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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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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게 하시는 하나님 (시 23:1~6)


하나님은 엿새 동안 힘써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루를 안식하셔야만 했으리만큼 최선을 다한 창조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식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안식과 쉼은 어떤 면에서 보면 능력의 소진과 한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지치심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루를 쉬셔야만 했으리만큼 최선을 다하신 창조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완벽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세상을 왜 창조하셨을까요?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며 창조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아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중심과 목적은 사람입니다. 우리 사람의 중심과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중심과 목적은 사람이고 우리 사람의 중심과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신의 중심과 목적이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여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루를 쉬셔야만 했으리만큼 최선을 다하신 완벽한 세상의 창조는 그 목적과 중심이 우리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힘써 만드신 세상을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마치 ‘다 너 주려고 만들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는 아담에게 주시고 행복해 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 사람을 위하여 만드셨다면 우리 사람은 왜 만드셨을까요? 저는 그것을 자식을 보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를 닮은, 자기의 피를 이어 받은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사랑하며, 그 자식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식을 낳으시듯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 아담 즉 우리 사람을 위하여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그 세상은 그러므로 아름다웠고, 완벽하였으며 부족함이 없었고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평화가 넘쳤습니다. 거기에는 아픔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근심도 없고 사망도 없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면서 하나님이 내 거신 조건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이 그 아름답고 완벽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 즉 아름답고 완벽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믿음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자신의 삶의 주가 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단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입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그 아름다운 세상을 빼앗기 위하여 그 단 하나의 조건을 공격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지 아니하고 너 자신이 그 하나님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단 하나의 조건을 어겼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렇게 힘쓰셔서 만들어 주신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삶의 목적과 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으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의 뜻 즉 욕심을 이루고 채우는 것을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불행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욕심은 끝까지 채워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가 주는 물은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속에서 솟아 나는 생수가 되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절대로 끝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한 때 10억 모으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아마 10억만 있으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목표를 10억으로 정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10억을 모으려면 엄청난 수고와 고생을 하여야 합니다. 텔레비전에 어느 30대 주부가 그 10억 모으기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극기와 같은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달에 7천 원 정도 비용이 드는 쓰레기 봉투도 사지 않았습니다. 자기 쓰레기를 들고 나가 남이 버린 쓰레기 가운데 봉투의 여유가 있는 것을 찾아 거기에 자기 쓰레기를 담았습니다. 그러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었습니다. 힘듦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들에게는 10억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주부가 쓰레기 봉투까지 사지 않고 버티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는 아마도 성공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주부가 그 목표를 달성하여 10억 원을 결국 모았다고 하십시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고생을 뒤로하고 행복하게 살았을까요? 답은 물론 아닙니다. 사람의 욕심은 절대로 10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억이 없을 때는 10억이 커보이지만 막상 10억을 갖게 되고 보면 그것이 또 별것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더 큰 욕심이 생깁니다. 20억, 30억, 100억.... 그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결국 그 주부는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의 노예가 평생을 남의 쓰레기 봉투에 자기 쓰레기를 담으면서 살아야 하는 삶을 그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욕심의 문제는 불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욕심에서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온갖 것들이 나옵니다.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분쟁과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지 모릅니다.

욕심은 모든 사람을 다 자신의 경쟁상대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체육대회를 했었습니다. 학년 대항 체육대회였는데 경기를 할 때마다 응원이 치열하였습니다. 우리 학년도 아주 열심히 신나게 응원을 하였었는데 그 때 불렀던 살벌한(?) 응원가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밟아라, 밟아라 오뉴월에 개구리 밟듯이 콱콱 밟아라>였습니다. 2절도 있었습니다. <뽀개라, 뽀개라 동지섣달 장작 뽀개듯 팍팍 뽀개라>였습니다. 그것이 앞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겠다고 하는 신학생들의 응원가였습니다. 그 응원가를 부르며 우리는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모릅니다.

