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의 떡을 먹읍시다 (요 6:48~51)

  • 잡초 잡초
  • 408
  • 0

첨부 1


생명의 떡을 먹읍시다 (요 6:48~51)
 
 
시사용어 가운데 ‘왝 더 독’(wag the do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말을 수입해서 쓰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해석해 보면 “꼬리가 개의 몸통을 흔든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들 수는 있어도 꼬리가 개를 흔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주객이 전도되고, 본말이 뒤바뀐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주로 경제 분야에서 이 말이 쓰입니다. 선물 매매가 현물시장을 좌우할 때 ‘왝 더 독’ 현상이 일어났다고들 합니다.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도 이 말이 쓰입니다. 대통령이 자신의 부정부패나 정책 실패를 호도하려고 국민들의 시선을 엉뚱한 데로 돌리려고 공작을 펼 때 ‘왝 더 독’이라고 비판합니다.

어쨌든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꼬리는 몸통의 통제를 받고 몸통을 보좌해야 합니다. 그런데 꼬리가 오히려 몸통을 좌지우지 하려고 든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몸통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꼬리 중심으로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존재 자체의 기반이 흔들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우리 인생 자체에 일어나고 있는 이 ‘왝 더 독’ 현상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꼭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은 외면하고, 육신의 떡만 좇으려 했습니다. 육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려 했지만 정작 영적으로는 피폐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인생의 본질인 영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육적인 문제에 몰두하다가 그 인생이 엉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일이 인생 자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육적으로만 풍성한 삶을 살려 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는 피폐해져서 그 삶이 진정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본질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에만 매달려 살면서 인생이 엉망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왝 더 독’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자칫 이런 세상 풍조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이제 본문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육신의 떡을 좇는 사람들

요 6:24-2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까지 왔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부분인 요 6:1-15를 보면 소위 오병이어의 표적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하게 그 자리를 뜨셨습니다. 한적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배를 타고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표적을 보여주셨던 벳새다를 구석구석 찾아보았습니다. 찾지 못하자 배를 타고 디베랴 바다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가버나움까지 와서 결국 예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찾아 나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확실하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속에 담긴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치셨습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저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유는 먹을 양식을 얻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떡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팔레스틴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로마에 앞잡이 노릇하는 권력층과 사회 지도층으로부터 수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끼니를 연명하며 사는 것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자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떡을 좇아 예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육신의 떡 문제에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관심이 온통 육신의 떡에만 쏠려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오직 육신의 떡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직 육신의 떡만 좇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는 이런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오직 먹고 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먹고 살만해 지면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돈! 돈! 돈!”하며 삽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없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의 특별하신 축복으로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를 돈 버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 하나님께서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다 아십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고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신 점입니다. 바로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저들은 이적만 보았다는 것입니다.

표적과 이적은 다릅니다. 우선 이적(異蹟)은 단순한 초자연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기적이라 부르고 영어로는 ‘미라클’(miracle)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해 표적은 상징적 사건을 말합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상징을 담아서 일으킨 특별한 사건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싸인’(sign)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우선 벳새다 들녘에 모인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배불리 먹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5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일 방법은 없었습니다. 갑자기 그 많은 음식을 만들 수도 없었고,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한 먹거리를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이적을 베푸실 때 그 안에 중요한 상징을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그 사건을 통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깨닫도록 메시지를 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요 표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병이어의 표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이적만 보았습니다. 그것이 표적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또 다른 이적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여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6:66-68말씀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우선 이적만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적은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실망하고 예수님 곁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적을 체험하고 그 이적을 표적으로 보고 그 안에서 소중한 메시지를 발견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표적이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적 체험 이후를 추적해 보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간이 지난 후 결국 주님 곁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간증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같은 이적만을 구하다가 실망하고 주님 곁을 떠나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적을 표적으로 볼 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적 안에 담겨있는 소중한 주님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이적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표적은 계속됩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클래식 음반으로 무려 천만 장을 돌파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인생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41세에 백혈병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오페라 ‘라보엠’ 연습 중에 갑자기 쓰러져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치료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놀라운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고 다시 노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때 이 이적을 표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를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소망을 전하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전 재산을 팔아서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공연의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이후의 삶은 전혀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표적을 보이십니다. 그 때 이것을 단순히 이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표적으로 보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으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이 말씀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떡’이라 하셨습니다. 떡이란 양식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양식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양식을 먹으면 소화하여 영양분을 육체의 각 부분에 골고루 공급하게 됩니다. 영양분이 호흡하여 받아들인 산소와 만나서 에너지를 만들어 냅니다. 에너지가 우리 육체의 생명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고하고, 활동하며, 생명체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란 단순한 육체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생명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영생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은 육체적 생명을 넘어서는 고차원적인 생명 즉 영생을 말합니다. 

이 영생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생명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전혀 새로운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명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부자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특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과거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되어 심판받고 멸망당할 생명이 이제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라’하셨습니다.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떡이 생명작용을 이루어 내듯이 예수님께서 우리가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생명 즉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떡은 우리의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줍니다. 그리고 육신이 생명작용을 힘차게 해 주도록 해 줍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십니다.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영적인 배고픔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영적 생명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5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그러니까 한 마디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먹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떡은 어떻게 먹을까요? 6:35-3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육신의 떡은 육신이 먹지만 생명의 떡은 우리의 영이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떡은 입을 통해서 먹지만 생명의 떡은 믿음을 통해서 먹는 것입니다. 결국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40절에서 이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생명의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장을 지내셨던 고 유호준 목사님에 관한 일화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일찍이 조실부모하시고 이모님 슬하에서 자라셨습니다. 신앙이 남다르셨던 이모님의 기도와 배려로 신학교에 가게 됐고, 목사가 되어 열심히 목회를 하시게 됐습니다. 이모님께서 연로하셔서 세상을 떠나시게 됐는데, 임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유 목사님께 이렇게 유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 목사님! 예수 잘 믿으십시오. 예수 잘 믿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당부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목사에게 예수를 잘 믿으라니요... 목사는 예수 믿는 일이 직업이고, 예수 믿는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유호준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는 목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목사도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목양일념으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목회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목사님에게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모님이라는 분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너무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육신의 떡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 세상의 복을 받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를 믿어 영생을 얻고 그 영생을 풍성하게 누리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이 세상에는 인생의 ‘왝 더 독’현상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인 생명의 떡은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육신의 떡만을 좇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본질적인 표적은 외면하고 그저 비본질적인 이적만 붙잡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신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좇아야 하겠습니다. 이적이 아니라 표적을 보려 해야 하겠습니다.

더더욱 우리는 생명의 떡을 잘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더 잘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누려야 하고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