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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안다 (계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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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안다 (요한계시록 2:13-17)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세번째 버가모 교회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해발 300미터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로마가 아시아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한 총독부가 있을 만큼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대규모 도서관이 있는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특히 높이가 12미터나 되는 제우스 신전을 비롯하여 뱀을 숭배하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그리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거대한 신당 등이 세워진 곳이었으니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이 지역을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 합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본거지가 있는 지역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사단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버가모는 거대한 우상숭배와 세속화 되어가는 도시 분위기 속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 힘든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충성된 증인 안디바와 같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안디바가 어떤 인물인지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사단의 본거지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다가 죽임 당한 순교자였습니다.   그 외에 더 다른 칭찬이 필요없습니다.    주께서 그의 믿음을 알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순교자 안디바는 헬라식 표기로 안티파스(Antipas) 인데 안티 Anti(반대)와 Pas 파스(모든 것), 즉 ‘모든 것을 반대한다’ 는 그 이름이 가진 의미처럼 그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모든 것은 거절한다는 단호한 신앙고백으로 거짓 교훈에 맞서 죽음을 택한 사람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그랬고버가모 교회의 안디바가 그러했던 것처럼 진정한 믿음은 만사가 잘되고 평안할 때보다는 거친 삶과 환란 중에 더 밝게 빛이 납니다.   

버가모 교회는 안디바처럼 훌륭한 순교자가 있는 교회였지만  그러나 이  교회에 책망할 것이 두어 가지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잘하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가 봅니다. 물론 버가모 교회 전체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 중에 우상숭배에 빠져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여러 지체들이 모여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병들었다면 온 몸이 병에 걸린 셈입니다. 그것이 아주 작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온 몸을 고통과 죽음에 빠뜨리는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버가모 교회를 향해 책망하시는 내용을 보면 그 질병의 심각성이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급하게 잘라내고 고침 받지 아니하면 생명을 잃게 되는 악성 종양이 그 몸에서 자라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교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안디바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었으니 곧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에베소 교회를 설명할 때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상 제물을 먹고 행음하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말합니다. 민수기 24장, 25장의 사건을 보면, 점쟁이 발람의 미혹에 빠진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염병으로 징계를 당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 중 모압 지역을 통과할 때 남자들이  모압 여인과 음행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이 섬기는 신 바알브올에게 절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남자 2만4천명이 염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민25:1-9, 31:16).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유혹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점쟁이 발람입니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 안에 이런 거짓 교훈으로 교인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나오는 니골라 당과 관련하여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실 때 칭찬하신 부분이 버가모 교회에서는 책망으로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했는데 버가모 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무율법주의자들이라고 알려집니다. 지금은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니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은 썩어질 것이니 부정하고 영혼만 정결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였으니 영지주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신앙입니다.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다보니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부정한 인간의 육신으로 왔다는 말을 부인하고 오직 영적인 면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요한일서 4장1절-3절에서 사도 요한이 지적한 것처럼,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는가 시험해보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이것을 부인하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였으며 이미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니골라 당이 바로 이런 부류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인정하고 고백하지 않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거짓 교훈입니다.   

니골라 당은 이런 사상을 근거로 육체적 범죄는 구원에 영향이 없다는 교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육체로 무슨 범죄를 해도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상한 주장입니다. 어차피 썩어질 육신으로 행한 일들은 그것이 황제를 숭배하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성적으로 방탕하여도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엉터리 궤변론자들이며 타락한 혼합주의 교리입니다. 이런 새로운 교리는 아직 회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이방 종교의 생활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부 버가모 교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을 것입니다.    

