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질병과 죽음의 해결자 (마 9:18~26)

  • 잡초 잡초
  • 346
  • 0

첨부 1


질병과 죽음의 해결자 (마 9:18~26)  


비통하고 슬픈 사망의 애통성이 하루도 그칠 날이 없는 이 세상에,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지진 참사는 지구촌 인류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새삼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일찍이 석가모니는 인간의 생로병사, 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출가를 단행하였지만, 그러나 석가모니는 어느 것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죽었는데도,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기이한 생각이 듭니다. 

꽤 오래 전부터 K B S에서는 ‘생로병사의 비밀’이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제 아내도 이 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이긴 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방송이나 아내를 통해서 생로병사 문제의 해결 소식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을 통해서는 그러한 문제의 해결을 결코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인생의 영원한 난제인 질병과 죽음의 문제를 통쾌하게 해결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하면 살아나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한 관리’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에 보면 그가 유대교 회당의 회당장 야이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회당장은 유대 사회에서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돈과 명예와 지위를 갖추고 있었으며, 종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슬픔과 참담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방안에 사랑하는 무남독녀가 죽어 누워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부모는 죽으면 산소에 묻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다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사랑하는 외동딸을 잃은 이 회당장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회당장은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신분에 있는 회당장이 나사렛 출신의 한 청년에게 나아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행동은, 당시의 종교 사회적인 정황으로 볼 때, 아주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벌써 유대교인들로부터 ‘신성 모독자’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교제하거나 집으로 들이는 행위는 유대교에서 엄격하게 금하는 죄였습니다. 

그런 자들은 유대교와 선민 공동체에서 제명시키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했으며, 그분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일생일대의 큰 결단을 한 셈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의 딸이 죽었고, 그 딸을 다시 일으킬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주님을 생명의 주로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라도 다시 살리실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 곧 신앙의 동인이 됩니다. 아브라함도 이 믿음을 지녔기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하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전지전능 하신 분으로 늘 고백합니다. 전지전능한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성도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확신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부활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소망과 즐거움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재물이나 권세 앞에서 담대하게 행할 수 있고 죽도록 충성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하고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믿음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 못지않은 담대하고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기 딸을 살려 달라는 회당장의 간구에 즉시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습니다. 여기에 보듯이 주님은 누가 치유를 부탁할 때 항상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이리 데리고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문제와 불행을 당한 백성들을 돌보고자 그에게로 직접 가시는 겸손한 왕이 주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자세와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셨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사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천한 신분으로 오실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셨기에 십자가의 고난도 감내하실 수 있었고, 겸손하셨기에 천한 죄인들에게 은혜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실 수 있었습니다. 죄인의 친구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요 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신 모범을 보여주신 유훈을 기억하면서, 회당장의 간구에 기꺼이 일어나 따라가셨던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받고 따라가시는데, 20-21절에 보면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이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다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여인에 상태에 대하여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병은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하자 마음에 그 여인은 용하고 많은 의사 를 거의 다 찾아가 보았고, 좋은 약은 다 써보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은 기진맥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속담에 ‘십년 병치례에 부자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 여인의 삶은 정말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혈루증이란 하혈을 하는 부인병의 일종으로서 레 15:25-27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사람만 부정한 것이 아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열두 해나 혈루증을 앓았으므로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여인이, 예수님에게 다가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려고 한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겪어 온 12년간의 육체적 고통, 그에 못지않게 종교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고,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배척당하는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그녀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서라도 예수께로 나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12년간 그녀가 겪은 고통은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을 갖게 하고, 그를 직접 만나게 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때마다, 그 일을 하나님께로 나아오라는, 그리고 나아와서 그 분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는 믿음을 가지라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인에게 낙담과 좌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나가 자녀가 없으므로 그로 인하여 슬퍼할 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다윗이 그의 대적에게 쫓겨 다닐 때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욥이 자신에게 임한 재난과 친구들의 비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였던 것처럼, 모든 시련과 고통의 때에 겸손하게 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던 여인을 향하여, 주님께서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단지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만졌는데도 12년 동안 앓던 난치병과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구원받은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한 여인의 믿음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받는 아름다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인을 구원한 것은 그녀의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여인에게 작용하여 그녀의 병이 나음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한 것은 ‘예수님의 겉옷’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즉 그녀에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겉옷이 아닌 예수님의 몸을 직접 만졌다고 할지라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교회에 나가지만, 그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25절은 이미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이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피리 부는 자들’은 축제나 장례식장 같은 곳에 고용되어서 관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떠드는 자들’이란 초상집에 와서 죽은 자를 위해서 특별히 곡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피리 부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며, 유대인들의 장례 절차에는 최소한 2명의 피리 부는 자와 1명의 곡하는 자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생명의 주관자가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이는 당연한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소녀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가리켜 ‘잔다’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께서 그 소녀를 다시 살리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마치 잠자는 자를 깨워서 일으키듯 쉬운 일이라는 의미가 잔다는 말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여러 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을 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장사한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시신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잠은 어떤 의미입니까? 잠은 휴식의 의미이고 안식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죽는 것은 곧 부활과 영생을 얻기 전의 한 과정입니다. 할 일을 다 한 일꾼처럼, 전쟁에 승리한 군인처럼 휴식을 취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재림할 때 깨어나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죽음도 또 다른 가까운 이웃의 죽음도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신앙에 합당치 못합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는 살아서 다시는 얼굴을 마주대할 수 없음에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영적으로는 오히려 축복할 일이요 부러워해야할 일입니다. 영생을 위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들어갔으며, 부활과 영생의 새벽이 기다리고 있는 잠이기 때문입니다. 눈뜨면 영생 천국과 하늘의 영광과 존귀와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 일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죽음의 공포를 물리칩시다. 사단이 주는 죽음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물리칩시다. 우리에게 죽음은 영원한 안식과 축복의 삶으로 진입하는 현관문과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25절에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손을 잡으시매’ 구약의 정결 규례로 볼 때, 시체를 만지는 일은 부정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그 손을 잡지 않고 말로만 하셔도 능히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죽은 소녀의 손을 잡은 것은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죽어 있는 아이를 ‘잔다’고 말씀하시고, 정말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일으키시듯이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심으로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외에도 공생애 기간 동안 두 명의 죽은 자를 더 살리셨습니다. 하나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로 인생의 최후 최대의 문제인 죽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생 최대의 문제인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능히 극복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인생에게 있어서 죽음의 문제만큼 큰 문제도 없습니다. 

