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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의 복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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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박해받은 자의 복 (마 5:1~12)

   
2010년 새해 들어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팔복의 말씀을 집중 강해하였습니다.  팔복의 주제로 “행복을 찾아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길지 않은 말씀이기에 암송하여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미국 유니온 대학의 심리학자인 어니스트 리곤(Earnest Ligon) 교수는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 이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대로만 반응할 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팔복의 나오는 8가지의 덕목은 예수님의 인격에서 나온 말씀이요, 예수님의 생활 철학이요, 가치관이요, 인생을 가장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팔복의 말씀을 비유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팔복은 음악에서 8음계와 같은데, 8음계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렇게 8개의 기본음계가 있습니다.  한 옥타브의 8음을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노래합니다.  우리 사람은 8복이라는 덕목을 가지고 생활하면 인생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할 수 있게 됩니다.   도,미,솔 첫 번째 음, 세 번째 음,  다섯 번째의 음을 함께 모아 소리를 내면 으뜸화음이 연출됩니다.  넷째 음과 여섯째 음, 그리고 여덟 번째 음을 모아 소리를 내면 버금딸림화음으로 으뜸화음 다음으로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냅니다.   솔시레, 다섯 번째 음과 일곱 번째 음, 그리고 다시 2번째 음을 모으면 딸림화음이 연출됩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으로 신실하게 살고 인생을 아름다운 운율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동안 새벽에 나오지 못한 교우들을 위하여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원문을 보면 팔복의 모든 말씀이 “복이 있나니”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영원한 평안, 어떠한 환경에도 사라지지 않고, 줄어들지 않고, 식을 줄 모르는 항구적인 은총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복되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은총, 하나님의 나라에서 평안을 누리는 궁극적인 은총을 말합니다.  

원문의 복이라는 말은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이 복은 우리가 말하는 동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라는 개념보다 훨씬 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마카리오스라는 복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축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마카리오스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신들이 누리는 행복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은 은총,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이런 복들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복된 인생이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덕목이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 영혼의 갈급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를 말하는 원문의 ‘프토코스’라는 말은 비참한 상황에 놓인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의지할 곳이 없는 극빈자를 말합니다.  가난하다고 하는데,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가난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나는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극빈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그렇게 가난하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주시기를 사모합니다.  부족의 은혜, 그래야 채워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은혜를 받습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가고 차지합니다. 

두 번째 덕목이 애통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두 번째 복의 덕목은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 가난에 대하여 우는 것, 애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너무나 모자라고 보잘것없어 통회자복하며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에 대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애통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오늘 세 번째 복의 덕목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온유하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좀 무능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저 사람, 사람만 좋지’  그러면 무능한 사람, 제 밥도 찾아먹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하면 개성이 약한 사람, 다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주도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했다, 내가 실수한 것이다, 좀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 비굴해지고, 모자란 사람으로 알려는 이상한 풍조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유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온유한 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프라에이스’라고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부드럽고, 복종적이며, 겸손하며, 동정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혁교회를 이루신 칼빈 선생님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 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대로 온유한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고, 대대로 물려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 복의 덕목은 의에 주리고 목 마름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그러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사람의 간절한 욕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살아 있다는 말이요,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의로운 삶을 살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 고군분투하는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의라는 말은 의롭게 살아가는 의와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의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복음서로 내려오면서 의라는 말은 의롭게 살아가는 의를 말씀하는데, 서신서로 가면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려고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정성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은 영적인 만나로 먹이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섯 번째 복의 덕목은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말은 ‘자비로운’, ‘동정심이 있는’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은 단순히 동정심을 가진다는 말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풀고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굶주린 자에게 있어서 자비는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그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이 말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수동형으로 쓰여진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넣어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수동형으로 사용하는 용법입니다.  그리고 미래형으로 쓰여졌는데,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사람은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지막 심판 날에 긍휼로 갚아주시며, 영원한 구원으로 이끌어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섯 번째의 복의 덕목은 마음의 청결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청결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청결이라고 하였는데, 청결이란 말은 유대교회에서 정결예식에서 사용하던 말입니다.  불결하거나 더럽지 않은 것을 청결하다고 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것이 청결한 것입니다.  무엇이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것을 청결하다고 합니다.  청결한 것은 단순한 것으로 거짓이 없고, 이중적이지 않고, 성실한 것입니다. 

