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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믿음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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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감동시킨 믿음 (마 8:5~13)


I. 도입 

산골마을에서 외롭게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서울 아들네 집에 왔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탁에 놓인 조그만 벨을 누르면 금방 예쁜 아가씨가 들어와 심부름을 해 줍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모양입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할아버지가 얼른 방에 들어가시더니 “왜 안와, 왜 안와” 앓는 소리를 하셨습니다. 신기한 식탁벨을 슬쩍 해 오셔서 어디서든 그 벨만 누르면 예쁜 아가씨가 오는 줄로 알고 벨을 누르며 “왜 안와, 왜 안와” 앓고 계셨던 것이지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탁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요청할 일이 생겼을 때 종업원을 찾게 됩니다. 이때 종업원을 부르는 호칭이 가지각색입니다. “아줌마, 아가씨, 언니” 심지어 “어이, 이봐”까지 나옵니다. 

아무리 내가 급해도 식당에서 큰 소리로 누굴 부르는 일은 문화인 에티켓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급해도 조금 참고 있다가 종업원과 눈이 마주치면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몇 천원짜리 혹은 만원짜리 식사를 하면서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 치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면 안됩니다. 

그 누구도 인격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겐 누구도 함부로 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신앙이 인격과 일상생활태도에서 아름답게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 신앙과 아름다운 인격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이방군대장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만난 신앙인 가운데 최고라고 기뻐하십니다. 이방인은 물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감탄하셨습니다. 그의 신앙과 태도가 어떠 했길래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하나님을 감동시킨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은 더 큰 감동으로 여러분에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8장 바로 앞 장  5장,  6장,  7장에서는 산상보훈이 나옵니다. 산상보훈은 자기백성을 향한 권세있는 왕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에 이어서 8장 9장에서는 예수님의 권세있는 10가지 이적사건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10가지 이적을 행했듯이 모세보다 더 권세있는 예수님께서 10가지 이적을 행하시고 계십니다. 여기에 저자 마태의 상당한 신학과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진정한 권세는 말씀의 권세도 있어야 하고 사역과 능력을 들어내는 일에도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II. 이만한 믿음?

산상보훈과 이적사건들을 연결하면서 마태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신학의 균형이 있습니다. 말씀과 능력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곧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흔히 “말씀으로만! 말씀으로만!”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죽은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삶의 변화도 있어야 하고 이적도 경험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되어지지 않는 말씀은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신비한 이적만 찾아다닙니다. 또한 신앙인란 자기에게 경험되어야 되고 화끈하게 불이라도 오고 느낌이 와야 되는 줄로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비주의이지요. 위험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믿으면 자연히 능력이 내게 경험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말씀만을 강조하다가 이성주의에 빠지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경험만을 강조하다가 신비주의에 빠지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 둘이 전혀 반대되는 것 같지만 실상 뿌리는 같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이성주의와 신비주의는 어떻게 보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내  아홉 구절(5절-13절) 안에는 특이하게도 “이르되”라는 말이 6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아홉 구절(5절-13절) 가운데 첫 번째절 5절(8:5)을 제외하고 나면 6절 7절 8절 9절 10절 11절 12절 13절 - 여덟절이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5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기도합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 마을에 점령군 사령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중대장급에 해당되는 사람이지요. 이 당시는 전체 군사통치 시절의 군인의 권위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6절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몹시도 괴로워합니다. 

주여,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사실은 의문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서술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의문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보면 이것은 의문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맞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련? 날 보고 가서 고쳐 달라고? 이런 이야기입니다. 

8절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여 고쳐주십시오.

권위 있는 예수님께서 어찌 죄인된 우리 집에 들어오겠습니까? 유대인인 당신께서 어떻게 율례를 어기고 이방인인 우리 집에 오시겠습니까? 괜히 구설수에 올라서 당신에게 불편을 드릴까 제가 조심스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단히 놀랍게 여기시며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1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말씀하신 바로 그때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까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이만한 믿음」입니다. 오늘 설교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안경,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꿰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이만한 믿음」입니다. 최상급 신앙을 말합니다. 

