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당신은 자유하십니까? (롬 7:1~12)

  • 잡초 잡초
  • 436
  • 0

첨부 1


당신은 자유하십니까? (롬 7:1~12)


일년에 교회에서 휴가를 받아서 휴가를 갈때 2박3일정도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때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는게 꼭 있습니다. 2박3일가는데 간결하게 짐 챙겨서 가면 되지하지만 목사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다. 휴가갔다가 오면 주일 설교 해야하는데 또 어디 설교도 본문은 잡아놔야하는데 책도좀 읽어야 되는데 책을 읽으려면 휴가가지 말고 집에서 책만 읽지 휴가는 가긴 가는데 책을 챙기다보면 짐꾸러미가 꽤 됩니다. 

그러면 아내가 그 무거운거 뭐하러 가져가느냐 가봐야 보지도 않을텐데 그럽니다. 그러나 제 심정에는 직업적인 근성인지 모르지만 책을가져가 볼수 있으면 봐야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얽매이는게 많습니다. 여행을 한다면 다털어버리고 옷 한벌 입고 책 한 권 들고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늘 많이 얽매여 있어서 어디를 가더라도 늘 걱정하고 염려하게 되는것입니다. 가장이라면 가정에대한 또 내가 없으면 강아지밥은 누가주나... 아이들은 누가 챙겨 학교보내나 이런걱정이 있을겁니다. 또 직장인이라면 내가 없는동안 직장일을 누구에게 맡기나 이런 염려도 있을것입니다. 해외여행이라면 말할것도 없을겁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외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외적인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적인 속박입니다.

나는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내 속에 죄가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선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죄의 노예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가 내 속에 유혹하는, 유혹당하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그럼 그 유혹당하는 마음이 충동질앞에 절제하는 힘이 없어서 죄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중독현상이 주로 습관, 어떤 중독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도박중독이다. 이게 참 어려운겁니다. 도박에 한번 발을 디디면 빼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원도 정선에 카지노가 있는데 갈때는 말끔하게 차려가지고 좋은 승용차타고 갔다가 몇일동안 돈 다 털리고 나서 자동차까지 팔아먹고 거지가 되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도박중독 참 무서운것입니다. 알콜중독도 만만치 않습니다. 알콜중독 끊는것 쉽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주부들이 겪는 드라마중독도 있습니다. 10시되면 드라마 하는데 9시뉴스 끝났나... 선덕여왕봐야지, 아이리스 봐야지 요즘에 그거안보면 할 일을 안한거 같고 잠이 안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 못보면 다음날 재방송이라도 보려고 찾는이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게임중독에 종종 빠집니다. 학교갔다와 한시간동안 게임안하면 뭔가가 손에 안잡힙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지요. 그래서 한시간 채워야지 일이되고 공부가 된다는 겁니다. 뭔가에 매여있다는것 자유함이 없다는 겁니다. 중독이란것은 뭔가에 끌려간다는 겁니다. 