죽음은 아담 이래 지금까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최대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다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언제나 죽음 앞에서 좌절하고 낙심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죽음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생명을 복제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본주의의 노력은 결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교만일 뿐이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극복이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이를 알리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안에서 죽음이 극복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 15:53-57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도록 합시다. 어떠한 경우에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신앙의 길에서 떠나지 맙시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메시아가 이 땅에 오면 “주의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고 예언했습니다. 이와 같은 증언과 실체를 우리는 본문을 통해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은혜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을 만진 여인도 무서운 병마에서 해방 받았고, 죽었던 소녀도 주님의 손길이 닿자 살아났습니다. 인생 최대의 문제인 질병과 죽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극락의 불나비’라는 책의 저자 김성화 목사님은 본래 대한 불교 정토종 교육국장과 포교국장을 역임한 분입니다. 이분이 불교대학을 설립하려다가 일이 잘못되어 김해 교도소에 수감이 되고 거기서 성경책을 읽게 됩니다. 그러다가 불교와 기독교의 놀라운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 인도의 구시라성의 시다림이란 숲속을 석가모니가 제자들과 같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외아들을 잃은 한 젊은 과부가 슬피 애통하며 석가모니에게 “부처님이시여, 내 외아들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자매여, 일어나 마을에 가서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의 쌀을 한줌씩 얻어다가 죽을 끓여서 먹이면 너의 아들이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젊은 과부는 기뻐서 마을로 힘 있게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해질녘에 젊은 과부는 빈손으로 힘없이 돌아와서 “부처님이시여, 하루 종일 다녀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이 없어서 한 톨의 쌀도 못 얻고 빈손으로 왔습니다.”고 울먹였습니다. 그 때에 석가모니는 여인에게 “자매여 생자필멸이라. 사람이 한 번 나면 반드시 죽는 것, 인연 따라 일어나서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이니 너무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을 주려고 젊은 과부를 하루 종일 걷게 만들어 놓고, 허탈상태에서 기진맥진하였을 때 가장 인간적인 척하며 얄미울 정도의 지혜를 짜내어 위로의 말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경을 보니까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의 애통한 장례 행렬을 보고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즉시 관속의 죽었던 자가 살아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생사문제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같은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이었는데 불교에서는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기독교에서는 생명의 삶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부활과 생명인 참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종교 부활의 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최대의 중대사인 생로병사는 결코 석가모니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의사도 과학자도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겉옷을 만지기만 했어도 고침을 받았던 예수님, 죽은 소녀를 ‘달리다굼’이라는 ‘ 한 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만이, 질병과 죽음의 해결자이심을 믿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질병과 죽음 문제를 해결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만병의 대의사시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