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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 (습 3:14~17, 엡 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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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 (습 3:14~17, 엡 6:5~7)


헬라어로 사람을 ‘안트로포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위를 향한 자’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부터 위롤 향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머리가 제일 위에 지어져 있습니다. 사람과 달리 동물은 대체로 땅을 향해 삽니다. 네 발로 혹은 배로 기어 다니며 거의 모든 동물들은 입이 제일 앞에 튀어 나와 있습니다. 동물들은 땅을 위한 존재이며 먹기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만은 위를 향한 존재이며 먹기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동물처럼 변하면 동물보다 못한 법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슬프게 합니다. 어떤 동물이 성폭행을 합니까? 동물 사회에서 사기가 있습니까? 동물들이 서로 모함하여 헐뜯고 죽입니까? 사람만이 서로 물고, 서로 뜯고, 서로 죽이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동물적인 삶을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사람들 스스로도 보람을 얻지 못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근심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죽여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동기간에 사이가 벌어졌습니다. 라멕은 성경에 보면 처음으로 첩을 두어 축첩제도가 생기게 하였고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었습니다. 노아시대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항상 악했습니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이 번성하게 되어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대항은 끝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은 죄인의 모습 그대롭니다. 
  
로마서 1:28에는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합니다. 29절에는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들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를 하나님은 미워하십니다. 
  
미국 뉴욕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후손의 다른 점을 조사하기 위하여 두 표본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신앙인으로는 미국의 걸출한 신학자요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가정을 택했습니다. 그는 프린스턴대학교의 설립자이며 칼빈 신학을 계승한 신학자입니다. 다른 한 모델을 마커스 슐츠의 가정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큰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사람입니다. 
  
에드워즈의 가문은 지금까지 8대를 내려오면서 부통령과 주지사가 3명, 대학총장이 13명, 그 가운데 예일대학교 총장이 2명, 인구 6백만 이상 대도시의 시장이 3명, 장. 차관급 공무원이 82명, 변호사가 149명, 판. 검사가 48명, 목사가 116명, 의사가 68명, 교수가 65명, 세계적 사업가가 75명, 뛰어난 발명가가 25명 탄생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슐츠의 가문은 후손이 1,062명인데 그 중에 교도소에 수감된 자가 6명, 정신병자. 알콜중독자가 58명, 창녀가 65명, 영세민이 286명, 교육받지 못한 자가 460명인데 이들에게 지출된 국고가 무려 1억 5천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가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유대인 속에는 안식일 DNA가 있다고 합니다. 수천 년을 안식일을 지키다보니 안식일 DNA가 생긴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선을 쌓으면 선DNA가 생깁니다. 수천 년 동안 악을 쌓으면 악 DNA가 형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DNA도 있고, 슬프게 하는 DNA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DNA를 만들어 대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스바냐 3:15에는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다음 17절에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여러분은 내 자녀이기 때문에 예쁩니까? 예쁘기 때문에 내 자녀입니까? 남편이 멋있어서 남편입니까? 남편이니까 멋있습니까? 예쁘기 때문에 아내입니까? 아내이니까 예쁩니까? 

미국의 어느 목사님에게 그 교회의 청년이 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자신도 이제 결혼을 해야겠으니 좋은 처녀를 소개해 달라고 청년은 목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어떤 사람을 원해?”하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예쁘고, 지혜롭고, 건강하고, 똑똑한 사람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등신부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은 “자네, 장가가기 틀렸네?” 하고 말했습니다. “왜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딱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시집을 가버렸네”. “누군데요?” “내 아내일세”. 자기 아내가 돼야 가장 예쁘고 가장 기쁜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람이 된 사람을 사랑하시고,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장난감 사줘”. 이 말은 손자가 할아버지, 할머니 대접하는 말입니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이 말은 학생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주십시오. 해 주십시오”.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성도의 말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품에 있고, 부모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자녀는 이미 부모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신 자, 보호받는 자 된 것을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미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사야 43:1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확인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참일 때 북군의 어느 장군이 링컨대통령에게 와서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링컨은 “하나님은 항상 우리 편인데 나의 관심은 ‘우리가 하나님 편인가’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이면 하나님이 구해주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편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끔찍이 챙겨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잘못해도 챙겨주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애굽은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마귀의 편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하고 싶어도 그렇게 못합니다. 마귀 편은 항상 마귀가 좋아하는 일만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마귀를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무엇 때문 미국에 끊임없는 테러를 합니까? 우리나라가 아프간에 파병한다고 우리도 보복을 하겠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기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보복과 전쟁이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 사람들은 편을 듭니다. 특히 전쟁 영화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 한 편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한 사람도 착한 사람 편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편이 이기를 원합니다. 
  