믿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한번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또 다른 이방인, 가나안 여인이 나옵니다. 그때 이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 (메갈레 피스티스) 메갈레 - 메가톤급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메가톤급 믿음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메갈레 피스티스」 - 마가톤급 믿음보다 더 큰 최상급입니다. 이만한 믿음은 하나님도 감동할만한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신 ‘메가톤급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이만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킬만한 그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 우리가 가져야 할 최상급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말씀의 권세가 내게 임할 때 내게 찾아오는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우리가 세상에서 위임받은 그 믿음의 권세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일까? 그게 바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의 믿음을 보시고 근심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감동하고 계실까요?


III. 이방인의 믿음

본문이 말하는 「이만한 믿음」이 무엇일까요?

우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라는 본문 내용에 힌트가 있습니다. 백부장이 이방인이라는 것이지요. 어릴때부터 모세의 율법을 공부해 온 사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회당에서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좋은 신앙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나 장로의 신앙도 아니고, 모태 신앙도 아닌데 평신도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귀한 믿음을 가졌다니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기도 전에 벌써 예수님의 소식 곧 복음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이 이방인에게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태는 매우 행복해 합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마태의 흥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관점 하나가 있습니다. 마지막장 28장 19-20절 결론을 앞으로 가져와서 마태 전체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방인 족속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원했던 마태의 관점을 제일 앞으로 끌고 와서 마태복음을 보지 않으면 마태복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을 설레게 한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최근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평생 살아가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는 이방인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대단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동이 저자 마태의 감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감동은 구원받는 감동이요 복음이 전해지는 기쁨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동, 더 큰 역사는 없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천국의 심장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12절에 보면 마태는 자신의 교회에 이미 이방선교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1절 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네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마태의 특징어입니다. 마태복음에 상당히 자주 나타납니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태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는 비극을 몸소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이방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에 대한 주권과 경외감을 가진 바로 이 사건이 예수님을 흥분하게 만들었고 마태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영광,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IV. 이만한 사랑을 지닌 믿음 

이만한 믿음이 어떤 믿음일까? 이만한 사랑을 지닌 믿음을 내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군사 통치 시대에 가버나움 주둔군 사령관 백부장이라면 대단한 존재이지요. 그의 하인 한명이 중풍병에 걸렸습니다. 폐기처분 감이지요. 그 당시 종은 재산목록 중 하나였습니다. 인격이 있는 존재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병든 종을 집에 둘수록 돈만 낭비할 인물이지요. 최고의 관심을 보인다 해도 부관을 시켜 “예수님을 만나보도록. 내가 보냈다고 그래. 내가 이 가버나움 주둔군 사령관 백부장이라고 그래.” 부하에게 명함 한 장 들려보내어 얘기를 전할 수 있지요. 

그러나 백부장은 직접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예의, 경의, 귀인을 알아보고 귀인을 대하는 아름다운 자세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어른들도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귀인을 알아보는 눈이 귀한 눈입니다. 윗사람 존경하는 것을 자존심 상해하는 인격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귀인을 귀인으로 알아보고 존경해야될 사람을 존경할 수 있는 것, 당연한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인격은 얼마나 놀라운 인격인지 모릅니다. 

더욱이 종을 사랑하는 윗사람의 인격으로서의 백부장의 인격은 매우 놀랍습니다. 헬라어에는 자기 종을 표현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단어 파이스는 ‘종’이라는 뜻이지만 때로는 아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소년, 철없는 소년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종을 가족처럼 아낄 때 파이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 종을 둘로스라 하지 않고 파이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을 아들처럼 사랑하고 아끼는 주인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이런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없는 종을 대할 때 아들처럼, 불쌍한 아들처럼, 병들어 죽어가는 아들처럼 안타까움을 가지고 대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고 이만한 사랑을 가진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고 감동하십니다. 이만한 사랑을 지닌 믿음을 내가 이스라엘 중에서 본 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인격은 상위 리더십을 ‘존경’합니다. 또한 하위 리더십을 ‘존중’합니다. 위를 향한 존경과 아래를 향한 존중! 이것이 멋진 인격입니다. 