또 우상이나 귀신에게 노예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약 800만의 우상을 섬깁니다. 집에도 수십, 수백개의 신을 섬기기 때문에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대만에 갔을때 대만사람들이 출근하는 광경을 보니까 대만 시내에 향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사원에 들려 향을 피우고 제물을 드리고 가는겁니다. 왜? 귀신에게 잘보이고 잘 달래놔야지 귀신이 화가나면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고안나게, 사업이 잘되게 하려고 귀신에게 가서 비는 겁니다. 향피우고 제물드리고 출근하는 겁니다. 그들은 귀신에게 얽매여있고 우상에게 얽매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도 그런분이 많이 있습니다. 귀신섬기고 무당섬기는 사람들은 자기혼자 아무결정 못합니다. 이사를 가려해도 점쟁이나 무당에게 날짜를 잡아와야 합니다. 딸자식 결혼도 아무날이나 못합니다. 우리같으면 주일말고 토요일 아무날이나 하면 되는데 그들은 그렇게 못합니다. 꼭 물어봐서 날을 잡아와야 합니다. 그래야지 마음이 편안하단 것입니다. 심지어는 집에 못을 박는것도 자기혼자 못 박습니다. 물어보고 해야합니다. 그거 잘못 박았다가 집에 화가오면 어떻게하나 그런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유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어렸을때 속회보로 온 할머니가 그럽니다. 내가 딴건 몰라도 예수믿고 자유함얻었습니다. 이사갈 때 맘대로 가고 자식 결혼시킬때 아무 때나 보내고. 자유얻었다는 겁니다. 전에는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말입니다. 이게 그만큼 부자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율법에 노예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율법의 멍애를 지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늘 이 본문의 설교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한 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의 원리입니다. 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따라 광야를 살아가고 가나안땅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의 본질적인 문제를 잃어버리고 율법의 껍데기 만을 숭상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에 보면 한 율법사가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계명중에 가장 으뜸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물을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네 마음을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이게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율법의 정신은 진정한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삶의 멍애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다른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여겼습니다. 너는 왜 율법대로 살지 못하느냐. 너는 죄인이다 정죄합니다. 비판합니다. 판단합니다. 회당에서 쫓아냅니다. 자기 자신도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니까 비참한 삶이 지속되는 겁니다. 이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결국 우리에게 파멸을 선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선한면이 많습니다. 율법은 먼저 죄를 깨닫게 합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보니까 율법의 행위로 그의앞에 의롭다 여길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선과 악을 알려주는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7장 7절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말라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 탐내지 말라라고 율법에서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이 죄인줄 몰랐을거다. 선과 악을 깨닫게 하는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런가하면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하는 기능을 합니다. 어떤분을 볼 때 그분이 위장이 안좋다하면 소화제정도 먹고 맙니다. 약국에 가서 가스활명수 하나 먹고 넘어가고 넘어가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종합검진을 하러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MRI를 찍었는데 자기 위속에 암이 자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칩시다. 엑스레이 기능이 바로 드러내는 겁니다. 율법의 기능이 그겁니다. 죄를 정죄하고 끄집어내는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모르지만 죄를 끄집어내서 노출시키는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계가 있습니다. 죄를 죄로서는 정죄하지만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줄 알지만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게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우린 율법앞에서 절망하게됩니다. 왜? 율법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렇게 하라는데 하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지말라는데 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심리라는게 이상합니다. 하지말라면 더하고 싶고 하라하면 또 죽어도 안합니다. 어렸을때 부모님이 선반위에 뭘 올려놓습니다. 올려놓고 얘들아 절대로 이건 건들이지 말아라. 위험한거야 먹으면 안돼! 그러나 아이들의 심리는 저게 뭘까? 맛있는게 아닐까? 엄마아빠 먹으려고 감추어 놓은게 아닐까? 의자놓고 올라가서 내릴려다고 깨치고 떨어뜨리고 그러는 겁니다. 혼나는 겁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겁니다. 

율법은 하라 하지말라고 말씀하는데 하라하는것을 하지못하는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또 하지말라는것을 끝까지 하는게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이 낙심과 절망에 빠집니다. 그리고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종종 책망받은 겁니다.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그럴싸한데 속은 죄로 가득찼다는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앞에서는 근사하게 보이려고 하는겁니다. 율법이 명령한것은 다 지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 없는곳에서는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위선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말라는것을 돌아서서 혼자있을때 하는것입니다. 이중인격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율법주의자가 될수 있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남들에게 거룩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내가 장로고 권사인데 근사한 모습을 보여야지 남들에겐 그렇게 보일려고 하는데 남이 없는곳에선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건 위선자가 되고 이중인격자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잘못적용하면 위선자를 만들어내고 이중인격자를 양산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앞에서는 그럴싸한데 돌아서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할 때 너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 진정한 신앙은 진정한 경건은 사람에게 보이는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보지 않는데서 하나님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게 신앙의 척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좋은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에 깊이 들어갈 수록 인간은 비참하지고 파멸과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단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는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진정한 생명과 행복과 자유함을 얻는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율법의 기능은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해당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 함께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는 지나가고 영원한 복음의 시대 은혜의시대가 도래한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율법의 배경을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7장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법은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죽었는데 이 죽은 사람을 어떻게 심판합니까? 어쩔수 없죠. 심판할 방법이 없죠. 아무리 악한일을 저질러도 그가 죽은바에는 법도 어쩔수 없다는 겁니다. 예전에 육시라는게 있었습니다. 반역을 일으켰는데 죽었습니다. 죽은사람의 시체를 난도질하는 겁니다. 그게 육시입니다. 예전에 쓰던 욕중에 육시랄놈 이게 좋은 욕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 사람을 난도질 한다는게 육시랄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은 사람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왜 사도바울이 이말을 하는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2절 3절 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결혼의 비유를 사도바울이 예로들고 있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유대 부부들은 남성중심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하면 일생을 그 남편에게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그 남편이 살아있는한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되는 겁니다. 음녀가 뭡니까? 간음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 남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남자가 좋든 싫든 매여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 남자가 난폭하고 포악하고 부인을 괴롭히고 구타하는 이런 남자라면 일생이 정말 불행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여성의 행복은 예전에는 남편을 얼마나 잘만나느냐에 달려있었습니다. 좋은 남편 만나면 행복하게 사랑받으며 살지만 안 좋은 남편 만나면 일생을 불행하게 사는 겁니다. 

