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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화에 관한 일 (눅 19: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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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에 관한 일 (눅 19:28~44)


유명한[성 프란시스]의<평화의 기도>를 우리는 잘 압니다.“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로 시작해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달라고 하는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반대 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허클베리 핀의 모험>,<톰 소여의 모험>,<왕자와 거지>라는 소설로 유명한[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라는 미국의 소설가가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제목으로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악한 심성을 그대로 노출 시켜서 고발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할 곳 없이 떠돌게 하소서. 주님께 안식할 무덤을 간구하더라도 거절하시고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어떻습니까? 물론[마크 트웨인]이 전쟁을 옹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전 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군사들은 누구나 이렇게 상대방이 피 흘리기를 바라야 하고, 죽기를 바라고 기도해야하는 안타까운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고 악한 것인가를 꼬집어 주는 시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간인 이상 우리에게는 이런 전투적인 마음이 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나 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괜히 그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서 잘못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역작용을 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망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있습니까? 남이 망해야 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다 빨리 없어져야 세상이 바로 될 것이라고, 그리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이 시에 나타난 마음이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나타나는 전투적인 심리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는<로마식 평화>라 하여 소위<팍스 로마나(Pax Romana)>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히브리식 평화>입니다. 

먼저, 로마식 평화가 무엇이냐 하면 한 마디로 힘의 철학입니다. 승리가 곧 평화요, 전쟁과 억압과 수탈과 착취로 다 죽여 버림으로써 오는 평화입니다. 혹은 힘과 권력으로 눌러서 전부 죽은 자처럼 만들어버리는데서 오는 고요함을 평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노예적 평화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조용한 것 같은데 조용한 게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자의 분노가 있고, 숨겨진 반항이 있는데 이것을 과연 평화라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남편이 큰 소리쳐서 부인과 아이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 놓고“우리 집은 조용하다. 평안하다.”하면 됩니까? 물론 조용합니다. 이혼도 없습니다. 싸움도 없습니다. 일방적이니까. 이게 평화입니까? 이것이 팍스 로마나 타입의 평화입니다. 이 평화의 개념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평화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고,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다음은 히브리식 평화가 있습니다. 헬라어로는<에이레네(Ειρηνη)>라고 하고 히브리말로는<샬롬(Shalom : שָׁלוֹם)>입니다. 그런데 이 샬롬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통합해서 이것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가장 완전한 평화요, 하나님이 복으로 우리에게 내리시는 평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팍스 로마나>가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의 평화라면 샬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팍스는 평화인 것 같으나 평화가 아닙니다. 위장된 평화일 뿐입니다. 이 평화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의 철학에 빠져서 헛된 평화를 갈구하지 말고 오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온유한 길,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 화평의 길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고 계시는 장면입니다. 평화를 모르고 평화의 길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비참한 미래를 바라보면서 울고 계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40년 후에 로마가 다시 침공해 들어와서 깨끗하게 망했고,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참한 학살이었고, 무서운 전쟁이 바로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40년 뒤에 일어날 이 사건을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울고 계신 겁니까?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백성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무장하시고 군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셨다면 당장 무릎 꿇고 예수님 앞에 나와 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욕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평화를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언제나 욕심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가는 길은 평화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생각하면서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평화를 가리고 말았습니다. 혹은 평화의 길을 조금 안다고 해도 그 길로 갈 용기가 없습니다. 실천능력이 없습니다. 지금 주님은 예루살렘백성들의 그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이것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됩니다. 이게 바른 길이요, 이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긴 압니다. 그러나 그 길로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보다 더 아픈 것은 평화를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무엇이 평화인지를 모릅니다. 심지어는 평화가 눈앞에 있어도 그 평화를 모르고 있습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평화를 알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내 욕심을 버리고, 나를 버리면 얻어지는 평화인데 나를 버리지 못해서 여전히 망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집이 살았는데 한 집은 돈이 많고 여유 있는 집인데 화목이 없습니다. 밤낮 싸우고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할 것 같은데 불행한 집입니다. 그런데 바로 옆집은 아주 조그마한 집에 가난하기까지 합니다. 나이 많은 부모님도 모시고 있고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화평합니다. 날마다 찬송이요, 날마다 기쁨이요, 날마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부잣집에서 한번 물어 봤습니다.

“어떻게 당신네는 이렇게 행복합니까? 그 비결이 뭐요?”그랬더니 가난한 집 할머니가
“우리 집은 전부 죄인끼리 모여 삽니다.”그럽니다.
“무슨 일이라도 잘못되면 다 내 잘못 이요, 그것도 내 잘못이요, 그러니까 다 죄인이지. 우린 죄인끼리 살고 당신네는 내가 보니까 의인끼리 살더만요. 전부 자기가 잘했고 자기가 잘못한 거 까지도 남 때문이고, 전부 자기가 잘 났다고 하니 원...”하면서 혀를 껄껄 내찹니다. 

여러분, 죄인끼리 산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회개의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잘못했음에도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천하를 가지고도 불화할 수밖에요.

개 견(犬)자를 놓고 두 친구가 우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큰 대(大)자라고 우기고 다른 하나는 개 견자로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 견자를 큰대자라고 우기는 사람의 목소리가 훨씬 큽니다. 싸우다가 스승에게 가서 진위를 가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진 사람이 점심을 사는 조건이었습니다. 스승은 두 사람 주장을 다 듣고 난 후에 개 견자를 큰 대자로 잘못 알고 있는 친구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약속대로 제대로 알고 있는 친구가 스승의 판단에 의해 억울하게 점심을 사고 말았습니다. 그 후 스승에게 와서“왜 틀린 글자를 맞다 판결했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때 스승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친구를 위해 점심 한 끼 사는 것은 벌이 아니라 상이다. 그러나 개 견자를 큰 대자로 알고 평생 사는 것은 형벌 중의 형벌이다. 틀린 것을 맞다 우기는 그 친구에게 벌을 준 것이니라.”했답니다. 잘못된 것은 즉시 고쳐야합니다. 잘못된 것을 옳은 것처럼 밀고나가는 것이 무서운 형벌이요, 비극 중의 비극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예루살렘백성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평화의 의미를 우리도 똑바로 알아야겠습니다. 평화의 중심은 주님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온전한 평화를 원하고, 온전한 평화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오신 이유를 아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믿음 있다고 생각한다면 평화의 개념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내 욕심을 위해서 끝장내어서 얻어지는 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팍스로마나 즉, 힘의 평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사장[가야바]도 팍스 로마나 문화에 감염되어서 요11:50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이게 바로 팍스로마나입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왔습니까? 이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평화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하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셔야했고, 그렇게 그들은 망해가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믿는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믿음이 있다면 평화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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