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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라고 있습니까? (엡 4: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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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고 있습니까? (엡 4:13~15)
 

1. 성장이 멈추다니?

여러분이 다 아시는 대로 사람의 성장에는 限界가 있습니다. 遺傳的인 요인과 環境的인 요인에 의해 차이가 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춘기 때의 2∼3년 동안 급격히 자라다가 평균 25세를 전후로 성장 판이 닫히면서 성장이 멈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장이 멈추는 그때부터 사람은 늙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신체에만 성장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탈리아 실업가인 ‘아우렐리오 페체이(Aurelio Peccei)’가 유럽의 경제학자, 과학자, 기업인 등 36명과 함께 1968년에 설립한 ‘로마 클럽’은 1972년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책을 出刊했습니다. 

이 책은 천연자원 고갈, 공해에 의한 환경오염, 개발도상국의 폭발적인 인구증가, 군사기술의 진보에 의한 대규모의 파괴 등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無限한 것이 아니라 有限한 것’이라는 전제 아래, ‘성장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므로 급격한 성장을 둔화시켜야 미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자연, 환경, 정치, 경제, 과학 등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신앙은 어떨 것 같습니까? 신앙성장에도 한계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앙의 성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여기에는 신앙의 한계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표현은 사실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한계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한계가 없다는 말과 같으며, 따라서 신앙은 평생 성장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법칙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질문이 나옵니다. ‘신앙의 법칙은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계속 자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계속 자라왔고,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자신의 신앙이 멈춰 있다고 생각되는 분은 없습니까? 멈춘 것은 고사하고 퇴보하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은 없는지요? 

오늘 본문은 2010년 새해를 맞은 저와 여러분에게 올해도 계속 되어야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성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점검하고, 이제부터 어떻게 성장해 갈 것인지를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1) 자라가라!

“성장”이라는 말은 본래 생물학적인 용어입니다. 사전적인 정의로는 “생물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의 크기가 커지거나 세포의 수가 많아져서 생물체의 크기가 커지거나 무게가 증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런 의미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엄마의 태속에 있다가 태어난 아기는 물론 태속에서도 자라지만, 태어난 그때부터 계속 자랍니다. 그런데 아기가 자라나는 것을 보면, 영적인 성장도 그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성장의 과정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과 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자라야 하는데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간 중국 후베이 城에 사는 올해 스물 두 살 된 ‘우캉’이란 이름의 청년이 인터넷에 소개되었습니다. 이 청년은 키가 68cm, 몸무게가 9kg로서 얼굴과 체격이 두 세 살짜리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성인이지만 발육이 크게 지체돼, 계속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경우처럼, 영적으로도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즉 교회 안에도 육체적으로는 어른이고, 또 지식적으로도 어른이지만, 영적인 측면에서는 어린아이인 사람들이 허다하다는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성장하게 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인도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한다는 것의 의미와 더불어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그에게까지

사람의 나이와 키와 덩치가 千差萬別 제 각각이듯이 교회 안에도 신앙의 연륜이 다 다르고 신앙생활 하는 모습 역시 제 각각입니다. 신앙생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성도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평생 해 오신 분들에 이르기까지 신앙생활의 偏差가 아주 심합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신앙이 아주 깊은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10년 이상 되었는데도 신앙이 깊지 않은 분들이 있습니다. 가정에 어린아이가 있고, 청년이 있고, 장년이 있고, 노년이 있는 것처럼 교회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는 신앙의 연륜에 걸맞게 신앙적인 깊이를 비롯하여 정서적인 면이나 인격적인 면 등 모든 것들이 성숙해야 하는데, 나이는 서른 살인데 신앙연령은 열 살이나 혹은 그 이하밖에 되지 않는, 즉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집에 어린아이들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식구들의 신앙이 한결같이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만 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문제가 많은 교회이겠습니까? 

자녀를 낳아 그 아이가 별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랄 때, 키와 덩치도 잘 자라고, 지혜와 지식도 잘 자라고, 성품과 인격도 잘 자라서 어느덧 어른이 된 자녀를 볼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기쁩니까? 성도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서 잘 자라다가, 그만 열 살에 성장이 멈추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열 살에 성장이 멈추어 스무 살이 되어도 열 살, 서른 살이 되어도 열 살이라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부모처럼 우리 하나님도 성도들이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삶의 모든 면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이 잘 표현된 말씀이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큼 자라가라는 말입니다. 