비침하고 비참해도 터키에는 이슬람교가 많은데 여자들이 그렇게 불행하다고 합니다. 여자를 낳으면 어렸을 때부터 매를 때리며 키운다고 합니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에게 매를 맞는다고 합니다. 여기계신 분들은 행복하신 겁니다. 터키사람들은 침대 옆에다 몽둥이를 하나 둔다고 합니다. 부인 때릴려고. 조금만 말안들으면 때리고 또 때리고 도망가면 잡아와서 또 때리고. 말 안들으면 굶기고 가두고 이렇다고 합니다.  

이런 남편과 산다면 부인 생각속에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소원이 있다면 뭘까요? 우리남편 빨리 돌아가셨으면... 남편이 죽으면 자유함을 얻는 겁니다. 유대의 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었다 그땐 자유가 얻어지는 겁니다. 남편이 죽으면 누구에게 시집가고 재혼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살아있는동안에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가정이 현대에는 없지만 예전에는 많이 있었다는 겁니다. 미국의 한 유모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남자가 지나가다 수퍼에서 캔을 하나 훔쳤습니다. 그런데 CCTV에 찍혀서 재판에 서게 됐습니다. 판사가 묻습니다. 당신 무슨 캔을 훔쳤습니까? 복숭아캔이요. 먹었냐고 물으니 다 먹었다. 복숭아캔속에 복숭아가 몇조각 있더냐 물으니 5조각 있다고 말합니다. 판사가 한조각을 한주로 쳐서 5주간 당신을 구류조치 한다고 했습니다. 판사가 방청석에 이의없냐고 물었더니 한 여인이 손을 들었는데 그 남자의 부인입니다. 이의가 있다고합니다. 뭐냐 하니 남편이 한 달 전엔 콩이든 캔을 훔쳤다는 겁니다. 

이 의미를 아십니까? 캔속에 콩은 수도없이 많이 있습니다. 수도없이 감옥에서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남편이 지겨우면 감옥에 가는것을 원했을까... 예전엔 이렇게 학대받는 부인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죽은 바에야 부인은 자유함을 얻는겁니다. 그때는 만나고 싶은사람을만나고 결혼을 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옛 남편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율법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결혼한 겁니다. 율법의 멍애와 율법의 학대를 가지고 살아간 겁니다. 우리가 아내라면 율법은 남편입니다. 포악한 남편 계속 아내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란 남편이 죽었어요. 이제 새로운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남편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새로운 남편인 얼마나 인자하고 사랑이 많고 배려심이 많은지 모릅니다. 너무너무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옛 남편 율법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우리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의 죽음입니다. 율법이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왜? 율법은 죄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에 멍애가 매고 종노릇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자유케하셨기 때문에 새로운생명으로 그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린 율법에서 자유로워 진겁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율법의 죽음이라고 말하는겁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남편과 만나게 됐는데 그게 누구냐면 예수그리스도이다.

새로운 남편 만나서 사는 사람이 자꾸웁니다. 왜 우느냐? 옛날남편 생각나서 그런답니다. 이게 정상이니까 비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남편인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영적인 결혼을 했는데 자꾸 옛날의 율법의 남편을 그리워한다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래서 죄로 돌아가려하고 멍애를 자꾸 질려는 것 잘못된겁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사람이된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4절을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4절 중반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대해 죽었다는겁니다. 그리스도가 그 몸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율법에대해 죽었습니다. 옛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힐때 나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가서 영적으로 연합하고 그에게서 새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가 무엇이냐? 생명의 열매요, 축복의 열매요, 구원의 열매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얽어매여 있었습니다. 구원이뭡니까? 자유입니다. 감옥에 갖힌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겁니다. 그러나 그가 형기를 다 마쳤을때 자유로워졌다. 구원받았다 하는겁니다. 우리가 전에는 죄에게 지배를 받고 율법에 멍애를 지고 살았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얽어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자유는 곧 구원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생명의 열매,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된것이다.