아기가 조금 자라면 예쁜 짓을 해보라고 시킵니다. 엄마 아빠가 “예쁜 짓”하면 아기가 예쁜 짓을 해요. 그런데 예뻐요? 엄마 아빠는 예쁘다고 야단이지만 남이 보면 별로에요. 그 정도는 다른 아기도 다 해요. 그런데 우리 아기가 하는 예쁜 짓은 예뻐요. 예쁜 짓이 나를 기쁘게 해요. 왜요? 내 자녀니까, 내 편이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기쁨을 줍니다. 사랑해야 기쁘게 합니다. 
  
아이가 아빠를 닮아 천식을 앓고 있는 아기가 있었습니다. 연신 ‘콜록 콜록’합니다. 그런데 아빠는 그 아이를 보고 “콜록거리는 건 안 좋지만 내 닮은 건 좋다”고 합디다. 내 자식이 하는 것은 그렇게 사랑스럽고 기쁜 일입니다. 로마서 8:28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는 짓이 예쁜 짓입니다.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올해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눈가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6에는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는 겉에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중심에 있습니다. 눈가림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눈가림만 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옵탈모둘리아’입니다. 이 말은 골로새서 3:22과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바울이 만든 용어라고 봅니다. ‘옵탈모스’는 눈이고, ‘둘로스’는 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눈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eyeservice 혹은 external service라고 합니다. 눈에 보기 좋게 섬기거나 겉으로만 섬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는 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못 속입니다. 
  
골로새서 3:22에서도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눈가림만 하면 사람은 기쁘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가림만 하면 왜 하나님께 기쁨이 안 됩니까? 하나님께는 눈가림이 안 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눈 가리고 아웅’이 되지만 하나님께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서 16:7에는 “사람은 외모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합니다. 로마서 8:27에는 하나님을 “마음을 살피시는 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식(外飾) 전문가였습니다. 겉으로만 거룩하고, 문자적으로만 순종하고, 말로만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하지만 속에는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마태복음 7:15에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봉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헌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독일 황제 칼 5세와 교황에게 고소를 당하고 사면에 그를 위협하는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황제는 루터의 모든 항의문을 취소하면 용서하겠다고 하였고, 하루의 여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루터는 “나는 이 모든 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있습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단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려 시력과 기억력을 함께 잃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와서 묻습니다. “시력과 기억력 둘 다 잃는 것이 불쌍하여 하나만은 잃지 않게 해 줄 테니 어느 것을 택하겠습니까?” 그 때 그는 “시력을 택하겠습니다.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보다 앞으로 일을 보는 게 낫겠죠”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이란 선택입니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에는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하나님께 좋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옛말에도 신통해야 인통하고 인통해야 형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오늘의 본문 6, 7절을 보세요. “마음으로”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 말의 영어 성경에 보면 “with all your heart”라고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라는 뜻입니다. 위선적 충성이나 억지로 시킬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중심 보신다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세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 ‘Coram deo’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라는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존전 앞에 있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종들의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굴복할 따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맹목적인 굴종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매를 맞고, 팔려가고,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순종은 참 순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의 부모님께 대한 순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한 선한 순종입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참 순종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형식적으로나 보이기 위한 가식적 모습이 아니라 참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 가운데 하나인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세요. 그들은 부요한 것 같았지만 가난한 것, 부족한 것,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 먼 것,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했지만 속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바울을 보세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속에 알맹이가 꽉 찬 곡식처럼 내면이 튼튼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3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경고하십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척’ 하지 마십시오. 곰을 만나면 죽은 척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곰을 만나 죽은 척했습니다. 착한 곰을 만났는데 이 착한 곰은 이 사람이 진짜 죽은 줄 알고 묻어주고 갔다고 합니다. 잘못 ‘척’ 하다가 죽는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37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눈가림으로 섬기라고 하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라고 하신 하나님이 눈가림으로 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절대 아닙니다. 

  결론 

영국의 시인 루퍼트 부르크가 어느 날 리버풀에서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갑판에 올라가 부두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 보자 절실한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배에서 내려 부둣가에 내려가 거리를 배회하던 한 소년에게 “얘야, 너 돈 벌 마음 없니?”하고 물었습니다. 소년은 “있지요”라고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이 돈을 받아라. 그리고 배가 떠날 때까지 여기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다오”.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돈을 들입니다. 

기쁨을 얻기 위하여 투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은 엄청난 투자를 하셨습니다. 그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꼭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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