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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주신 은혜 (고전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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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신 은혜 (고전 15:9~11) 

 
한 훌륭한 선생님 밑에 많은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제자 한 사람이 굴러가는 나뭇잎을 보고 “저기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을 보니 참 아름답구만!” 하며 감성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한 똑똑한 제자가 “이 사람아 나뭇잎이 어떻게 굴러가나 저건 바람이 부는 거야.”그러자 나뭇잎이 굴러간다고 표현한 사람이 “아! 이 사람아 바람이 불었건 어쨌건 낙엽이 굴러가지 않았나.”, “사실을 사실적으로 얘기를 해야지. 바람이 부는 걸세”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이를 보고 나뭇잎이 굴러간다는 측과 나뭇잎은 발이 없으니 바람이 분다는 측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다가 현명하신 선생님께 물어보자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이렇게 서로 대립을 하고 있으니 선생님께서 옳은 판결을 해 주십시오.”했더니 선생님이 눈을 감고 가만히 계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다 틀렸네. 낙엽도 아니고, 바람도 아닐세.” 당연히 자신들의 의견이 옳을 줄 알았던 제자들이 “아니, 선생님 그런 대답이 어디 있습니까? 이 쪽이든 저쪽이든 한 가지는 맞고, 틀려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닐세, 다 틀렸네.”, 

“그럼,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네. 중요한 것은 네 마음이다. 나뭇잎이 굴러간다면 나뭇잎이 굴러가는 거고, 바람이 분다면 바람이 부는 거지.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무슨 탓이 있겠나. 다 자기 탓이네. 자기 마음먹은 탓이라네.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가는 것이네.” 인생은,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무얼 하는가?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하는 자기 문제가 곧 세상문제고, 인생 문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답이 나와야 됩니다. 나뭇잎이 굴러간다고 할 자유도 있고, 바람이 분다고 할 자유도 있습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다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더군다나 신앙인으로서의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사도 바울이 내가 누구냐 하는 고백을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짧은 문장 속에 “나, 내, 나”라는 단어가 8번 정도가 나옵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실한 자아관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진수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인 된 자기 정체성, 이것이 확실했고 이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어떤 골동품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귀중한 세계적인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을 마치 생의 목적처럼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세계 어디라도 좇아가서 진귀품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어느 날 유럽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하나가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잡지에서 그 사진을 보는 동안 가슴이 뛰었고 그 후로는 아주 정신을 거기에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여행을 하면서 추적을 해보았지마는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크게 실망하여 병이 날 지경에서 어느 날 잡지를 보는데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 골동품이 어떤 사람에게 팔렸다고 써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이름을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이름이더랍니다. 

벌써 그 골동품은 자기가 사들여서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다니면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단 말입니다. 가져다 놓을 그 때뿐이었지 지나고 나서는 기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때로는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 만큼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바 은혜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비로소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 가장 소중한 자기 건강, 내가 지금 처하고 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하고, 은혜로 느껴야하며, 은혜로 감격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이 큰 은혜에 사니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자기 만족감이 있어야 은혜가 은혜 됩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는 삼중 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여사를 아실 것입니다. 불행을 딛고 한 평생을 감사하며 살았던 [헬렌 켈러]여사에게 말년에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그때에 [헬렌 켈러]여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요.”하고 대답했답니다. 

원망할 시간이 없다는 고백, 이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그를 불행하게만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자기 안에 머무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가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이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게 주신 그의 은혜”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영어를 못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시대가 된듯합니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려고 뒤늦게들 애를 씁니다만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어를 잘 하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답으로 미국에서 태어나면 됩니다. 그리고 중, 고등학교까지 미국에서 다니고 그 다음에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 영어 잘하지, 한국말 잘하지 얼마나 좋습니까? 하도 영어 영어 하니까 해보는 이야기이고. 어쨌거나 두 가지 언어이상을 다 할 수 있도록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말을 다 합니다.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 두 문화를 다 통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샴마이 학파 가말리엘 문하에서 훌륭한 공부를 한 석학입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인생에 이것들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뒤늦게 전도사역을 위해 이곳 저 곳을 다니면서 자기의 배운 것과 신분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라고.... 