5절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육신을 있을때 육신이라는 것은 5절에 옛 과거의 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사람. 그때는 우리가 죄의 정욕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율법의 멍애를 매고 죄의 정욕가운데 다 죽을수밖에 없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얽매였던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율법이라는 악한 남편에게서 우리는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남편을 만났는데 새로운 남편의 영인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것이요 성령의 인도 가운데 자유함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겁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대로 살지 율법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성령의 인도함가운데 자유함을 누리는 인생이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와 심판을 주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의 인도함은 참평안과 행복과 기쁨을 주는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 가는겁니다. 

로마서 5장 8절을 보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신겁니다. 로마서 5장 5절을 보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어졌습니다. 이젠 우리가 사랑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에는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살았는데 이제는 사랑의 법, 은혜의 법을 따라 사는 겁니다. 사랑이 진정으로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겁니다. 

어떤 가정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가 불량소년처럼 말을 듣지않고 머리도 안깍고 함부로 다닙니다. 공부도 안하고. 그런데 이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니 한 여학생을 만났는데 공부잘하는 여학생을 만났답니다. 걔하고 대화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단정한 아이가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더라. 

여러분 그게 사랑의 힘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게되면 인간은 변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예가 네덜란드 화란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잡지에 소개된 이야기인데 78되신 할머니가 화란에 살았답니다. 그 할머니는 50년동안 담배를 못끊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담배를 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봤습니다. 금연기관도 가보고 캠페인하는곳도 가보고 그런데 담배를 못끊습니다. 담배를 끊는사람들은 보통 독한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날 경로당에 갔다가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79세의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눈이 맞아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결혼준비를 해가는데 결혼2주전에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폭탄선언을 합니다. 나는 당신과 결혼을 할 수가 없소. 아니 왜 결혼 못합니까 사랑하는데. 당신은 담배를 계속피우고 있지 않소. 나는 담배연기가 딱 질색이요. 당신하고 결혼하면 당신은 담배를 계속피울텐테 난 살수가 없소. 할아버지가 거절했습니다. 할머니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선언합니다. 내가 담배 끊겠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할머니가 그시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잡지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이런말을 했습니다. 나는 의지의 힘보다 사랑의 힘이 위대한것을 알았다. 의지로 담배 끊으려했지만 못끊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받는순간 사랑을 하는순간 그 담배가 끊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의지로는 선하게 살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마음에 부은바 될 때 진정한 인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변화되지 않는 것, 자녀들이 속썩이는 것 자꾸 욕하고 때리고 위협을 주고 엄포를 놓아도 그거 안됩니다. 

어떤 가정은 딸들에게 10시까지 안들어오면 2시간 동안 벌을 서라. 매를 맞는다. 밥을 굻어라 이런 벌칙을 준다고 해도 못고칩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합니다. 집에들어가면 공포분위기가 있고 자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사랑의 법으로 자녀들을 다스립니다. 용서해주고 품어주고 기도해주고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보는 순간에 변화되어 지는 겁니다. 엄마의 눈에서 눈물을 봅니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의 눈물을 볼때 아이가 변화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고통스런 모습을 볼 때 아이가 감동을 받는 겁니다. 아빠가, 엄마가 날 사랑하는 증거구나. 인생은 변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우리를 감싸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새로운 성령의 법, 은혜의 법, 사랑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한 사람이 된겁니다. 성경은 이제 우리가 새신랑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한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고 성화의 삶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우리가 이런 말을 생각했습니다. 불의의 병기로 주지말고 의의병기로 자신을 드리라. 죄를 안지을려고 몸부림 치지말고 선한 일을 하려고 애써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악은 끊어지게 되고 죄와 멀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로마서 6장 14절에 보니까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율법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아래 있고 사랑아래에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아래 살아가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애를 메지말라.

이 사랑의 자유, 은혜의 자유를 마음 깊이 새기시고 감사하며 감격하며 하나님앞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