옛날부터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으로 7대 죄악이 있습니다. 음욕, 탐심, 시기, 교만, 미움, 혈기, 거짓을 말하였습니다.    이런 것에서 우리를 어떻게 하면 청결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말씀으로 우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평생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평생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늙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두문불출하면서 집안에만 박혀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의 허물을 내어놓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일곱 번째의 복의 덕목은 화평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본문의 “화평하게 하는 자”라는 말은 “화평을 만드는 자”, “화평을 창조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평화, 화평을 뜻하는 신약의 ‘에이레네’라는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의 “샬롬”이라는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온전한 평화와, 안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샬롬은 평화입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를 말합니다.  이 샬롬이라는 말은 내적으로 평강을 말합니다.  샬롬은 정의와 질서와 조화가 있습니다. 

엡2:14에서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두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화평을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 서로 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화평을 창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려집니다.   그것은 언약의 관계에 들어가고 가장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의 목의 덕목은 의를 위한 박해받음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예수님의 말씀 중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역설적이기 때문이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핍박을 받고 있는데, 그에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보면 핍박이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고,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대 세력을 만나게 되고, 핍박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10절의 말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말씀이 팔복의 말씀이고, 11-12절은 보충하는 설명구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다보니, 고통을 받습니다.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보니, 악한 사탄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박해합니다.   세상이 불의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니,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처럼 그의 어둠이 드러나게 되니 싫어합니다.  

우리는 어느 사회에 들어가든지 환영 받고,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시비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트집 잡고 비하하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딤후3:12에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설교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14:22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4:13-14에서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야 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받으셨기에 이제는 우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골1:24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첫 번째의 복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받은 복과 같습니다.  

11절의 말씀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들을 때에는 우리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우리가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전에 신앙생활하신 신앙의 선배들과 선지자들도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기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아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중에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따돌림을 당하고,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하고, 그런 모든 것들은 우리 주님이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일생 인정받고, 영광 받고, 융숭한 대접만 받았다고 하면,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빌1:29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에는 주님을 위한 고난도 받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운명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같은 삶을 살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10:38절에는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1888-1960) 하천풍언이라는 일본인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고베신학교를 나오시고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오신 일본의 가장 저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이 가가와 도요히꼬는 유명한 정치인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청년 시절에 폐병에 걸려 각혈하는 중에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고, 신학교를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빈민굴에 들어가서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며 희생적인 사역에 힘썼습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눈물겨워 차마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을 반대하다가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는 중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중국 장개석 총통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장개석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일본 천황이 항복 성명을 발표하자마자 장개석총통이 포고령1호를 발표하기를 “철수하는 일본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이 패전하자 외국에 나가있던 일본인들이 많이 죽었지만, 중국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내 민족의 원수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위해 지금도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가가와 목사를 생각할 때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다.”  

중국에서 살던 200만 명의 일본인들이 무사히 철수하게 되었는데, 그 뒤에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전후에 일본을 연합국들이 분할하려고 하였지만, 장개석이 반대함으로 분할할 수 없었습니다.   장개석이 가장 존경한 사람은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목사님이십니다.   일본에서 가장 예수님처럼 살아간 인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성자였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은 “산상수훈을 읽는 사람은 이미 어제의 그는 아니다.  그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집중적으로 팔복의 말씀을 상고했는데, 상식적으로 알기 위하여 팔복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예수님의 말씀하신 그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말씀이 나의 좌우명이 되고, 나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이정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선포된 말씀이 나에게 주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팔복은 우리 신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말씀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오르려고 하면 반드시 팔복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인생을 살기로 결단하신다면 팔복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과 살아가는 모습이 곧 우리의 것이 되어서,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작은 예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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