베드로 역시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자라가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라가라’ 등 ‘자라가라’는 표현이 정말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자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실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고 권합니다. 

에베소서의 특징은 성도 개개인이 성장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이 효과적으로 성장하려면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성장해가야 합니다. 

이러한 에베소서의 맥락 가운데서 오늘 본문은 7절에서부터 이어지는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 따라 직분을 주셨는데,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서, 성도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점차 그리스도의 경지까지 이르러 그것이 한 개인의 성장으로 끝나지 않고 지체들과 함께 거룩한 주님의 교회 공동체로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요지는 제대로 된 교회는 각 교인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직분을 받아 열심히 충성하는 가운데 성도 개인이 온전케 되고, 그 결과 교회가 온전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신앙의 어린아이들이 많은 교회, 즉 성장이 멈춘 성도들이 많은 교회, “만성적인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있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온전하지 못한 교회요, 그 중에 더러 잘 자란 다른 성도들까지 성장의 지체나 노화의 자리로 이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권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요?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바로 알고, 거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하여 올 한 해 비약적인 성장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➊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신앙의 첫 번째 단계는 “어린아이” 단계입니다(14).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썼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고전3:2~4).” 

즉 신앙의 첫 단계는 “어린아이” 단계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성이 발달되지 못했습니다. 자기 감정을 어느 때 드러내고, 어느 때 드러내지 말아야 할지를 조절하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미숙’한 것이죠. 또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를 잘 분간을 못합니다. 분별력이 없고 판단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떨 때는 뭘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고 실수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한 번씩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면, ‘다른 아이들이나 어른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또한 아이들은 내 것과 남의 것을 잘 분간하지 못합니다. 남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 도둑질인 줄을 모르고, 그저 자기 마음에 든다고 가져오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렇게 어린아이들은 모든 면에서 未熟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어린아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어린아이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아직도 세상적이고 부패하고 타락한 사고와 행동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인간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경건하고 거룩한 소원보다는 인간적인 욕망이 자신을 주도하는 사람이며, 항상 죄로 인하여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아는 것 같고, 아무리 거룩한 분위기와 겉모습을 드러내려고 해도, 또 제 아무리 세련된 성도처럼 보이려고 해도 거룩한 일들과 거룩한 것에 대한 욕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믿은 세월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믿은 지 오래되어도 이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린 아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식, 자기주장, 자기신앙이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절대로 양보하거나 타협할 줄 모르고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우기면서, 그것을 다른 사람이 인정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을 순교정신인 양 생각합니다. 