그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 사이에 또 다른 은혜가 있음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오래오래 참아주셨다는 겁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다메섹으로 갈 때 그가 계속 잘못될 때에도 오래오래 참아주셨습니다. 기다려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고 그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셨다는 겁니다. 

교회를 핍박했어도 몰라서 한 일이요. 스데반을 죽였어도 딴에는 율법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확실한 충성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 당시로는 율법에 대한 충성이었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지마는 그 충성된 진실만큼은 인정해주신 하나님, 그리고 자기를 귀하게 여겨서 강권적으로 불러 주셔서 버릴 것은 버리고 따르게 하신 그 하나님이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을 딤전1:13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허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약할 때에 자신도 모르게 강한 힘이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알아야할 놀라운 사실입니다. 내가 인간적으로 약할 때에 은혜로 강해집니다. 내가 세상 적으로 약해져서 탄식하고 있을 즈음에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에서는 강해지는 걸 봅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을 했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 안에 사는 것입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모습 속에는 다섯 가지의 악한 마음이 있는데 이 오악(五惡)을 용서하든가 등한히 여기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악은 만사에 빈틈이 없고 시치미를 딱 떼면서 간악한 수를 쓰는 자요, 둘째는 공정치 않은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정한 듯이 처리하는 사람이요, 

셋째는 전부 거짓 말 투성인데도 워낙 구변이 좋아서 진실인 것처럼 떠드는 사람이며 넷째는 속으로는 음흉한 악당이면서 기억력이 좋아서 아는 것이 많아 사람을 홀리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다섯째는 못된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다섯 종류의 사람에게서 무얼 생각하십니까? 전부가 거짓말쟁입니다. 진실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진실입니다. 은혜 앞에 있는 자라면 진실해야 됩니다. 다 없어도 진실만큼은 있어야 됩니다. 다 가지고 있어도 진실이 없으면 무너지는 법입니다. 

사도바울은 진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딤전1:12-14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여기서 “충성되다”는 말이 <피스티스>라는 말인데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은혜를 앎으로 충성했고, 은혜를 깨달으므로 감사했고, 은혜 안에 삶으로 그는 가슴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서 누구든지 용서할 수가 있었고, 누구든지 사랑할 수가 있었고, 누구든지 함께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내가 예수 안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아마 아찔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사기나 치고 다닐 사람도 있을 것이요, 폐인 되어서 보지 못할 뻔 했던 사람도 많을 것이고,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기까지 한데 뭇 남성들을 호리는 말재주까지 있어서 예수 인 믿었으면 큰일 낼 뻔하였겠습니다. 

다시 한번 자문자답합니다만 ‘예수 안 믿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눈물겹도록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만일 예수를 안 믿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형편없었을 인간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어서 지금의 내가 있다. 남들이 볼 때야 어떻게 보든지 간에 그렇게 시원한 교인은 못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나 된 것, 이만큼 내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 이것은 오직 은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예수 덕에 오늘의 내가 있다.’ 이렇게 생각 되어지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것은 위대한 능력입니다. 변화케 하는 능력입니다. 사람을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사상을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고 인생관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변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지 마시기 바랍니다. 달리 말합니다. 내가 은혜를 입은 자라면 옛 모습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 방해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를 핍박하는 버릇을 고쳐야합니다. 헐뜯고 비방하고, 늘 남의 말을 나쁘게 하려드는 습성을 버려야합니다. 

이런 버릇들은 은혜 받지 못하여 변화되지 못한 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이제는 은혜만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래야 수고도 기쁨이요, 무엇을 해도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매사가 짜증스럽고 마지못해서 한다면 이것은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얼른 은혜의 자리로 돌아 와서 바울의 고백을 배워야합니다. 

“네게 주신 그의 은혜기 헛되지 아니하여 나의 나 된 것이요, 내가 다른 사도들 보다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게 주신 은혜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진실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정직할 때 새로운 은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뭔가 한 것이 있다면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서일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열매를 맺어서 그 은혜의 결과로 내가 있다.’라고 우리는 늘 간증할 수 있는 우리 해성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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