니골라 당은 이런 식으로 황제숭배와 우상숭배와 같은 이교적 행위를 적당하게 기독교적 진리와 혼합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타락한 세속문화와 적당히 타협하여 즐기며 살도록 올무를 놓는 일이었고 양심의 꺼림이 없이 우상숭배 할 수 있도록 면죄부를 주는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다른 신들을 함께 섬겨도 괜찮다는 교훈입니다.  이런 니골라 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범죄의 길로 이끄는 사단의 유혹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그리스 로마 문화를 대표하는 이교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기독교 복음과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건축과 예술 등 그리스-로마 시대의 다양한 문화적 업적과 영향은 오늘날도 널리 인정되고 모든 인간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결과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침범할 때 신앙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에베소 교회는 그런 점에서 과감하게 문화의 부정적 기능을 미워하였고 배격한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안디바도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나될 수 없는 세속문화의 부정적인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를 높이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가실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랴 하느냐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최북단 헤르몬 산의 발치에 자리잡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BC 20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Augustus)로부터 선물로 얻은 도시였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이 이곳을 자기의 수도로 정하면서 로마의 황제 이름 카이사르(Caesar)와 자신의 이름 빌립(Philip)을 합쳐 부른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황제와 왕의 이름을 높이는 그런 도시를 방문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 듯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는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주님의 교회가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땅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지금 내 삶의 자리가 어디이고 그 자리에서 누가 나의 왕으로 계십니까? 예수 오래 믿는다는 사람도 심지어 교회의 중직자들도 인생사의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점집을 찾아가 운명을 점치고 택일을 하며 궁합도 보러 다닙니다. 재미로 한 번 해보는 일인데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되느냐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최고와 최대가 되어야 한다는 최고지상주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성공지상주의,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늠하는 황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맘몬이즘(mammonism)의 경제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정신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추잡하고 병적인 애정행각을 벌이다 온 세상에 그 부끄러움이 폭로된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에게 사람들은 골프를 세상에서 제일 잘 친다는 뜻에서 골프 황제 칭호를 주었습니다.   이번 일로 그의 인기와 인격에 치명적인 손상이 왔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선수의 사생활과 스포츠는 별개라는 논리로 그의 성적타락을 천재적인 골프 실력으로 덮어주려는 듯한 발언을 합니다. 황제 칭호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살든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세계 제일이면 황제 칭호를 받고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어 우상으로 받드는 황제의 논리와 황금만능주의의 일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나의 현주소를 두고 있는지요?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베드로는 맘몬의 논리,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아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입으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세속적 사고방식에 젖어 이기적인 기복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한 1천만 명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 국민이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 어느 목사님의 말이 백번 옳습니다.  도리어 이런 기독교인들로 인해 세상의 어둠과 혼란이 가중될 것입니다.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고 그 어떤 핑계도 변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살 길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의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고백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형식적 신앙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쉬쉬하며 덮고 감추기에 급급한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모를지라도 예수께서 그 죄를 알고 계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가슴을 치며 슬퍼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서는 행동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초기 교회 역사를 살펴봅시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당할 때 이것은 엄연한 종교행위이며 우상숭배임을 지적하고 끝까지 거부하다 옥에 갇히고 순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은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우상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일본 왕을 신격화하여 천황이라 부르며 아침마다 일본 천황이 있는 궁성을 향해 절하였고, 주일날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던 신자들은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일어서서 동쪽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다니엘 시대에 느브갓네살이 황금 동상에게 절하라고 강요한 것과 로마시대의 황제숭배와 같았고 북한의 김일성을 민족의 태양 운운하며 우상화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많은 후유증을 낳았습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과 신앙의 정절을 빼앗긴 사람들 사이에 반목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나중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환경에서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들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2007년 9월 13일 제92회 총회로 모인 자리에서 2008년 3월 첫째주 3.1절 기념주일을 신사참배 회개주일로 정하고 다음과 같이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을 채택하고 낭독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일부를 소개합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영적 대각성 부흥운동과 이준 열사를 비롯한 여러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된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인 2007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하나님과 민족 앞에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해 통절한 심정으로 회개합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해 온 것을 고백합니다. 교회의 참된 각성과 부흥은 지난날의 죄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죄책 고백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영적각성과 부흥의 은총을 입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합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강압에 못 이겨 교회가 마땅히 지켜야 할 신앙의 정절과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신사참배에 가담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라는 일제의 거짓논리를 수용하여 성도들을 기만하고 신앙양심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의식에 묵도,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 이른바 일본식 국민의례를 순서에 넣어 거룩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의 연수회에서 일제의 시조신(始祖神) 천조대신(天祖大神)의 이름으로 신도세례(神道洗禮)를 받은 죄를 고백합니다. 부당한 일제의 강압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으로 맞서지 못하고 일제 신사에 머리 숙였던 부끄러운 죄를 통절한 마음으로 회개합니다.” (그 다음 내용은 생략)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안다’는 말씀은 너의 모든 것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본거지에 살지만 사단에게 머리 숙이지 아니한 사람의 믿음을 아시는 주님은 동일한 환경에서 사단의 미혹에 영혼을 팔아먹은 죄인도 알고계십니다. 양심의 가책은 있지만 애써 무시하며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회개하지 못한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먼저 회개가 있고 그 다음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며, 성령에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상숭배를 혼합하는 죄는 철저한 자기 고백과 회개없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내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십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진 분으로 묘사되며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으로 죄악과 맞서 싸우십니다(1:16, 2:16).    로마시대에 군사들이 사용하던 검은 양날이 예리하게 선 칼이었습니다.    로마 병정들은 이 검으로 세상을 정복하였고 정복을 당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로마 병정의 검은 두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주께서 속히 임하신다고 하셨으니 교회가 더 이상 타락하지 않도록 급하게 임하여 죄악을 도려내실 것을 암시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주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히4:12) 능력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검을 든 두려운 심판자로 나타나시지만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도 타락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 것이니 그 돌 위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만나는 우상제물과 대조됩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양식이니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먹을 수 없는  양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어찌 세상의 우상 앞에 조아리며 우상의 제물로 성공하고 배를 불리겠습니까?  흰돌은 무죄 선언의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재판장이 판결할 때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있는 주머니에서 흰돌을 꺼내어 주면 무죄 선언이었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이기는 자들에게는 죄 없다 선언하시는데 그 돌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무슨 이름인지 알 수 없는 새 이름을 주시는데  그 돌을 받은 사람만이 그 이름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새 이름을 받은 새 사람의 복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시는데 아담은 그 음성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부르시던 하나님의 음성은 나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현주소를 아시는 주님께서 아담의 거처를 몰라 물으셨을까요? 내 삶의 주소가 어디인가요? 어느 동네 어느 거리에 살고 있다는 그런 대답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의 자리가 어디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부르시는데 그들은 점점 멀리 달아났고 얼굴을 가리우기 바빴습니다. 언제까지 숨고 감추고 미루고 피하기만 하겠습니까?  나를 아시고 찾아오시어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며 죄와 싸우는 현장에서 주의 능력을 힘입어 잘 이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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