놀만 먹으면, 어떻합니까? 소화가 잘 안되고 소화제만 먹고, 설사한다고 지사제만 자꾸 먹으면 어떻합니까? 위내시경을 해봐야지요. 대장내시경도 해봐야지요. 왜 그런지, 병의 근원을 찾아야, 치료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인생의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만이라면, 유능한 경제학자만 있으면 됩니다. 인간의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만이라면, 위대한 정치가만 있으면 됩니다.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문제만이었다면, 훌륭한 윤리교사가 있으면 됩니다. 

사실, 예수님도 어느 정도 그런 분이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시지요. 예수님은,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근본 문제가, 하나님을 떠난 죄의 문제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담 범죄 직후부터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는(유사기독교이단들, 특히 구원파, 죄사함의 비밀을 가르치는 朴옥수라는 인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라, 더 이상은 罪人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됩니다. 반쪽 복음입니다. 유사복음, 거짓복음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맞서는 일).

디모데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에서, 말씀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다음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罪人 中에 내가 魁首니라(首魁, 우두머리, 내가 가장 나쁜 죄인이다)”(딤전 1, 15). 중요한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쓸 당시,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불신자도 아니고, 더구나 초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복음을 전하는, 주님께서 택하여 쓰시던 ‘그릇’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결코,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魁首니라”(헬라어 성경, 현재형; prw/to,j eivmi evgw,). 이 편지를 쓸 당시에, 그는 자신이 죄인 중에도 魁首라고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연구하였던 종교개혁자 M. Luther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규명합니다(Simul justus et pecctor; 義人인 동시에 罪人).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매 순간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바울에게는 끊이지 않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우리가 습관적으로 고백하는 ‘나는 죄인입니다’는 말은, 우리가 행한 그 무슨 죄(행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죄인 되었다 함은, 우리가 本性的으로 罪人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본성적인 죄를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못난 구석이 많은 나이지만, 그것 아랑곳 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 앞에 서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맙니까? 한 없이, 부끄러운 사람이 되도 맙니다. 한 없이 작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가 작은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그가 나를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나를 더 사랑스럽게 여겨줍니다. 오히려 나의 연약함의 고백이,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을 더 뜨겁게 만들어줍니다. 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신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혜)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은혜가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가 되도록, 언제나 우리의 허물과 죄악 됨,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가지고, 主님의 십자가 사랑의 손을 붙잡으십시다(성 프랜시스가 죽기 2년 전 1224년 8월에, 라 베르나 산에서 올라가 40일 금식…,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몸을 구푸려 십자가를 붙든 성 프랜시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의 몸에 五傷, 다섯 개의 상처를 새겨주셨습니다. 그러나 프랜시스는 너무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니, 본성적으로 죄인입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주님의 십자가 붙들고 선 프랜시스에게 손 내밀어 그의 손 잡아주신 주님, 우리의 손도 잡아주옵소서. 우리도 행복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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