욕심의 치명적인 또 하나의 문제는 욕심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먼다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참으로 한도 끝도 없이 어리석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게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우리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의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성공한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우리가 욕심내는 부귀와 영화와 쾌락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솔로몬은 그와 같은 것들이 자신에게는 강물이 쉬지 않고 연이어 바다로 흘러들어 오듯 들어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삶았던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인지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강물은 연하여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도다>였습니다. 솔로몬은 절대로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그의 시편 23편에서 정말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솔로몬의 고백과 정반대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에 부족함이 없으며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없으며 언제나 넘치는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다윗의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하나님만 따르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하나님의 식과 뜻을 고집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정말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이해 안 되는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아니 거의 평생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만 예를 들자면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 다니는 사울을 단칼에 쳐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냅니다. 그리고는 또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삽니다.

다윗은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고통이 된다고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식과 뜻이라면 서슴없이 그것을 실천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으로 자신의 하나님을 삼은 사람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의 목자를 삼고 그 분의 인도만 따라 평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원수도 생겼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이 넘쳐 다윗으로 하여금 더 욕심 부릴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너무커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삶의 단 하나의 조건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목적은 세상 나라의 부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의 형통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도 보다 중요한 목적을 위한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구태여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는 목적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솔로몬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우리가 욕심내야 할 것은 세상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세상 나라의 삶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 나라의 삶은 부해도 갈한 세상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혹 가난해도 갈함이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행복과 사랑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단 하나의 조건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시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섬기던 높은 뜻 숭의교회가 예배당으로 쓰던 학교 강당을 비워 주어야 하는 일이 생겼을 때, 높은 뜻 숭의교회는 예배당 건축 대신 탈북자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 밖의 몇몇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일을 위하여 200억 원 헌금을 작정해 놓았었습니다. 탈북자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쓰기로 한 그 200억 원을 먼저 우리 예배당 마련하는데 쓰기로만 하면, 그리고 나중에 탈북자를 위하여 다시 헌금하기만 하면 문제는 큰 어려움 없이 해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 누가복음 9장 62절 말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는 말씀을 읽고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길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과 약속한 일을 절대로 뒤로 미루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높은 뜻 숭의교회가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삼은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세상의 상식과 기준으로 보면 엉뚱한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죽고 망할 것과 같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길은 세상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기막힌 축복의 길이었습니다.

네 개로 분립된 교회 중에 높은 뜻 정의교회가 있습니다. 얼마 전 학교로부터 아주 기가 막힌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학교가 강당을 신축하는데 교회가 5억 원 정도를 지원해주면 건물의 한 층을 교회 전용공간으로 사용하게 해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학교가 건물을 신축할 때 대부분 정부지원을 받아 공사를 하는데 최근에는 다만 몇 억 원이라도 학교가 공사비를 마련해야만 나머지 비용을 지원해 주기로 되었답니다. 

쉽게 말하면 학교에서는 그 돈도 마련하기 쉽지 않으니 그 돈을 우리 정의교회가 내주면 학교는 그 큰 공사비를 받을 수 있게 되고 학교는 교회를 위하여 공간을 내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학교도 좋고 우리 교회도 좋은 아주 좋은 안이었습니다. 그러면 정의 교회의 모든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정말로 좋은 안이었고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정의교회 담임목사로부터 그 일을 포기했다는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합법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집사이신 변호사가 찾아낸 것이었는데 교회가 학교 건물을 빌려서 쓰는 것은 몰라도 전용공간으로 쓰려면 용도변경 신청을 해서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신청하지 않고 쓰면 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너무나 교회 입장에서 보면 안타깝지만 포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의교회 담임목사가 저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높은 뜻 정신 아닙니까?>

저는 높은 뜻 정의교회 담임목사와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린 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이익이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식이 아니라면 포기하고, 아무리 그것이 손해가 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과 식이라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것 그것이 저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리는 탈북자들의 자활을 위한 공장을 세울 때 높은 뜻 숭의교회가 가졌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해야 할 일인가 아닌가만 생각한다> 저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유익을 포기한 우리 높은 뜻 정의 교회를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어 늘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호와로 자신의 목자를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대로, 명령하시는대로, 말씀하시는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하였던 말과 같이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으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넘칩니다>라고 고백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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