이러한 단계로부터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이기주의, 신앙이라는 이름의 형식주의, 신앙이라는 이름의 불신앙이 바로 이런 신앙적인 어린아이들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과 아픔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그만큼 그 교회 안에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이 어린 줄 모르는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➋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 번째 신앙의 단계는 “온전한 사람”의 단계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온전하다”는 말은 구약 희생 제사에 사용된 제물에서 온 말로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이 ‘온전하다, 흠이 없다, 완전하다, 충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기구의 기능이 ‘최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성숙하다’는 뜻과 ‘결여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완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어른’, ‘성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온전”에 해당하는 분, 진정한 의미의 “온전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 만이 완전하고 충분하고 흠이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나처럼 되어라’, 즉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 이 “이루라”는 말은 ‘향하여’, 또는 ‘추구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범사”라는 말은 ‘어떤 것이든지’, ‘온갖 종류에서’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라”는 말씀은 여러분의 모든 것, 여러분의 존재 자체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 전부가 하나님처럼 되기까지 그것을 사모하고 추구하면서 계속적으로 자라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여러분의 삶의 목표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신앙적인 어른, 즉 성인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 모두는 한참 자라야 할 신앙의 어린아이이거나 청소년 쯤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오늘 본문이 말하는 “온전한 사람”이란 신앙의 한 가지, 혹 몇 가지 요소만 고집하지 않고, 여러 가지 요소를 골고루 갖춘 사람, 즉 신앙의 요소를 균형 있게 갖춘 사람입니다. 『참으로 해방된 평신도』라는 책을 지은 ‘폴 스티븐슨’ 목사는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여행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위를 향한 여행’입니다. 성도는 자신 속에 거하신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서 점점 깨끗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는데, 이것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가 곧 ‘성장’이지요. 이것을 위하여 감사, 찬양, 경배, 고백 등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안으로의 여행’입니다.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고,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남들이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을 들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 볼 줄 아는 것이고,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셋째는 ‘밖으로 향한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그리고 세상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즉 ‘밖으로 향한 여행’이란 성도가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폴 스티븐슨 목사는 이러한 세 가지를 고루 갖추어야 균형잡힌 성도, 즉 성숙한 성도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셰익스피어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집에 없고 집안일을 책임지고 있던 하인이 주인을 대신해서 그를 맞이했습니다. 하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주인이 돌아올 것입니다’라면서 그를 거실로 안내했습니다. 그가 소파에 앉자 하인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왔습니다. 하인이 건넨 쟁반에는 기다리는 동안 간단히 읽을 만한 책 한 권까지 곁들여 있었습니다. 작은 배려에 감동한 셰익스피어는 가벼운 고갯짓과 눈웃음으로 답례를 했습니다. 그러자 하인은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 듯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한참을 기다려도 친구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남의 집 거실에 혼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에 머쓱해진 셰익스피어는 차를 한 잔 더 얻어 마실 생각에 부엌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부엌문을 연 순간 그는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혼자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누가 일부러 들춰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알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인은 누가 뒤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시킨 것 같지도 않은데, 혼자 콧노래를 불러가며 양탄자 밑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셰익스피어는 사람들에게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누가 지켜볼 때와 다름없이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슨 일에서나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셰익스피어가 만났던 이 친구 집의 하인은 비록 하인이지만 얼마나 성숙한 사람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설사 아무도 없는 곳에서라도 한결같이 신실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육신적인 나이에 걸맞게, 그리고 신앙의 연륜에 맞게 정서적으로 인격적으로 의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했습니까? 일반적으로 집안에 나이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자녀들이 있을 때, 부모들이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합니까? ‘아이고 언제나 철이 들라나?’, ‘언제쯤 사람이 될까?’, ‘언제쯤 제 밥벌이를 하고 제 앞가림을 하면서 사람 구실을 할까?’ 그런데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보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그런 걱정을 끼쳐드리는 자녀들이 안 되시기 바랍니다. 


3. 계속 성장해 가십시오!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숙氏와 성숙氏 이야기”라는 글이 있습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도 좋아한다.
미숙한 사람은 인연도 악연으로 만들고, 
성숙한 사람은 악연이야말로 인연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산다.
미숙한 사람은 고난이나 불행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바람과 물결이 항상 유능한 항해사의 편에 선다고 믿으며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미숙한 사람은 좋고 싫고를 따지지만, 
성숙한 사람은 옳고 그르고를 선택한다.
미숙한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큰 불행도 망원경으로 들여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미래를 내다본다.
미숙한 사람은 특별한 일들에만 관심이 있지만, 
성숙한 사람은 평범하고 작은 일에서 더 많이 배운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이 선택하려는 그 하나만을 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선택에서 제외되는 나머지까지를 살필 줄 안다.
미숙한 사람은 구름만 쳐다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바라본다.
미숙한 사람은 세상이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데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
미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웃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성숙한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의 성장도 늙는 법이 없다. 
……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만족에 머무는 일이다. 
……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미숙 씨와 친구입니까? 성숙 씨와 친구입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한계가 있으나 신앙 성장 만은 한계가 없다고요.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누구와 같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 하나님 아버지처럼, 예수님처럼 될 때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해, 주님처럼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계속적으로 자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라기 위하여 우리교회의 비전이자 목표대로, 예배에 충실하고, 성도간의 사랑과 교제에 충실하고, 전도에 충실하고, 봉사와 섬김과 나눔에 최선을 다하고, 제자훈련 사역자 훈련을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하여 여러분은 하루가 다르게, 그리고 한 달 한 달, 한 해 한 해 계속 성장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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