V.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

이만한 믿음이란 게 또 어떤 믿음일까요?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련? 백부장이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점령군의 한 장교가 이제 막 무대에 등장한 피점령민족의 무명 랍비에게 취한 태도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병 잘 고치는 명의 정도로 이해했다면 왕진을 요구했겠지요? 예수님을 능력있는 종교 지도자로 알았다면 정식 방문을 요청했겠지요. 예수님을 경험 많은 지혜자로 알았다면 좋은 말 한 마디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여! 즉,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벌써 이해했다기 보다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신이 우리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속물적인 안목으로 볼 때, 무명랍비로 여겨진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 장교 백부장의 초대를 받았다면 누가 더 영광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백부장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처럼 귀하신 분이 천한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처럼 존귀하신 분이 미천하고 무가치한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같은 분이 이방인인 더러운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만큼 겸손한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백부장의 겸손한 인격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인격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인격은 겸손한 인격입니다. 겸손한 인격을 보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지요. 속으로 숙이든 겉으로 숙이든 인격 중에 가장 빛나는 인격은 겸손한 인격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인격에 믿음까지 더해졌으니까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나는 부족합니다.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마음과 자세가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인격입니다. 

부부간에도 ‘나만 손해 보았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깨집니다. 늘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이 많아 이런 아내를 얻었지.’ ‘나보다 남편이 더 낫다. 내게는 과분한 사람이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귀히 여기셔서 과분한 직분을 주셨지.’ 감사하며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교회에 충성하지 못했고 갚지 못하고 살았는데 늘 과한 인정을 받고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겸손한 인격입니다. 늘 손해보는 것 같고, 늘 빼앗기는 것 같고, 좀 더 인정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 항상 섭섭하고 불평스러운 것이 교만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아프게 하는 인격입니다. 

멕시코 어느 원주민(쿠이케텍 인디언,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엔 신앙, 순종, 겸손이란 단어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이 처음엔 미개한 언어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선교사들이 오히려 크게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곧 겸손한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백부장의 이런 겸손한 신앙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교만하지 맙시다. 교만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만죄 
착각죄


VI. 한 말씀만 하소서!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말씀의 능력을 믿는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8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원문의 뜻은 단지 한 말씀만 하옵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 말씀을 하실 것도 없고 길게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 자체이니만큼 단지 한 말씀만 하옵소서. 

헬라어 성경 알라모논 - 오직 한마디, 에이페 로고 - 말씀으로. 
"알라모논 에이페 로고” - 오직 한 마디 말씀으로 끝장내 주십시오.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의 가난한 여인은 “예수님의 거절을 받으면서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한토막이면 내 딸이 낫겠나이다. 천지를 창조한 그 입으로, 왕의 권위를 가진 그 말씀으로 입을 열어 한 마디만 하십시오. 오직 한 마디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죽어가는 중풍병 우리 하인이 낫겠나이다.” 

이 말씀은 거리를 초월하여 역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멀리서도 말씀만 하시면 낫는다는 믿음이지요. 주님도 처음 보는 믿음이라고 감동하십니다. “주님께서 직접 찾아와 손으로 어루만져 고치실 수도 있지만, 주님은 거리나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시고 이곳에서 한 말씀만 하시면 그곳에서 낫겠나이다.” 멋진 믿음 아닙니까? 

당시 중풍병은 불치병입니다. 요즘도 중풍병은 상당히 난치병입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 의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중풍병은 의학이 잘 못고칩니다. 난치병입니다. 이 당시에는 불치병 가운데 불치병입니다. 그런데 무슨 배짱으로 한마디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요청했을까요? 예수님은 이 만한 믿음, 평생 율법만 붙들고 살았던 이스라엘 중에서도 보지 못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신구약 66권을 믿어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한 말씀만 붙들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창세기 1장 1절만 믿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못 믿을게 하나도 없습니다. 내 인생에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신구약 66권 다 믿어야 기적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한 말씀만!

「이성이 갈 수 없는 곳까지도 믿음은 능히 갈 수 있다」 토마스 왓슨의 말입니다. 

믿음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이 1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중풍병이 걸린 하인이 나아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인 자신의 믿음이 대단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의 주인 백부장의 믿음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의 능력을 이토록 순수하게 믿는 ‘이만한 믿음’은 내가 보지 못했다.”고 기뻐하십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내가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 감격해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가슴이 훈훈해 집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좋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얻기 바랍니다. 시시한 믿음, 2% 모자라 간댕간댕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키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감격시킬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 저만한 믿음을 내가 볼 수 있다니 행복이로다. 
저런 순수한 믿음을 보았다니 행복이로다. 

내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감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한해 하나님을 감동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동시키시고 여러분을 깜짝 놀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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